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남기고] 청춘은 맨발이다 (59) 어머니의 따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3면

1976년 1월 20일 서울 한남동 한강볼링장에서 열린 신성일씨의 모친 김연주(맨 왼쪽) 여사의 환갑 축하 자리. 가운데 소설가 최인호씨가 보인다.


남자가 중심을 잡아야 가정이 순탄하다. 남녀가 평등한 지금에도 일리가 있다고 본다.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이 왔다. 어머니와 아내 엄앵란, 나 셋이 이태원집 2층에 모였다. 아내에게 숨 쉴 공간을 만들어줘야 했다. 그래야 가정의 평화를 이룰 것 같았다. 어머니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어머니께서 나가서 사셔야겠습니다.”

 얼마나 충격이었을까.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어머니께 너무나 죄송했다. 일찍이 과부로 살아오면서 막내인 내게 특별한 애정을 쏟으신 분이셨다. 그런 분에게 이런 기막힌 요구를 하다니. 하지만 당시로선 그 길밖에 없는 것 같았다.

 “경아 엄마는 제가 데리고 살 여자이지, 어머니가 데리고 살 여자는 아니지 않습니까?”

 어머니는 며느리 앞에서 내 따귀를 때렸다. 평생 처음 맞는 따귀였다. 어느 정도 각오한 일이었다. 분노에 찬 어머니의 음성이 들려왔다.

 “불효자식!”

 다시 한 번 어머니의 손이 날아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내가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어머니께선 손을 잡히자마자 쓰러지셨다. 그리고 소파에 누우셨다. 나는 당황한 아내에게 말했다.

 “경아 엄마, 냉수 좀 가져와요.”

 어머니는 한참 동안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 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나는 속으로 ‘절대 기절할 분이 아니다’라고 생각했다. 어머니처럼 의지가 굳은 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내는 손을 덜덜 떨며 냉수를 갖다 바쳤다. 어머니께서 눈을 뜨신 후 냉수를 입에 대셨다.

 “생각해보자.”

 어머니께선 이 한마디를 던지고 1층으로 내려가셨다. 1층은 어머니, 2층은 우리 내외의 공간이었다. 사흘 정도 흐른 날. 아내가 다가왔다.

 “여보, 어머니께서 나가시겠다고 하세요. 집을 사 달라고 하시네요. 이미 집을 봐 놓으셨다는 거예요.”

 일단 반가웠다. 하지만 내가 모르는 게 있었다. 아들 내외와 대립하는 동안 정릉 국민대 부근의 집을 보아놓을 만큼 어머니께선 속이 깊으셨다. 집 앞으로 개천이 흐르는 예쁜 주택이었다. 지휘자 금난새의 부모님도 그 동네에 살았다. 금난새 어머니는 그 동네에서 유치원을 운영했다. 내 어머니는 그 곳에서 금난새의 부모님과 형제처럼 친하게 지냈다.

 어머니로부터 장롱 열쇠를 물려받은 엄앵란은 자신이 부릴 수 있는 사람 네 명을 집에 들였다. 일단 고부갈등은 줄어들었다. 나에 대한 아내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아내도 몰라보게 달라졌다. 차례·제사·명절·어머니 생신 등 집안 대소사를 알뜰하게 챙겼다. 나에게 실망했던 어머니를 흡족하게 해드렸다.

 대체로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면 마마보이가 되기 쉽다. 어머니에게 뺨을 맞은 순간, “알겠습니다” 하고 무릎을 꿇었으면 나 역시 마마보이에 불과했을 것이다. 엄앵란을 다시 한 번 죽이는 셈이다. 부부끼리 존경하고, 인정하고, 신뢰하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줘야 했다. 그때 선택에 대해 지금도 어머니께 죄송한 마음을 지울 수 없지만 말이다. 생각이 짧아 보였던 아들의 입장을 받아주신 어머니에게 감사할 뿐이다.

 어머니와 분가한 뒤 200여 만원을 들여 이태원집을 새롭게 꾸몄다. 2층집에 한 층을 더 올리고, 3층을 응접실·스탠드바·서재 겸 음악감상실로 사용했다.

정리=장상용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