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밖 미술관 (2) 공간 재활용

중앙일보

입력 2011.07.15 00:25

업데이트 2011.07.15 0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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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서울 통의동 보안여관에 불이 켜졌다. 80년 가까이 나그네를 받던 이곳은 이제 문화예술 투숙객을 받는 실험미술공간이다. 현재 전시 중인 김형관씨가 창문마다 박스 테이프를 붙여 격자무늬를 연출했고, 여관 입구에서 불빛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우리는 너무 지우고만 살았다. 오래된 것은 얼른 부수고 새 걸로 바꿨다. 지키지도 않았는데 다행히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곳들이 있다. 옛이야기를 간직한 채…. 청와대 앞이라, 철로변이라 개발이 안 됐던 근대기의 여관과 살림집, 개화기의 역사를 간직한 공장과 창고, 이 낡은 곳들이 전시장·작업실로 되살아났다. 공간의 찬란한 재탄생, 이른바 재활용 미술공간이다.

#1. 보안여관

보안여관 입구 옆 자그마한 ‘조바’(여관 잔심부름꾼) 방은 인디아트숍 ‘예술을 파는 구멍가게’다. 전시 작가 김형관씨가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서울 종로구 통의동. 멀리 조선시대 진경산수화를 개척한 겸재(謙齋) 정선이 벗들과 노닐었고, 일제강점기 요절 시인 이상이 ‘오감도’에서 ‘막다른 골목’이라 불렀던 그곳이다. 통의동 2-1번지, ‘보안여관’이라는 예스런 고딕체 간판을 달고 있는 2층 벽돌집은 미당(未堂) 서정주가 1936년 투숙하며 김동리·김달진 등과 동인지 ‘시인부락’을 만든 곳이다.

 보안여관은 2004년까지 여관으로 영업하다 팔리며 몇 차례 주인이 바뀌었다. 북촌에 이어 서촌(西村) 개발 붐이 일며 너도 나도 낡은 건물을 사서 부수고 근사한 걸 새로 지어 임대사업을 할 때였다.

 80년 묵은 여관을 사들인 최성우(51) 메타로그 아트서비스 대표 눈에는 여기가 십 수 억원 하는 부동산으로만 보이질 않았다. 2009년 하반기부터 ‘낭만적 부락’ ‘보안여관:술화(述話)의 물화(物話)’ 등 이곳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과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실험적 전시공간으로 키워냈다. 일제강점기 신문과 꽃무늬 벽지를 몇 번씩 덧바른 벽, ‘고맙습니다-감사의 마음, 미안합니다-반성의 마음…’이라는 ‘일상의 다섯 가지 고마움’이라는 옛글이 쓰인 입구의 거울, 삐걱거리는 계단과 문짝, 공중변소 등등.

 이곳은 설치미술가들에게 도전적 공간으로 입소문 나며 이제는 나그네 대신 문화예술 투숙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최 대표는 “아트센터 같은 거창한 이름을 달지 않은 덕분인지 등산 마친 아저씨, 아기 업은 아주머니가 지나가다 호기심에 문 밀고 들어올 때가 가장 뿌듯하다”고 말했다.

 보안여관은 올해까지는 이곳을 기리는 전시를, 내년에는 장소를 본격 연구하는 세미나를 열며 리모델링을 고민한다. 28일까지 박스 테이프를 붙여 작품을 만드는 김형관 씨의 ‘인터섹션(intersection)’전이 열린다. 02-720-8409.

#2. 충정각

충정각은 일제강점기 독일 건축가가 지은 2층 양옥이다. 현재는 이탈리아 식당이자 대안미술공간이다.책을 쌓아 만든 식탁도, 벽에 걸린 그림도 작품이다.

 서울 충정로는 서대문 로터리에서 아현삼거리에 이르는 길이 800m의 8차선 도로다. 도로명은 1905년 을사조약 때 순국한 충정공(忠正公) 민영환의 시호에서 유래했다. 1946년 10월 일제식 지명을 우리 고유 지명으로 바꾸면서, 죽첨정(竹添町)이란 이름을 버렸다. 근방엔 한국 최초의 서양식 예배당인 약현성당(1892), 1930년대 지어진 충정아파트 등 오랜 기억을 간직한 장소가 있다.

 충정각은 이 대로변 골목 안에 숨어 있다. 신속배달 중국집을 연상시키는 이름의 이곳은 대안미술공간이자 이탈리아 식당이다. 가옥대장 및 이전에 살았던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 2층 양옥은 1910년대 독일 건축가가 벨기에 영사관으로 쓰기 위해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 조선 땅에 독일인이 짓고 벨기에 사람들이 드나들었던 ‘짬뽕 건물’이었던 셈이다.

 마지막 소유자는 이곳에서 아들, 손주네와 함께 52년간 산 할머니. 2007년 집은 경매에 넘어갔고, 개발을 기다리는 새 주인은 이곳을 식당에 임대했다. 식당은 미술기획자에게 무료로 사무실을 한 칸 내 주고 식당 곳곳에서 전시를 하도록 했다.

 미술평론가 성완경씨가 새 출발을 기념해 ‘충정로의 옛집’이라며 ‘충정각’이라는 이름을 지어 줬다. 식당 문동수(40) 대표는 “개업 전날까지, 이탈리아 식당이 이런 이름의 간판을 걸어도 되나 잠 못 자고 고민했다”고 털어놓았다. 이탈리아 식당에 ‘업혀’ 있는 대안공간 충정각에선 지난 4년간 450여 명의 작가가 전시를 열었다. 충정각은 9월에 충정로를 주제로 한 전시를 열 계획이다. 02-363-2093.

#3. 인천아트플랫폼

 1888년 지어진 일본우선주식회사(등록문화재 제248호)는 자료관으로, 삼우인쇄소(1902)는 교육관으로, 금마차다방(1943)은 커뮤니티관으로, 해안동 창고(1933)는 스튜디오로, 대한통운창고(1948) 두 동은 각각 전시장과 공연장으로.

 인천은 1883년 개항으로 서구문물이 들어오고 각종 근대적 도시 인프라가 갖춰지며 성장한 도시다. 특히 인천 중구 해안동 일대는 개항 이후 건립된 건축 문화재 및 1930∼40년대 지어진 건축물이 잘 보존된 구역이다.

 인천시는 구도심 재생사업의 일환으로 이 일대 건물을 매입, 13개동의 복합문화예술공간이 자리잡은 스트리트 뮤지엄을 조성했다. 인천문화재단은 이곳을 예술가의 작업실로 개방했고, 인천의 지역성을 탐구하는 기획전을 여는 등 장소의 의미를 오늘에 되새기는 활동을 벌이고 있다. 22일부터 다음 달 28일까지 제1회 인천평화미술프로젝트 ‘분쟁의 바다, 화해의 바다’전을 연다. 032-760-1000.

글=권근영 기자, 남보영 인턴기자(성균관대 경제학)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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