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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Story] 70~80년대 세계 프로레슬링 호령한 안토니오 이노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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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IGF]

일본 프로레슬링계의 전설이자 대부인 안토니오 이노키(68). 1970년대 내한경기에서 김일 선수의 박치기 세례를 받고도 곧바로 ‘이노키 싸대기’로 대응했던 거구의 일본인 프로레슬러. 76년 철권 무하마드 알리와의 일전은 그를 ‘아시아 최강의 레슬러’로 전 세계에 각인시켰다. 우리에겐 역도산의 제자, 김일 선수의 동료이자 라이벌로 더욱 친숙한 인물이다. 안토니오 이노키의 테마곡인 ‘이노키 봄바예’가 체육관 가득 울려 퍼지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붉은 가운 차림의 이노키. 링 위에 선 그는 ‘투혼의 상징’이자 ‘정의의 사도’였다. 이런 불굴의 이미지는 현재도 진행형이다. 지난달 말 ‘이노키 싸대기’로 일본인들에게 투혼의 힘을 불어넣고 있는 안토니오 이노키 IGF(이노키 게놈 페더레이션) 대표를 도쿄의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도쿄=박소영 특파원

같은 스승을 모신 김일(왼쪽)과 안토니오 이노키(오른쪽)는 링 위에서는 평생의 맞수였지만 링 밖에서는 돈독한 우정을 쌓았다.

● 3·11 동일본 대지진으로 일본 동북지역이 큰 피해를 당했다. 후쿠시마 등 재해지역을 위로 방문했는데, 현지 분위기는 어땠나.

 “후쿠시마 이와키시와 미야기현의 히가시마쓰시마 등 5곳을 돌았다. 집과 건물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현장에 말을 잃었다. 이재민들에게 어떤 말로 용기를 줄 수 있을지 떠오르지 않았다.”

●이재민들이 당신으로부터 힘을 얻었다고 했다.

 “친지들을 잃은 사람들이다. 이재민들이 모여있는 체육관에 가 보니 역시 어두운 분위기였다. 내 18번이 ‘겡키데스카!(안녕하세요)’인데, 이 말을 해도 되는지 망설여질 정도였다. 트레이드 마크인 붉은색 머플러가 유족들을 불편하게 할까 봐 가방에 초록색 머플러도 한 장 챙겨 갔다. 용기를 내 ‘겡키데스카!’를 외쳤더니 놀랍게도 ‘하이!(네)’라는 우렁찬 대답이 돌아왔다. 핑 눈물이 돌았다. 붉은 머플러를 목이 두르고 있는 힘을 다해 외쳤다. ‘힘이 있으면 다시 일어설 수 있다. 힘내자!’ 위로하러 간 내가 오히려 용기와 기운을 얻고 돌아왔다.”

●붉은 머플러를 두르는 이유는.

 “현역 선수 시절 링에 올라갈 때 붉은 타월을 목에 둘렀다. 붉은 가운을 걸치기도 했다. 은퇴하고 나서 한 팬이 붉은 머플러를 보내줘 항상 두르고 다닌다.”

● 당신은 맨 처음 한국에 역도산의 제자로 소개됐다. 이노키라는 이름은 역도산이 지었나.

 “중학교 2학년 때 브라질에 이민해 커피와 사탕수수·땅콩 등을 재배하는 농장에서 일했다. 나중에 프로레슬러에 입문하면서 예명으로 지은 것인데, ‘안토니오’라는 이름은 브라질에서 가장 흔한 이름이다.”

●역도산과는 어떻게 만나게 됐나.

 “이미 그때부터 체격이 남달랐다. 브라질 콜로니아주 육상대회에 출전해 투포환으로 우승했다. 1960년 4월 농장생활을 3년 만에 접고 상파울루의 중앙 청과시장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원정 경기차 브라질에 왔던 역도산이 나의 육상대회 우승 기사를 보게 됐다. ‘일본인 출신의 장사’라는 소문이 제법 났었다. 청과시장 이사장을 따라 호텔에 가 보니 역도산이 기다리고 있었다.”

●첫인상은.

 “멋있었다.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옷을 벗어보라’는 그의 주문에 셔츠를 벗고 앞뒤를 돌아 보였는데, 곧바로 합격이었다. 그 길로 함께 일본으로 건너왔다. 평소 프로레슬링을 좋아했고, 기회가 된다면 언젠가 선수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망설임은 없었다.”

[사진 = ©IGF]

●역도산의 훈련은 혹독하기로 유명하다.

 “당시엔 그게 당연했다. 요즘 시절엔 훈련하다 맞아 죽는 경우면 큰 사건이지만 당시엔 어쩔 수 없는 일로 여겨졌다. 훈련코치가 따로 있었기 때문에 선생님(역도산)이 훈련장에 매일 오진 않았다. 워낙 말수가 없었던 분이라 말로 가르쳐준 적은 없었다. 선생님 뒷모습을 보고 배울 뿐이었다.”

김일(선글라스 쓴 사람), 이노키(오른쪽에서 둘째), 자이언트 바바(오른쪽)는 역도산 1기 문하생으로 일본 레슬링계를 이끌었다.

●김일 선수와는 좋은 동료이자 경쟁자였다는데.

 “처음 일본에 왔을 때 도쿄 닌교초라는 동네에 도장이 있었다. 그 건물 안에 영화관도 있었는데, 한 사내가 다가와 악수를 청하더니 함께 영화관 가자고 하더라. 김일이었다. 그는 “난 한국인, 넌 브라질인. 친하게 지내보자”고 했다. 재일한국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심했던 시절이다. 김일도 힘든 일이 많았을 것이다. 우린 금방 친해졌다.”

●데뷔전은 언제였나.

 “60년 9월 30일. 도쿄의 다이토구 체육관에서 김일과 붙었다. 김일의 팔 꺾기 기술에 눌려 7분5초 만에 패했다.(웃음)”

●김일 선수의 박치기 위력은 어땠나.

 “아프지…. 아프다기보다는 그 순간 아무 생각이 안 난다. 그 정도의 충격이다.”

●당신을 세계적인 프로레슬러로 만든 경기는 76년 무하마드 알리와의 대결이었다.

 “당시 세계 최고의 주먹이던 알리가 한 기자회견에서 ‘나와 대적할 동양인은 없는 거냐’고 발언했다. 75년 6월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타이틀매치를 위해 일본에 잠시 들렀던 알리에게 도전장을 냈다.”

 당시 파이트머니는 18억 엔에 달했다.

●알리의 펀치는 어땠나.

 “맞을 때는 몰랐는데, 경기를 마치고 보니 조금이라도 그의 글로브가 닿았던 곳엔 혹이 생겨 있었다. 당시 알리가 글로브 안에 뭔가를 넣었다는 말도 있었는데, 정말 살짝 닿기만 해도 혹이 생길 정도의 위력이었다.”

 이노키는 알리와의 일전을 위해 두 달간 시합을 중단하고 장기전을 위한 몸 만들기에 들어갔다. 경기 당일 이노키는 링에 드러눕다시피 한 자세로 15라운드 내내 발차기로 공격했다. 알리는 경기 후 혈전 수술을 받아 한 달간 입원했고, 오른발 킥을 날렸던 이노키는 박리골절상을 입었다.

●현역 선수 중 대결해 보고 싶은 사람이 있나. 자제분을 프로레슬링에 입문시킬 계획은.

 “난 더 이상 싸우고 싶지 않다. 아들은 전혀 그런 타입이 아니다. 현재 미국 대학에 유학 중이다.”

⑦0~80년대 프로레슬링의 인기는 대단했다. 프로레슬링이 쇠락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현역 시절엔 7만5000명 관중이 도쿄돔을 가득 메울 정도로 인기였다. 지금의 프로레슬링과 비교한다면, 예전엔 팬들에게 전하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었다. 역도산은 전후 일본을 재건하자는 메시지였고, 나는 사람들에게 투혼을 불어넣고 청소년들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하려 했다. 그런데 요즘 후배들을 보면 캐릭터성은 물론이요, 자신만의 메시지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일본의 프로레슬링에 비하면 미국이나 유럽의 격투기 시장은 흥행에 성공하는 것 같다.

 “미국은 국민성이나 사회가 일본과 다르다. 스테로이드를 써서 근육을 만들고 멋진 몸매를 보여주는 일종의 쇼를 원한다. 하지만 일본의 팬들은 단순한 승패가 아닌 사무라이 정신을 요구한다. 역도산 시대의 ‘강인한 정신’ 같은 것 말이다.”

●‘프로레슬링은 짜고 하는 경기’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각본이 짜인 경기도 있나.

 “이노키의 프로레슬링은 진짜다. 모든 경기에 목숨을 걸고 임했다. 파키스탄에서 원정경기 중엔 상대방 선수 눈알이 튀어나온 적도 있고, 서울에서도 박성남 선수가 나와 경기 후 목숨을 잃었다. 사람인데, 당연히 미안한 마음이다. 하지만 경기에 임하는 선수는 프로다.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다.”

⑦0년대 한국에선 이노키와 미국 드라마 ‘원더우먼’의 주인공 린다 카터의 염문설이 있었다.

 “(폭소) 처음 듣는 이야기다. 만나본 적도 없다.”

⑧9년엔 스포츠평화당을 창설해 참의원(국회) 의원으로 정계 진출했다. 정치에서 무엇을 배웠나.

 “외교를 배웠다. 고르바초프와 옐친, 카스트로 등 세계를 움직이는 지도자들과 만났다. 90년엔 이라크전쟁 당시 이라크 당국에 의해 인질로 잡힌 일본인 기술자들을 구출하기 위해 이라크에서 프로레슬링 대회인 ‘평화의 제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결국 사담 후세인과 전화통화로 담판을 짓고, 일본인들을 데려올 수 있었다.”

역도산

●쿠바와 팔라우에 이노키 섬이 있다는데.

 “80년대 팔라우의 한 지자체로부터 섬을 선물받아 ‘이노키 아일랜드’로 불린다. 지금도 매년 수차례 방문한다. 쿠바의 섬은 의원 시절 카스트로가 ‘친구 이노키의 섬’이라고 명명한 둘레가 28㎞ 정도인 자그마한 섬이다. 쿠바의 특별권역으로 지정돼 일반인들은 출입할 수 없게 돼 있다. 이 섬은 보물섬인데, 섬 주위에 70여 척의 보물선이 가라앉아 있다.”

●지금까지 21차례 북한에 다녀왔는데, 북한과의 교류는 스승 역도산과의 인연 때문인가.

 “그렇다. 한 스포츠신문에 선생님의 딸이 북한에 있다는 기사를 보고 북한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따님 나이가 나와 비슷한데, 남편이 체육협회 회장을 지내는 것으로 알고 있다.”

●북한에서도 수차례 초대를 받았는데,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당신의 팬인가. 직접 만난 적은 있나.

 “만난 적은 없지만 내 팬이라고 한다. 95년 평양에서 경기했을 때는 김정일이 경기장에 왔었다. 작년 10월 평양에서 열린 노동당 창설 65주년 기념 열병식에도 초대를 받았는데,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그의 아들 김정은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줬다.”

●금강산에서 격투기 대회를 열고 싶다고 했는데.

 “평화를 주제로 대회를 열어보고 싶다는 뜻을 수차례 전했다. 수년 전 북한 정부 관계자에게도 그런 이야기를 했다. 금강산에 2000명 정도를 수용하는 작은 체육관이 하나 있다. 북쪽에서는 자유롭게 오지 못할 테니, 한국의 관광객을 모집하고. 생중계를 하되 출전 선수는 국적을 가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한국인, 미국인, 일본인 누구나 참여하는 평화의 장을 만들고 싶다.”

●일본에선 친북인사라는 이유로 당신을 비난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일본은 북한과 국교도 없는 상황에서 대화창구도 모두 닫아버렸다. 일본인 납치문제는 물론 심각한 사안이다. 하지만 납치문제와 국교 정상화는 별개 사안이다. 납치일본인 가족회 등이 나에게 별로 우호적이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김영남 등 북한 고위관리들과 친분이 있고, 유일한 채널이라고 판단하고 있는 모양이다.”

②1차례 북한을 방문하면서 변화를 느끼나.

 “표면적인 변화보다는 거리 사람들의 표정이라든가, 내년 완성되는 수력발전소와 나진의 경제특구 등의 변화를 봐야 한다. 30년 전 지금의 중국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90년대 한국 고위 관리의 부탁을 받아 북한에 메시지를 전달한 적이 있다. 당시 대북 쌀 지원문제 때문이었다. 올해 북한은 심각한 식량난을 겪고 있다고 들었다. 북한 사람들이 허기진 생활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

●지금 일본은 정치·경제·사회 전반적으로 침체된 분위기다. 당신은 이런 일본에 ‘투혼’을 불어넣자는 운동을 벌이며 현역 시절 이상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나도 요즘 내 인기에 놀라고 있다. TV·광고 출연도 많아 현역 시절 이상의 수입을 얻고 있다. 일본인들은 ‘이노키’ 하면 우렁찬 ‘겡키데스카’를 떠올린다.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힘을 불어넣어주면 다들 힘이 난다고 한다. 20년 넘게 때리고 다녔다(이노키는 짝짝 싸대기를 때리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런데 내 기합을 받은 사람들이 소원성취했다는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무슨 의술도 종교도 아닌데, 병이 낫고 취직이 되고 하는…내 에너지로 일본이 건강해지는 그날까지. 짝짝짝.”

안토니오 이노키

1943년 요코하마 출생. 본명은 이노키 간지. 중학교 2학년이던 56년 브라질로 이주. 브라질 지역 육상경기대회에서 투포환으로 우승. 역도산에게 발탁돼 60년 일본 프로레슬러로 데뷔. 72년 레슬링협회 격인 신일본프로레스 설립. 89년 스포츠평화당을 창당해 참의원 선거 출마, 당선. 95년에 재선에 나섰으나 낙선. 98년 4월 도쿄돔에서 은퇴경기. NWF헤비급 챔피언, IWGP헤비급 챔피언 역임. 현재 프로레슬링 경기와 각종 이벤트를 주최하는 이노키 게놈 페더레이션(IGF)을 운영 중.

중앙일보 특파원 ‘이노키 싸대기’ 체험

‘이노키에게 뺨 맞으면 소원 성취’
일본 정치·연예인들 줄서

j섹션 에디터의 지령이 떨어졌다. “안토니오 이노키의 투혼 싸대기를 맞아보라”는 것이었다.

 과거 동영상을 보니 건장한 청년들도 쓰러질 정도의 강도였다. 치아가 빠지거나 다치는 불상사라도 생긴다면… 어디 가서 맞고 다닌다는 소리나 듣지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 그러면서도 호기심이 발동했다. ‘개운(開運)’ ‘투혼주입(鬪魂注入)’의 대명사인 이노키의 싸대기를 맞지 않고선 진정한 인터뷰일 수가 없다고.

 인터뷰 당일. 비록 은퇴한 전직 레슬러라지만 1m90cm의 거인 이노키 앞에서 처음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조금만 살살 때려주면 정말 고맙겠다”고 어렵게 말을 꺼냈더니 그가 껄껄껄 웃는다.

 “소원 한 가지를 생각해 두세요. ‘투혼 싸대기’는 남녀노소 사람에 따라 강도를 달리하니까 너무 걱정 마시고.”

스마트폰으로 QR 코드를 찍어 보세요. 박소영 특파원의 ‘이노키 싸대기’ 체험과 이노키가 중앙일보 독자들에게 기를 넣어주는 싸대기 동영상을 볼 수 있습니다.

 “신경을 머리에 모으시고… 얍!” 그의 기합소리와 함께 솥뚜껑만 한 그의 손이 내 뺨을 후려쳤다.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지만 번지점프를 하고 난 느낌이랄까. 묘한 달성감 같은 게 느껴졌다. 그는 분명 프로였다. 요란한 소리에 비해 강도는 약했다. 뺨에 손자국도 남지 않았다.

 이노키의 ‘투혼 싸대기’는 그가 국회의원이 된 1989년부터 시작한 퍼포먼스다. 도쿄 고라쿠엔에서 초선의원 강연회가 열렸다. 강연 후 이어진 질의응답 시간에 한 청년이 “자이언트 바바(이노키와 함께 일본 프로레슬링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던 선수. 99년 작고)와 이노키 중 누가 더 강하냐”는 질문을 했다 “이 XX놈. 그런 쓸 데 없는 질문을.” 이노키는 그 청년을 단상으로 불러 자신의 배를 때리게 했다.

 겁먹은 청년이 때리는 시늉을 하자 이노키가 “다시 한번!” 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번엔 정색하고 주먹을 날렸다. 그 주먹이 명치에 제대로 맞았는데, 이노키는 본능적으로 싸대기를 날렸다. 그 청년은 2~3m 멀리 나가떨어졌다. “이노키 의원, 폭력 행사”라는 다음 날짜 신문 1면 톱 제목이 이노키의 머리를 스쳤다. 그런데 그 청년이 달려와 공손하게 감사 인사를 하는 게 아닌가. 이노키 의원의 폭행사건으로 비화될 수도 있었던 해프닝은 이렇게 일단락됐다.

 한 달 뒤 한 입시학원에서 강연을 하게 된 이노키 앞에 50명의 학생이 줄을 섰다. 놀랍게도 그의 투혼 싸대기를 맞은 학생 50명 모두가 원하는 대학에 합격했고, 이 소문은 일본 전역으로 확산됐다. 지금은 정계·연예계 할 것 없이 이노키의 ‘싸대기’를 요청하는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내 소원도 언젠가 이뤄질 거라는 기대를 버리지 못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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