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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희·백건우 부부, 시와 음악의 깜짝 무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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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9일 시와 음악으로 함께 공연한 윤정희·백건우 부부가 청중에게 인사하고 있다. 프란츠 리스트에게 영감을 준 ‘사랑’에 관한 시와 음악 ‘사랑의 꿈’을 번갈아 들려줬다.

19일 밤 10시 무렵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피아니스트 백건우(65)씨가 예정된 연주를 모두 마쳤다. 앙코르를 앞둔 무대는 어두워졌다. 순간 목소리 하나가 흘러나왔다. 시(詩)였다.

 “오! 사랑할 수 있는 한/사랑할 힘이 남아있을 때까지/오래오래 사랑하라.”

 배우 윤정희(67)씨의 음성이었다. 그는 무대 뒤에서 마이크를 통해 시를 읊었다. 독일의 혁명 시인 페르디난트 프라일리그라트(1810~76)의 ‘오, 사랑이여’였다. 사랑을 노래하는 배우의 음성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로맨스보다 격정에 가까운 사랑이었다.

 “오! 하느님, 내게는 아무런/악의가 없었건만 하지만 그는/내 곁을 떠나네/눈물을 흘리면서.”

 백씨는 어둠이 내린 피아노 앞에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낭송이 끝나자 건반에 손을 올렸다. 프란츠 리스트(1811~86)의 녹턴 3번 ‘사랑의 꿈’이었다. 백씨가 연주한 ‘사랑’은 담담했다. 특유의 선 굵은 소리의 낭만적 선율이었다.

 연주를 마친 백씨는 무대 뒤의 아내를 불러 함께 나왔다. 서로를 다정히 포옹한 부부는 기쁨에 찬 표정으로 청중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남편은 아내의 손등에 살짝 입을 맞췄다.

 “생전 처음이에요.” 공연 후 만난 윤씨는 상기된 표정이었다. 부부가 함께 무대를 꾸민 것은 결혼 35년 만에 처음이라고 했다. ‘그림자’처럼 서로의 무대를 조용히 도왔던 부부다.

 “되도록이면 같이 나서서 뭘 하는 건 안 하려고 했죠. 하지만 이번엔 무대와 의미가 워낙 잘 맞아서 했어요. 내가 배우로서 할 수 있는 역할이기도 했고요.”

 백씨가 무대에 설 때마다 윤씨는 객석 가장 뒷줄에 앉아 조용히 응원했다. 앞쪽에 앉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날 무대까지 나서게 된 데는 뜻이 있었다.

 프란츠 리스트는 윤씨가 이날 읊은 시에 곡을 붙여 1850년 ‘사랑의 꿈’을 작곡했다. 먼저 성악 가곡으로, 이후 피아노 작품으로 만들었다. 이날 독주회의 주제는 ‘리스트와 문학’. 피아노 역사에서 중요한 작곡가인 리스트가 다양한 문학작품의 영향을 받아 만든 음악을 모았다. 빅토르 위고·에티엥 드 세낭쿠르 등 문학 작가와 리스트가 교감한 작품들이었다. 이러한 공연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 윤씨가 힘을 보탠 셈이다.

 백씨는 “이 시를 아내에게 낭독하게 하고 싶어 슬쩍 아이디어를 냈어요. 설득하기 어려울 줄 알았는데 의외로 바로 승낙하더라고요”라며 즐거워했다. 윤씨는 “청중 앞에 함께 설 일이 당분간은 없을 것 같지만 이번 무대를 잊기 힘들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백씨의 리스트 연주는 25일 한 번 더 열린다. 대곡인 소나타와 후기 작품들을 중심으로 ‘리스트 대장정’을 끝낸다. 19일 백건우의 리스트는 잔재주를 부리지 않는 기품과 뚜렷한 주관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더불어 부부의 도타운 사랑을 무대에서 보여준 이들을 청중은 한동안 잊을 수 없을 듯하다.

김호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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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소속기관

생년

[現] 영화배우

1944년

[現] 피아노연주가

194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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