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이우환, 뉴욕 구겐하임 점령하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8면

구겐하임 미술관 원형홀 아래 설치된 이우환의 작품 ‘대화’. 자연에서 주워온 두 개의 바윗돌이 산업사회의 출발인 철판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다. [뉴욕 중앙일보 양영웅 기자, 구겐하임 재단]

이우환

현대미술의 심장부,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이 한국 작가 이우환(75·사진)으로 뒤덮였다. 23일(현지시간)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이우환 특별전 ‘이우환-무한의 제시(Marking Infinity)’ 개막식이 열렸다.

 구겐하임에서 한국 작가 회고전이 열린 것은 백남준(2000년)에 이어 두 번째. 중앙 원형홀부터 나선형 전시실 6개 층, 부속 전시실 두 곳까지 구겐하임 전관에 이씨의 작품 90점이 들어섰다. 당초 부속실 두 곳에서 열릴 계획이었지만 구겐하임 측에서 판을 크게 벌였다. 한국 미술의 당당한 미국 입성인 셈이다.

 구겐하임 수석 큐레이터 알렉산드라 먼로는 “런던의 테이트, 뉴욕의 구겐하임·모마(MoMA) 등 주요 현대미술관들이 미국·유럽 중심에서 벗어나 아시아·중동까지 시야를 넓히고 있다”며 “이우환은 세계 미술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지만 미국에서는 비교적 덜 알려졌다. 이우환을 세계적 인물이자 현대의 거장으로서 조명했다”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의 마지막 작품 ‘다이얼로그 - 스페이스’를 제작 중인 이우환. [뉴욕 중앙일보 양영웅 기자, 구겐하임 재단]

나선형 전시 공간을 따라 이우환 예술의 역사가 휘돌아갔다. 비탈진 복도에 돌과 쇠 등을 주요 재료로 한 조각과 설치작품이 놓였다. 곡면의 벽에는 선, 또는 점으로 표현한 회화와 드로잉이 걸렸다. 일정한 기법으로 점을 반복해 찍거나 한 번에 획을 내려 그은 작품부터 점 하나로만 표현하는 최근 작업까지 동선은 물 흐르듯 이어졌다.

 이우환씨는 “화이트 큐브(흰 사각 방)가 아닌, 길은 비스듬하고 벽도 평탄치 않은 공간 앞에서 처음엔 혼란스러웠다. 결과적으로 내 작품을 더 생동감 있게 보여주고 몸으로 느끼면서 생각하게 만드는, 내가 가장 바라던 장소가 됐다”고 말했다.

이우환의 ‘관계항’. 바위로 인해 깨진 유리판 설치. 1968년 ‘모노하’ 운동 때 선보였던 초기작이다. [뉴욕 중앙일보 양영웅 기자, 구겐하임 재단]

 복도 난간 일부에는 반투명한 막을 쳤다. 반대편에서 바라볼 때 작품이 보일 듯 말 듯 아련해진다. ‘그린 것과 그리지 않은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안과 밖을 연결하는 것’ 등으로 요약되는 이우환의 예술세계와 맥이 통하는 전시 디자인이다. 4층 부속 전시실엔 ‘모노하(物派, 서구 모더니즘에 반해 일어난 1960년대 후반 일본의 예술운동)’ 시기의 작품 14점이 전시됐다. 돌을 방석 따위에 올려 마치 애초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 여기저기 놓아뒀다. 자연(돌)과 인공(방석)의 조우를 보여주는 작업이다. 전시는 최근작을 모아놓은 6층 부속 전시실에서 끝난다. 깨끗한 캔버스에 커다란 붓으로 회색톤의 커다란 사각의 점을 그려놓은 ‘다이얼로그-스페이스’ 시리즈다. 조각가이자 화가, 저술가이자 철학자로 활동한 이우환 40년의 역사를 온전히 보여주는 자리였다.

 이날 오프닝에는 티머시 럽 필라델피아 미술관장을 비롯한 각계 인사 800여 명이 몰렸다. 갤러리 현대 도형태(42) 대표는 “구겐하임 측이 생존 작가 전시를 이렇게 대규모로 한 건 처음이다. 한국 미술의 위상을 높인 엄청난 사건”이라고 말했다.

 수석 큐레이터 먼로는 “한국의 젊은 작가들은 이우환이 그러하듯 한국인이란 정체성에 얽매이지 않고 초월적이면서도 독창적이다. 컬렉션·전시 두 가지 측면에서 한국 작가에 대한 기대가 크다”고 말했다. 전시는 9월 28일까지 열린다.

이우환 회고전 맞춰 ‘한국의 날’도 열려

국제교류재단 20주년 기념…소설가 신경숙 등 전시 관람

23일(현지시간) 오후 4시,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특별한 행사가 마련됐다. ‘이우환-무한의 제시’ 특별전을 후원한 한국국제교류재단(이사장 김병국)이 재단 창립 20주년을 맞아 제 1회 ‘KF Day(Korean Foundation Day)’를 연 것이다. 재단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했던 미국인, 재미 한국계 유력 인사 등 250여 명이 참석했다. 미술관 지하 1층 피터스비루이스 극장에서 열린 공식 행사에선 리처드 암스트롱 구겐하임 관장의 환영사, 마크 민튼 뉴욕 코리아소사이어티 회장의 축사, 김병국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의 강연이 열렸다.

 참석자들은 1시간가량 이우환 특별전을 관람했다. 『엄마를 부탁해』를 현지 발간한 소설가 신경숙씨는 “구겐하임의 행사에 초청돼 이런 전시를 보게 될 줄은 몰랐다”며 “(소감이) 말로 표현이 안 된다”고 했다. 실험적이고 과감한 연주로 유명한 현악 오케스트라 세종 솔로이스츠(음악감독 강효)의 무대도 펼쳐졌다. 세계적 작곡가 진은숙의 ‘알레그로 마 논 트로포’ 등을 연주했다. 공연 뒤에는 리셉션이 열렸다. 이우환 특별전 개막식 초청 인사들도 함께했다.

 김병국 이사장은 “20년간 재단을 통해 교류한 현지 주요 인사들이 한국을 더 잘 이해하고, 서로 네트워크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이우환 전시와 연계해 만남의 장을 만들었다”며 “올가을에는 샌프란시스코 동양미술관에서 리움미술관 소장 분청사기 특별전과 함께 제2회 KF데이를 열 계획”이라고 말했다.

뉴욕=이경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