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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은 건 우승, 얻은 건 자신감 … 17번 홀 실수로 더 배웠어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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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7호 20면

서희경 선수가 US오픈 4라운드 17번 홀에서 버디 퍼트를 한 뒤 ‘들어갔다’는 제스처를 하고 있다. 하지만 공은 홀을 살짝 벗어났고, 서희경은 결국 보기를 했다. [콜로라도스프링스 AP=연합뉴스]

지난 11일 아침(현지시간) 벌어진 US여자오픈 연장전에서 유소연(21·한화)에게 패한 서희경(25·하이트)은 대회장인 콜로라도스프링스의 한식당에서 가족·스태프와 점심 식사를 함께했다. “무거운 분위기였냐고요? 전혀 아니었습니다.” 서희경의 아버지 서용환(52)씨는 “희경이는 캐디, 쇼트게임 코치, 트레이너 등과 잡채와 불고기를 아주 맛있게 먹었어요”라고 했다.

US오픈 준우승, 지고도 느긋한 서희경

역전패로 다 잡았던 우승 트로피를 놓치고도 기분 좋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트레이너와 캐디 등은 “한국에서 대단한 기록을 남긴 서희경의 진면목을 직접 보게 되어서 매우 기뻤다”고 했다고 한다.

서희경은 올해 LPGA 투어 신인이다. 목표는 신인왕과 1승, 상금랭킹 10위 이내로 잡아놨다. 지난해 LPGA 투어 대회에 초청선수로 나와 우승한 그는 정작 정식 회원이 된 올해 제대로 된 경기를 한 적이 거의 없다. 서희경은 “코스의 난이도가 한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예요. 전장도 길고 러프도 한국에 비해 훨씬 길지만 특히 그린 적응이 힘들었어요. 어떤 코스의 그린은 딱딱해서 공을 세울 수가 없고, 어떤 그린은 아주 빨라요. 매 코스 다른 전략을 쓰고 머리를 많이 써야 하는데 경험이 적다 보니 아무래도 쉽지 않았던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홀 지나가게 퍼트 하고 후회 말자”
아버지 서씨는 “한국은 전장이 360야드라고 해도 실제로는 이보다 짧은 경우가 많은데 여기는 한 뼘도 안 뺀 제거리 그대롭니다. 희경이는 미국에 와서 특히 내리막 퍼트에서 매우 불안해했고 그러면서 서서히 자신감을 잃었죠”라고 분석했다. 서희경이 치명타를 맞은 대회는 지난해 우승한 KIA 클래식이었다. 그는 “지난해에 우승했으니까 잘할 걸로 생각해 잔뜩 기대를 했는데 첫날 충격의 77타를 치면서 컷 탈락했어요. 아주 오랫동안 컷 탈락을 경험해 보지 않았기에 많이 위축된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이후 서희경은 톱10 한 번에 20~50위를 들락날락하는 평범한 선수가 됐다. 가족은 US여자오픈을 앞두고 대책회의를 했다. 딸의 경기를 10년 넘게 지켜본 부모는 “주눅이 들어 기량을 20%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건 아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자신 있게 제대로 쳐 보자. 그린이 빠르면 얼마나 빠르냐, 지나가게 퍼트 하고 후회하지 말자”라고 권유했다. 서희경은 “결과를 생각하지 말고 자신감만 찾아오겠다”고 약속을 했다.

이번 US오픈에서 서희경은 그 약속을 지킨 것이다. “결과보다 다시 마음껏 휘두르고 자신 있게 퍼트 할 수 있게 된 것이 가장 기뻐요”라고 그는 말했다. 물론 결과도 뛰어났다. 신인이라 그는 예선을 치러야 했는데 1위로 통과했다. 본 대회 3, 4라운드에서 기록한 연속 68타는 대단한 성적이다. US오픈은 여자 대회 중 가장 어렵다.

운은 나빴다. 4라운드 17번 홀(파5·600야드)에서 그랬다. 버디 퍼트를 하려고 어드레스에 들어갔는데 바람이 훅 불었다. 어드레스 상태에서 공이 움직이면 벌타가 되기 때문에 어드레스를 풀어야 했다. 다시 퍼트를 하려는데 바람이 또 불고, 또 불고 했다. 악천후로 경기가 지연되고 있던 터라 그는 시간 재촉을 받았다. 그가 친 6m 퍼트는 들어갈 것처럼 보였지만 갑자기 분 바람에 밀려 홀을 약간 지나갔다. 역시 시간에 쫓겨 친 70㎝ 파 퍼트는 홀을 스치고 지나갔다. 우승을 확정할 수 있는 퍼트였다.

서희경은 14일 오전 8시 올랜도의 닉 팔도 연습장에서 훈련 중이었다. 그는 중앙SUNDAY와 통화에서 “US오픈에서는 나쁜 기억보다 좋은 기억이 훨씬 많았어요”라고 말했다. “17번 홀은 운이 나빴지만 되짚어 보면 피해갈 수 있는 불운이었어요. 결과적으로 내 실수이고 이를 통해 한 가지 더 배웠다고 보면 되는 것이고요. 유소연 선수는 라이벌이 아닌 동반자라고 생각해요. 저도 지난해 초청선수로 LPGA 투어에 와서 얼떨결에 우승했는데 그때는 이런 저런 운도 따랐던 것 같아요. 길게 보면 운은 공평하다고 생각해요”라고 했다. ‘길게 보면 공평한 운’은 골프의 성인 보비 존스가 한 말이다. 서희경은 틈틈이 골프 역사책을 읽는다. 지난해 KIA 클래식에서 우승할 때 기자에게 봐야 할 책 리스트를 적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은 뿌리가 깊다. 작은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

서희경은 이번 준우승이 좋은 이유가 또 있다고 했다. 최근 올랜도에 78만 달러짜리 집을 샀다. 계약금 조로 25만 달러가 필요했다. 서울에서 송금을 해야 하는데 이런저런 절차가 복잡했다. 그런데 US여자 오픈 준우승을 하면서 35만 달러를 받게 되어 이 고민이 한꺼번에 사라진 것이다.

그는 말을 이어갔다. “이번 대회가 왜 중요하냐면요, 제가 올해 세웠던 목표 중 3분의 1을 확정했기 때문이에요. US오픈은 메이저대회라 신인왕 포인트가 2배가 되요. 이번 준우승으로 2위와 200포인트 이상 차이가 나는데 사실상 신인왕을 확정했다고 봐요.” 워낙 상금이 큰 대회여서 서희경의 상금랭킹은 11위로 올라갔다.

올해 세웠던 목표 중 가장 큰 건 우승이다. 서희경은 큰 꿈을 꾸고 있다. 이번 유소연의 우승은 LPGA투어에서 한국 선수의 99번째 우승이다. 서희경은 100번째 주인공이 되기를 원하고 있다. “하늘이 나를 100번째 우승자로 만들기 위해 한 템포 쉬게 한 것이라고 기대해요. 만약 99번째 우승의 들러리를 서고 100번째 우승의 주인공이 된다면 얼마나 멋지겠어요.”

우승한 날 저녁 먹고 또 연습한 독종
한국 선수 중 LPGA 투어 100번째 우승 주인공이라는 그의 희망이 실현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101번째가 되면 어떻고 102번째면 또 어떤가.

지난해 LPGA 투어 KIA 클래식에서 우승을 한 날 기자는 서희경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당시 서희경의 캐디를 맡았던 최희창씨는 “정말 독한 선수”라고 말했다. 그 얘기를 들으며 잠깐 얼굴을 찡그리던 서희경은 식사 후 방으로 들어가서 그날 마음에 들지 않았던 웨지 연습을 했다. NBA 챔피언 결정전 우승을 한 다음 날 아침에도 평소와 똑같이 운동을 하던 래리 버드처럼 지독한 선수였다. 서희경은 편하고 돈을 더 많이 벌 수도 있는 국내나 일본이 아니라 거칠고 험한 미국 투어로 건너갔다. 껍데기를 깨야 하늘로 비상할 수 있다고 서희경은 생각한다.

서희경은 15일 아침 LPGA 투어 에비앙 마스터스가 열리는 프랑스 알프스로 떠났다. “로키산맥에서 열린 US여자오픈에서 좋은 성적을 냈으니 알프스에서도 좋은 성적을 내지 않을까요.” 서희경은 늘 이렇게 낙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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