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전쟁경보 <戰爭警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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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모든 전쟁에는 반드시 징후(徵候)가 있다. 그래서 적이 침략하리라는 사전 보고인 경보(警報)가 중요하다. 낮에는 연기를, 밤에는 불을 피워 보고했기 때문에 연화(煙火)라고도 한다. 경보를 낭연(狼煙)이라고도 한다. 이리 낭(狼)자를 쓰는 이유는 적군이 이리란 뜻이 아니라 이리 똥을 태운 연기는 바람에도 흩어지지 않고 위로 올라가기 때문에 봉화(烽火)의 소재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후한서(後漢書)』 『마성(馬成)열전』에는 북방민족을 막기 위해 낭연대(狼煙台)를 10리(약 4㎞)마다 설치했다는 기록도 있다. 임진왜란과 6·25는 다 사전 경보가 있었다. 통신사의 책임자인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이 “일본이 침략할 것 같다”고 보고하고, 부책임자인 부사(副使) 김성일(金誠一)은 “침략하지 않을 것 같다”고 보고했다면 당연히 정사의 보고를 채택해야 했다. 그러나 전쟁 준비에 나서기 싫었던 조정은 황윤길의 보고를 외면하고, ‘꿩은 머리만 풀에 감춘다’는 속담처럼 현실에 눈 감았다.

 전쟁 1년 전 회례사(回禮使)로 부산에 온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宗義智)와 하카다(博多)의 승려 겐소(玄蘇)는 조선 선위사 오억령(吳億齡)에게 가도입명(假道入明:명나라로 가는 길을 빌림)을 허용하지 않으면 내년에 쳐들어온다고 호언했다. 『연려실기술』 『선조(宣祖)조 고사본말』은 오억령이 이를 그대로 보고하자 조정과 민간을 의혹하게 한다면서 “즉시 오억령을 교체시켰다”고 전하고 있다.

 1949년 12월 육본 정보국이 『종합 적정판단서』에서 북한 남침 경보를 보고했으나 군 수뇌부가 외면했다는 김종필 전 총리의 최근 증언과 흡사하다. 경보를 무시한 사람들이 전쟁 준비를 철저히 할 리 만무하다. 임란 발발 열이틀 전인 선조 25년(1592) 4월 초하루 좌의정 류성룡이 대장 신립에게 ‘멀지 않아 변고가 있으면 적의 형세로 보아 그 방비의 어렵고 쉬움이 어떠하겠소’라고 물자 신립은 ‘그것은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답했다고 『징비록(懲毖錄)』은 전한다.

 총참모장 채병덕(蔡秉德)은 남침 가능성을 묻자 “백번 승산이 있으니 국민은 안심하기 바란다… 압록강까지 쳐밀고 갈 것이다”고 말했고, 해군 총참모장 손원일(孫元一)도 “북한군쯤의 방어에는 아무 문제도 없으니 안심하기 바란다(『연합신문』 1949년 5월 26일자)”고 호언했다. 이후의 경과는 모두 아는 바다. 경보를 다루는 자세는 그 군대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덕일 역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