ADVERTISEMENT

“태극기를 호랑이로 바꿨더니 A매치 즐기는 여유 생겨”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27호 20면

스포츠 전문 디자이너 장부다씨가 자신이 디자인한 축구팀들의 엠블럼을 보여 주고 있다. 장씨는 “국내에도 스포츠 디자인을 연구하는 대학원 수준의 커리큘럼이 만들어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정동 기자

스포츠는 자석과 같다. 어떤 것에도 척척 달라붙는다. 스포츠 뒤에 경영·문화·철학·의학 등 뭘 붙여도 어색하지 않다. 그만큼 스포츠는 확장성이 뛰어나다.

정영재의 스포츠 오디세이 <13> 스포츠가 디자인을 만나면 …

디자인은 어떤가. 디자인 앞에 시각·공간·산업 등 어떤 것을 놓아도 의미가 통한다. 스타 PD 출신인 주철환 jTBC 제작본부장은 시간을 디자인하라는 책을 냈다. 요즘은 ‘금융을 리디자인하라’는 광고도 나온다. 그만큼 디자인은 범용성이 크다.

이 두 영역을 합친 ‘스포츠 디자인’을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념·비전 등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표현해 스포츠의 가치와 효용을 높이는 것쯤으로 정의하면 될 것 같다. 이번 평창의 겨울올림픽 유치 성공도 유치위원들의 역할 분담, 빛나는 최종 프레젠테이션 등 스포츠 디자인의 승리라 할 만하다.

이처럼 스포츠 디자인은 갈수록 범위와 영향력이 커지고 있지만 국내에서는 이제 막 시장이 형성되는 단계다. 스포츠 오디세이가 동굴 탐험을 하는 심정으로 스포츠 디자인의 세계를 더듬어 봤다.
 
스포츠 디자인 배우려면 ‘맨땅 헤딩’
‘축구 전문 디자이너’로 알려진 장부다씨는 국내에 스포츠 디자인이라는 영역을 개척한 파이어니어다. 그는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붉은악마의 상징으로 사랑받은 치우천황 문양을 디자인했다. 장씨는 프로축구 시민구단인 대전 시티즌, 경남 FC, 광주 FC의 엠블럼도 만들었다. 대전은 백제 금동향로, 경남은 가야 빗살무늬토기, 광주는 무등산과 1980년 민주항쟁 등 각 지역을 대표하는 요소들을 엠블럼에 담아 세련되게 표현했다. 장씨는 “프로스포츠단이라면 연고 지역의 가치와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구체적으로 시각화해 보여 주는 게 엠블럼”이라고 설명했다.

대학에서 관광경영학을 전공한 장씨는 붉은악마에서 활동하다 축구 디자이너의 길로 들어섰다. 독학으로 디자인을 공부한 그는 축구 전통이 오랜 유럽의 디자인을 연구하고, 이를 우리 실정에 맞게 응용했다.

장씨는 “스포츠 디자이너라는 직업군은 국내에서는 막 생겨나는 초창기라 할 수 있다. 제대로 된 교육기관이 없어 맨땅에 헤딩하는 식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스포츠산업이 점점 커지고 있어 이 분야는 선점하는 사람이 앞서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프로축구 수원 삼성의 캐릭터 상품을 생산하는 백승남 사장도 “국내 프로스포츠 역사가 30년에 이르면서 어린이 팬이 구매력을 갖춘 가장으로 성장했다. 이들이 학생 시절 머플러나 모자 등을 샀다면 지금은 고급 티셔츠나 침대 커버 등 생활용품을 산다. 이런 추세에 맞춰 스포츠 디자이너라는 직업군이 서서히 형성될 것”이라고 말했다.

스포츠 라이선싱 상품을 만드는 MK플러스의 김홍준 사장은 축구 국가대표팀의 호랑이 문장(紋章)을 만든 디자이너다. 2001년 대한축구협회는 대표팀 유니폼 왼쪽 가슴에 태극기 대신 축구협회 문장을 달기로 결정했다. 대부분의 국가가 국기 대신 자국 축구협회(FA) 문장을 다는 흐름에 동참하기로 한 것이다.

김 사장은 “디자인 모티브는 우리 국민과 가장 친숙하면서도 용맹한 호랑이에서 땄다. 백호를 선택한 것은 호랑이 중에서도 가장 영험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처음 디자인이 나왔을 때 사람들은 ‘이게 고양이냐 호랑이냐’라며 혹평을 했다. 하지만 대표팀이 좋은 성적을 내자 그런 소리는 쑥 들어갔다.

김 사장에게 호랑이 문양이 갖는 경제효과에 대해 물었다. 그는 “이 문양을 채택할 무렵 축구협회의 1년 예산은 200억원도 안 됐다. 지금은 1000억원에 달한다. 협회 수입의 대부분은 기업의 협찬인데, 그 기업들이 협찬의 대가로 대표팀에서 쓸 수 있는 이미지는 이 문양밖에 없다. 선수 사진은 별도 계약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호랑이 문양이 태극기를 대신한 것의 의미는 뭘까. “국가대표 선수들이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뛸 때 그건 경기 이전에 전투였다. 일본이든 북한이든 무조건 이겨야 했다. 지금도 필승의 각오로 뛰긴 하지만 경기를 즐길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됐다. 호랑이 문장은 축구 A매치가 내셔널리즘의 굴레에서 빠져나와 모두가 즐기는 생활문화가 되는 상징이었다.”

태극기 패션은 스포츠 디자인의 힘
김 사장은 붉은악마의 가장 큰 공로는 태극기를 우리 문화와 패션의 중심으로 끌어낸 것이라고 했다. 2002년 월드컵이 열리기 전 정부에서 태극기 패션을 보급하려 했지만 잘 안 됐다. 하지만 월드컵이 끝난 뒤 태극기 패션은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김 사장은 “이런 게 스포츠와 디자인이 만났을 때 나오는 거대한 힘”이라고 말했다.

축구협회와 프로농구연맹 등의 라이선싱 사업을 하는 조이포스의 한남희 사장은 스포츠 마케팅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고려대 겸임교수를 맡고 있다. 한 사장은 스포츠 디자인에 대해 “스포츠라는 무형의 서비스를 소비자들이 가장 만족할 만한 내용으로 풀어내는 것”이라고 전제한 뒤 “프로 구단이라면 우리 팀의 컬러·이미지·아이덴티티·전통 등을 어떻게 표현해 낼까를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프로 구단의 사인공, 캐릭터 상품 등을 만드는 한 사장은 “국내 구단들의 스포츠 디자인에 대한 인식이 너무 얕은 것 같다. 특히 대기업이 운영하는 구단들은 구단의 지향점을 팬이나 지역에서 찾지 않고 모기업의 색깔만을 드러내려는 경향이 강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가장 중요한 건 지역이고 팬이다. 롯데와 기아, LG와 두산은 분명히 색깔이 다르다. 현재 구단의 유니폼이나 각종 표현물이 그 색깔을 제대로 드러내고 있는지 깊이 고민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스포츠 디자인은 용기 있는 자가 차지할 블루 오션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