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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핑퐁 정상회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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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정상회담(Summit)’이란 말이 등장한 건 냉전이 한창이던 1950년대였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 러시아·중국 최고지도자들과 독대하자 미 언론들은 정상회담이라 불렀다. 치열하게 대치했던 동서 진영 리더 간 만남이 거봉(巨峰)들의 대좌(對坐)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이젠 정상 간 만남이 일상사가 됐지만 1940년대만 해도 흔치 않았다. 유럽과 미국을 오가려면 왕복 10일간의 뱃길을 견뎌야 했던 탓이다. 하나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사정이 확 달라졌다. 루스벨트 미 대통령과 처칠 영국 총리, 스탈린 소련 서기장 등 다급해진 연합군 지도자들은 수만 리를 마다 않고 만났다. 게다가 한나절에 대서양을 건너는 민항기까지 나와 정상 간 회담이 빈번해진 것이다.

 이후 수많은 정상회담이 열렸지만 백미(白眉)는 72년 닉슨-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 간 미·중 정상회담이다. 냉전의 종언과 함께 데탕트 시대를 연 게 이 회담이었다. 늘 그렇듯 이 창대한 사건도 그 출발은 미약했다. 71년 일본 나고야 세계탁구대회에 참가했던 미국 선수 클랜 코완은 대표단 버스를 놓친다. 이를 본 중국 선수 좡쩌둥(莊則棟)은 그를 중국대표단 버스에 태워준다. 자연스레 둘은 친해졌고 사진도 같이 찍었다. 당시 중국에선 미국인과의 접촉은 처벌감이었다. 그러나 사진과 함께 자초지종을 보고받은 마오는 통 크게 미 탁구대표단을 중국으로 초청한다. ‘핑퐁외교’의 서막이었다. 교류의 물꼬가 터지자 막후에선 더 큰일이 진행됐다. 당시 닉슨 대통령은 키신저 국무장관을 밀사로 보낸다. 키신저는 일단 파키스탄으로 간 뒤 두통을 핑계로 경호원까지 따돌린 채 공식석상에서 빠져나온다. 그러곤 몰래 특별기를 타고 베이징에 입성, 역사적인 미·중 정상회담을 이뤄낸다.

 이렇듯 특별한 만남을 위한 극비의 사전접촉은 늘 있어왔다. 고대 로마도 외적의 침략을 피하기 위해 비밀협상을 했다. 두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 때도 밀사가 파견됐었다. 평소에도 그렇지만 이런 상황에선 더욱 ‘외교적 비밀주의’가 철칙이다. 그래야 자유스러운 논의와 타협이 가능한 까닭이다.

 11년 전 오늘은 역사적인 첫 남북 정상회담이 시작된 날이다. 이런 시점에도 북한은 지난달 남북한 비밀접촉 때의 대화를 공개하겠다고 난리다. 내용이야 어떻든 금도를 넘는 일이다. 아무리 전쟁 중이라도 “전령은 쏘지 말라(Don’t shoot the messenger)”는 게 동서고금의 검증된 지혜 아닌가.

남정호 국제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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