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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의 이야기가 있는 집 ④ 안동 ‘탁청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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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22면

이미령 여사가 탁청정종택 옛 부엌에서 나오고 있다. 아기자기한 안마당의 풍경에서 집을 아끼는 이 여사의 정성이 보인다.

낡은 고무신을 화분으로 활용해 꽃을 심었다. 500년 고택의 정취와 안성맞춤이다.

안동댐은 어떤 사람들에겐 일종의 트라우마다. 1971년 시작된 거대한 물막이 공사는 낙동강 상류에 자리 잡았던 ‘하회마을’ 십여 개를 수장해 버렸다. 문화재로 지정된 건물 일부는 옮겨졌지만 그렇지 못한 집들은 ‘수몰’됐다. 물에 묻힌 집들은 그냥 홑집들이 아니었다. 조선 중기부터 적어도 500년은 내려온 찬란한 명가들이었다. 요즘 같으면 어림없을 소리지만 당시는 문화적·역사적 가치보다 경제 가치가 우선시되던 개발연대였고 안동의 명문가들은 그 흔한 데모 한 번 없이 국가정책을 받아들였다. “나라를 건설하는 일은 대의(大義)고 문중을 지키는 일은 소리(小利)이니 승복하자”라고 공론이 모아졌더라 한다. 외내(오천)의 광산김씨도 그런 명문가 중의 하나였다. “마을 전체에 군자 아닌 사람이 없다” 하여 ‘군자리’로도 불렸다는 외내의 고래등 같은 기와집들은 새로운 장소로 집단이주 됐다.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만들어진 마을이 지금의 군자리다. 새 군자리에도 이젠 제법 역사가 생겼다. 마을입구 느티나무들도 우람해졌고 입구 기둥에 써둔 ‘적선여경(積善餘慶·선을 쌓는 집안에 경사가 있다)’ 글자들에도 고졸함이 감돌아 상처를 씻는 것은 역시 세월의 힘이구나 싶다.

글=김서령 칼럼니스트 psyche325@hanmail.net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세월의 더께 벗겨내니 집 전체가 보물

탁청정 종택. 오른쪽 옆에 보이는 정자가 탁청정이다.



오늘 우리가 찾을 탁청정도 그렇게 옮겨진 집이다. 16세기 처음 군자리에 자리 잡았던 입향조 김효로의 작은아들 ‘탁청정’ 김유(金<7DCC>)의 집으로 1544년 지어졌다. 군자리엔 후조당·설월당·양정당 같은 종가와 산남정·읍청정·침락정·개암정 같은 정자들이 즐비하지만 정작 후손들이 들어와 사는 집은 거의 없다. 조상이 물려준 집을 지키고 앉아있는 일이 항산(恒産)을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이고 그래서 종손들은 다들 도시로 떠났다. 안동의 숱한 한옥들은 주인이 살지 않아 대들보만 덩실한 채 속절없이 허물어지고 있다.

이곳 탁청정은 이름대로 정자지만 종택인 살림집이 바로 곁에 붙어있고 지금 후손이 살고 있어 윤이 자르르 흐른다. 그래서 500년의 어스름한 시간들이 현재의 명백한 시간들에 이어져 살아 숨쉬는 가치를 만들어낸다. 탁청정 종택엔 예전 중종·인조·명종·선조 시절의 어른들은 짐작도 못할 문명의 이기들이 집 안에 속속 들어와 있다. 수백 년 묵은 문짝과 마룻장에 살짝 숨겨진 가전제품들은 새롭게 맞닥뜨리는 조화이고 균형이다. 현재 이 집에 살고 있는 이미령(70) 여사는 한옥을 ‘반짝반짝 윤 내는 분야’에서 거의 달인의 경지에 올랐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집은 그의 손이 닿자 환골탈태했다. 낡은 반닫이도 놋그릇도 문짝도 의걸이도 심지어 헌 바가지와 채반도 그의 손이 닿으면 아연 ‘럭셔리’하고 ‘엘레강스’하게 변신한다. 요컨대 그는 오래된 물건들이 품고 있는 이야기를 끄집어낼 줄 아는 사람이다. 낯선 호칭 ‘여사’가 ‘여자선비’의 줄임말이라면 이미령 여사만큼 이 호칭에 잘 어울리는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을 듯하다. “벽지를 뜯으면 숨어 있던 벽장이 드러나고 벽장 위에 숨어 있던 다락이 발견되고, 이 집에 들어와 살면서 날마다 보물찾기하는 기분이었어요. 이렇게 구석구석 수납공간을 만들어둔 것은 방 안을 텅 비우기 위한 거지요.”

그런데 이미령 여사는 광산김씨가 아닌 진성이씨다. 원래 집은 여기서 몇 ㎞ 떨어진 도산면 퇴계의 송재종택(송재는 퇴계의 삼촌이다)이고 이곳 탁청정은 그의 외가다. “이 방이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가 처음 신방을 차렸던 곳이래요. 처음 만날 때 아버지는 탁청정에 앉아 있고 어머니가 처네를 쓰고 정자 앞에 있는 연못을 한 바퀴 돌아서 아버지께 선을 보였다지요. 아버지는 당시 신문기자였는데 처녀가 매우 미인이었음에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았던 모양이에요. 그래도 독립운동의 거물인 김남수의 질녀라는 점에 끌렸다나 봐요.”

나는 여러 번 탁청정에서 묵었다. 기와 위에 자라는 바위솔을 올려다보며 풋잠이 들기도 했고 아침햇살이 추녀의 그림자를 시시각각 창호지 문 위에 그려놓는 것도 구경했다. 그러나 가장 인상적인 풍경은 젊은 아버지가 두 돌을 막 넘긴 아기 이미령을 안고 조금 허탈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낡은 사진이었다. 이미령이 41년생이니 사진 속 남자에게는 식민지 지식인의 우울이 깔려있을 수밖에 없겠다고 나는 짐작했고 흥미로운 것은 그 얼굴이 영화감독 이창동과 꼭 닮았다는 점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창동은 그의 남동생이다.

낡은 바라지문 뒤에 숨은 현대식 부엌에서 이미령 여사가 차려내는 밥상 또한 여느 집과는 썩 다르다. 하긴 탁청정은 16세기에 이미 『수운잡방』이란 특별한 요리책을 남겼던 인물이니 탁청정에서 받는 밥상이 특별할 수밖에! “탁청정 부엌에는 늘 진미가 가득하고 독에는 항상 술이 가득하다”고 쓴 퇴계의 글도 있다.

아들 부부 합방 위해 터준 사랑방 쪽문

마루에서 뒷마당을 나가는 문. 빼꼼히 열린 틈으로 현대식 주방이 보인다.

“사랑방 뒷벽에 난 작은 문 봤어요? 거기로 나와 돌아가면 안방 뒷문과 연결돼요. 어른들이 합방할 날을 정해 줘야 만날 수 있던 젊은 부부를 위해서 그렇게 숨통을 틔워주는 집 구조가 재미있잖아요?” 그는 회갑이 되어 외가로 들어왔다. 두 아들에게 제 살림을 내준 후 피로한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추억이 깃든 옛집으로 낙향한 것이다. “뜰에 앉아 있으면 나비와 잠자리가 손등에 내려와 앉아요. 외사촌들이 아직은 내려와 살 형편이 못 돼 탁청정 종가가 우선 내 차지가 됐지요.” 탁청정은 사방으로 문을 들어올릴 수 있어 잠깐만에 방이 누가 되는 구조다. 3명이 앉아도 30명이 앉아도 좋을 탄력을 가졌다. 문 안에 다시 작은 문이 들어 있는 디자인은 기능과 미와 독창성을 고루 갖췄다. 문고리 또한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이렇게 빼어난 조상들의 감각과 안목이라니! 다른 말은 부질없다. 기회 있으면 안동 군자리로 탁청정을 구경가라고 권할 수밖에! 종택은 개인공간이지만 한석봉 글씨를 현판으로 달고 있는 정자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현대식 부엌·화장실 들여… “사는 사람이 편해야지요”

1 텃밭 옆 우물. 식수로 쓰진 않지만 텃밭 가꾸는 덴 요긴하다. 2 집 옆 텃밭엔 상추·부추·파·치커리 등 갖은 채소가 자란다. 3 침대를 들여놓은 안방. 4 은 안방. 옆면이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며, 마루에는 난간이 둘러져 있다. 5 건넌방 아궁이. 잔칫날이나 메주를 쑤는 날엔 바깥 부엌으로 썼던 공간이다. 6 탁청정 종택의 마루. 조상대대로 물려쓴 그릇 등 옛 대대로 물려쓴 그릇 등 옛열해 뒀다.



“한옥이 원시인들 사는 덴가요? 현대인에게도 불편이 없어야지 무조건 못 고치게 하면 누가 살겠어요.”

 500년 고택을 지키고 있는 이미령 여사의 목소리가 커졌다. 한옥 개조를 지나치게 까다롭게 규제하는 법 제도에 대한 지적이다. “문제는 어떻게 원형의 멋을 지키며 고칠지 그 방법을 찾는 것”이라고 여러 번 강조했다.

 2001년 탁청정 종택으로 거처를 옮긴 이 여사는 집 이곳저곳에 손을 댔다. 퇴행성 관절염이 도져 한옥의 오르락 내리락 생활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서였다. “수술까지 했는데 결국 재발했어요. 의사도 ‘한옥에 살면 100% 재발한다’고 경고했던 터였지요.”

 탁청정 종택의 가장 큰 변화는 현대식 부엌과 화장실이 생긴 것이다. 도시의 아파트와 견줘봐도 결코 뒤지지 않을 편리한 주방과 화장실이 그야말로 ‘감쪽같이’ 고택 속으로 들어왔다. 마당에선 물론이고, 마루에서도 주방과 화장실은 보이지 않는다. 원래 마루에서 뒷마당으로 통했던 문을 열면, 방·마루와 같은 바닥 높이로 주방과 화장실이 연결된다. 뒷벽을 따라 집을 증축해 주방·화장실을 집어넣은 것이다. 집 전체 면적(169㎡·51평)에 비해 증축 면적은 넓지 않다. 모두 합해 13㎡(4평)이 될까말까할 정도. 공사비는 2500만원이 들었다. 이 여사는 2008년 공사를 하면서 집 외관에도 각별히 신경을 썼다. 전통 한옥의 분위기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서다. 증축된 부분에도 기와지붕을 얹었고 외벽엔 나무 띠를 둘렀다. 원래 집의 일부분이었던 양, 밖에서 봐도 감쪽같았다.

 어떻게 고쳤나 주변에서 구경도 많이 왔다고 한다. 그대로 따라 하는 사람들도 생겼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이 집의 증축 공사는 ‘위법’이다.

 “집이 도(道)문화재라 신축·증축 공사는 허가가 안 나와요. 원래 건물을 고치는 것만 된다는군요. 텃밭 옆에 별채로 떨어져 있는 재래식 화장실을 현대식으로 개조해 쓰라는데, 집에서 10여m 떨어진 곳에 신식 부엌을 만들어 놓는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보기도 더 싫을 테고….”

 마루에 전면 비닐 창을 만들어 단 것도 큰 변화다. 앞이 완전히 뚫려 있는 마루는 겨울에 너무 추워 나가 앉을 수 없었다. ‘겨울 한 철만 달자’며 나무로 틀을 짜고 비닐로 창을 해넣었다. 비닐은 군용차 창문에 유리 대신 사용하는 것을 구해 썼다. 언제라도 떼어내기 쉽게 만들어 달았지만, 사시사철 요긴해 뗄 일이 없었다.

 “여름엔 마루에 에어컨을 켤 수 있어 시원하게 지낼 수 있죠. 또 봄·가을엔 송홧가루·먼지 등을 막아줘 청소하기가 한결 편해졌어요.”

 관절염 때문에 안방에 들인 침대도 어색하지 않았다. 침대의 헤드보드를 없애고 프레임 높이를 10㎝로 낮췄기 때문이다. 한옥의 낮은 천장을 고려한 인테리어다. 처음엔 매트리스만 사용할까도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궁이에 장작을 때 난방을 하는 방, 설설 끓는 아랫목에 매트리스를 직접 깔려니 과열이 걱정됐다. 그래서 목수에게 의뢰해 나지막한 침대를 따로 만들었다. “사는 사람이 즐거워야 된다”는 이 여사의 ‘신식’ 가치관은 이렇게 500년 전통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이제 더는 한옥 때문에 무릎 아플 일은 없을 듯했다.

이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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