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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력·질서·외교력, 일본 앞서려면 한참 멀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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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철현 전 주일 대사가 8일 오전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일본에서 한류가 확산되는 건 한국의 국력이 그만큼 커진 덕택”이라고 말하고 있다. 조용철 기자

“한·일 관계는 정치인과 외교관의 우호·친선만으론 부족하다. 정치적 기반에 매달리고 포퓰리즘에 흔들리기 때문이다. 기업이나 민초들이 나서야 변함없는 친구가 될 수 있다.”

3년2개월간 주일 대사를 마치고 귀국한 권철현(64·사진)씨의 말이다. 권 전 대사는 3선 의원 출신이다. 외교통상부의 순혈주의를 깨는 인사였다. 그런 만큼 권 전 대사를 보는 시각은 다양했다. 이명박(MB) 정부 들어 한·일 관계는 많이 바뀌었다. 과거사·독도 문제는 여전하지만 동일본 대지진이란 유례 없는 대사건이 터졌다. 중국의 급부상과 남북한 대치, 한류(韓流) 확산도 작용했다. 한·일 관계에선 애증이 엇갈린다. 일제 36년의 식민통치는 차치하더라도 역사왜곡·종군위안부·독도 문제까지 얽혀 수시로 외교 갈등을 빚는다. 하지만 일본만큼 가까운 나라도 없다. 권 전 대사를 8일 오전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만났다.

-38개월간 주일 대사로 일한 소감은.
“두 가지가 인상에 남는다. 2008년 부임 뒤 대사관 직원 165명을 개별 면담했다. 그런데 1965년 대사관 개설 후 직원 건강검진을 한 번도 실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다른 예산들을 최대한 절약해 현지직원 중심으로 첫 검진을 실시했다. 직원들의 마음이 열리고 바뀐 계기였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이명박 대통령이 일요일인데 휴대전화로 직접 전화를 걸었다. ‘일본과 300억 달러 규모의 통화스와프 계약을 체결하려는데 잘 안 된다. 권 대사가 이 문제를 해결하라’는 지시였다. 하지만 당시 재무대신은 반한 성향의 인사였다. 그래서 전·현직 고위 인사들을 상대로 물밑 로비를 했다. 협상을 끝낼 때까지 매일 대통령과 전화통화를 했다. 우여곡절 끝에 닷새 뒤 나카가와 재무대신이 오케이(OK)했다. 그때 내가 절감한 게 있다. 어떤 사태가 오더라도 빚을 쓰면 안 되겠다. 나라가 부강해야겠다. 그해 겨울 새해 연하장을 보낼 때 ‘부국강병’이란 인사말을 쓴 이유다.”

-그동안 한국이 어떻게 달라진 것 같나.
“외형상으론 도쿄와 비슷하고 선진도시 같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거리를 걸어 다니면 매연가스가 너무 심해 질식할 것 같다. 도쿄에선 대중교통을 많이 이용하는데 서울엔 승용차와 택시가 너무 많다. 거리도 시끄럽다. 자동차 경적에다 떠드는 소리까지…. 일본인들은 활기 넘친다고 말하는데 내가 보기엔 무질서한 것 같다. 국가의 격, 도시의 격을 높이려면 더 많이 노력해야 한다.”

-그래도 일본을 상당히 따라잡았다는 평가가 많다.
“한국 사람 중 ‘일본은 틀렸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 20년 장기불황과 리더십 위기, 동일본 대지진 같은 복합위기를 겪은 건 사실이다. 일본의 위기는 심대하고 광범위하고 장기적이다. 그래도 일본을 따라잡았다고 말할 수 없다. 삼성·LG·현대차·포스코처럼 부분적으로 따라잡았을지 모르지만 전반적으론 한참 멀었다. 일본은 100년 넘게 축적한 엄청난 기술력을 바탕으로 인공위성과 우주정거장을 쏘아 올리고, 과학기술과 관련된 노벨상 수상자가 14명에 이른다. 우리는 내실을 더욱 다져야 한다.”

-동일본 대지진 현장을 생생하게 지켜봤을 텐데 일본 사회의 차분한 대응 자세를 보고 무엇을 느꼈나.
“일본은 ‘안전대국’ 신화를 자랑해왔다. 동일본 대지진도 쓰나미와 원전 방사능 누출 피해가 겹치지 않았다면 피해가 훨씬 작았을 것이다. 이번 대지진을 계기로 일본 사회는 반성하고 있다. 세계화, 정보화, 정보기술(IT)에 늦었고 도전정신이 퇴색됐다는 것이다. 신(新)에도이즘(16~18세기의 고립주의를 지칭)에 빠졌다는 얘기다. ‘일본이 최고’라며 안주하던 일본이 세계를 향해 눈을 뜨기 시작했다. 만약 한국에서 그런 재해가 일어났다면 어땠을까. 우리도 안전국가, 안전사회 개념을 세우고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만약 대지진과 쓰나미가 도쿄를 타격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일본 사회에선 그럴 경우에 대비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도쿄 일극(一極) 중심을 벗어나자는 수도 기능 분산론이다. 우리도 대형 재해나 테러, 북한 군사도발 때문에 서울이 마비될 경우에 대비할 때라고 생각한다.”

-일본의 저력은 무서운 것 같다. 뭘 배워야 할까.
“3월 11일 오후 대지진이 났는데 하루 180여 차례 여진이 발생하고 빌딩이 휘청대고, 물과 음식이 동나고, 모든 교통이 끊겼다. 그날 저녁 대사관 앞길로 수십만 명이 걸어서 귀가하는 걸 보고 전율을 느꼈다. 떠드는 사람 한 명 없이 침묵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지는데 정말 공포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수퍼마켓마다 수백 명이 길게 한 줄로 서 있었지만 말다툼 장면 한번 볼 수 없었다. 물도 한 병씩만 샀다. 그들의 질서의식과 자제력은 정말 본받을 대목이다. 한국에서라면 어땠을까. 어느 조그만 호텔에서 우동을 배급했는데 재료가 없어 10그릇밖에 못 만들었다. 50여 명이 줄을 섰는데 앞사람들이 계속 뒤로 넘겨 맨 끝 사람에게 10그릇이 모두 넘어갔다고 한다. 이런 인내력과 질서의식을 가진 일본은 반드시 재기할 것이다.”

-일본·한국 외교의 역량을 비교하자면.
“둘 다 국토가 좁고 자원이 없고 인구가 많다. 이런 나라들이 잘 살려면 무엇보다 대(大)기술을 갖고 있어야 한다. 경쟁력 있는 신제품을 만들어 전 세계에 팔아야 번영할 수 있다. 둘째가 대(大)질서다. 먼저 먹고 먼저 가려고 다투다 보면 만인의 만인에 의한 투쟁이 벌어진다. 하지만 일본은 기술과 질서를 먼저 확립했다. 선진 일류국가가 된 비결이다. 셋째는 작은 나라일수록 외교력이 중요하다. 전 세계를 상대로 국가이익을 찾아내 확보해야 한다. 그러려면 자질 높은 외교관을 많이 양성해야 한다. 일본·네덜란드가 그런 나라다. 우리는 실패를 많이 했다. 외교관 수나 자질이 턱없이 모자란다. 우리는 외교관 수를 2000명에서 1500명으로 줄였다가 다시 2000명으로 늘리고 있다. 하지만 일본은 5000명에서 7000명으로 늘려가고 있다.”

-한국 외교가 어떤 분야에서 뒤지고 있나.
“각 분야의 전문가를 키워야 한다. 요즘 중국통 외교관이 없다고 말하는데 중국의 부상을 내다보고 인재를 미리 키워 놓았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중국으로 너무 쏠려 일본·유럽 쪽이 취약하다. 우리는 예방외교에 약하다. 사건이 터진 뒤 난리 치지 말고 미리 포석하고 준비해야 한다.”

-과거엔 김종필(JP)·박태준(TJ) 전 총리 같은 일본 네트워크가 있었다 지금은 그런 채널이 거의 사라졌는데.
“일본은 내각제이기 때문에 의원들을 많이 알아두면 나중에 그 사람들이 내각 각료나 차관이 된다. 내가 한·일의원연맹 간사장을 하면서 일본 정치인들을 오래 사귄 게 도움이 됐다. 일본 유학 때는 일본로타리클럽 장학금을 받았는데 많은 유력한 회원들을 사귀게 됐다. 자민당 정권이 54년 만에 붕괴되고 2009년 9월 민주당 정권이 들어섰다. ‘뉴 패러다임, 뉴 네트워크’가 필요했다. 그래서 국회에 주일대사관에 특별예산으로 10억원만 달라고 요청했다. 외교관들이 뛰려면 실탄이 필요하다. 그 돈으로 네트워크 형성에 몰두했다. 귀국 전에는 수없이 많은 환송연에 참석했다. 어느 환송연에 갔더니 전직 총리 2명, 현직 대신 3명, 전직 대신 5명, 16선 의원 등 여야를 떠나 20여 명이 모여있더라. 일왕까지 오찬 환송연을 해줬다. 귀국 전에 ‘네트워크 500’이라는 걸 만들었다. 내가 만난 인사 500여 명의 말버릇, 술버릇, 좋아하는 폭탄주 종류, 한국인 지인 등을 메모해 후임 대사에게 건네주었다. 우리는 전임자가 후임자에게 자료나 정보를 만들어 넘겨주는 전통이 너무 부족하다.”

-주일 대사 재임 중 일본 총리가 네 번이나 바뀌었다. 일본의 총체적 위기는 취약한 리더십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다. 왜 그런가.
“두 가지 때문이다. 첫째는 자민당이 개혁의 타이밍을 놓쳤다. 일찍이 위기를 감지했을 때 자민당은 뼈를 깎는 정신으로 재창당 개혁에 들어갔어야 했다. 하지만 ‘고이즈미 신드롬’ 덕에 6년간 집권을 연장했다. 그러다 당도 개혁하지 못하고 후계자도 못 키우고 정책개발도 못했다. 어느 정당이든 변혁의 시기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한나라당도 그렇지 않은가 싶다. 둘째는 선거구 문제다. 일본에 큰 정치인이 없다고 안타까워하는데 소선거구제 폐단이 크다. 옛날에 중·대선거구(3~5명 선출)를 할 때는 정치 거물들이 도쿄를 무대로 큰 정치에 전념했다. 그러나 소선거구제로 바뀐 뒤엔 죽기살기로 지역구에 매달린다. 국가 차원의 비전은 뒷전이다. 우리나라도 그런 점이 있지 않은가 생각된다. 국회의원들이 지역구 골목 정치에 매달린다. 구의원과 국회의원이 뭐가 다른가.”

-과거사·독도 문제가 끊임없이 반복된다. 일본 우익세력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야스쿠니 신사 참배나 종군위안부 문제는 어느 정도 정리됐다. 하지만 독도·역사교과서 문제는 우경화 경향으로 더 악화되고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냄비식 대응으로 나가면 안 된다. 독도 문제와 관련해 우리는 28가지 대응 시나리오를 만들어 놓았다. 맨 마지막은 군대를 주둔시키는 것이다. 일본이 도발할 경우 우리도 ‘비례의 원칙’에 따라 치밀하게 대응해야 한다. 나는 대사 재임 시절 이렇게 건의했다. ‘우리 정부는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건 오해의 소지가 있다. 한국 땅이 아니라는 느낌을 준다. 이제는 ‘영토주권 강화’라는 표현으로 바꾸자’는 내용이었다. 일본이 노리는 건 독도를 국제 분쟁지역으로 만드는 것이다. 누군가 미국 LA에 ‘독도는 한국 땅’이라는 대형 광고판을 설치했는데 다음날 바로 일본총영사관에서 철거를 요구하며 항의시위를 했다. 미국 땅에서 독도가 분쟁지역으로 전락한 것이다. 바보 같은 짓이다.”

-한·중·일 동아시아 협력 구도가 강화되고 있다. 3국 자유무역협정(FTA)을 어떻게 보나.
“한국은 FTA 강국이다. 굳이 일본과만 안 할 수 없다. 한·일 FTA 체결 땐 현재 300억 달러인 무역적자가 50억 달러쯤 더 많아질 것으로 본다. 우리 수출이 늘어날수록 일본산 부품·소재를 많이 수입해야 하는 측면도 있다. 중국과도 FTA가 불가피하다. 어떤 사람은 한·중·일 FTA를 동시에 하자고 하는데 이건 바람직하지 않다. 일대일로 따로따로 추진하면서 국익을 확보해야 한다.”

이양수 기자 yas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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