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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 2011 선택은 잡을 수 없는 시간 피하지 못할 죽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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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황금사자상을 받은 독일관. 이곳에서 관람객들은 지난해 작고한 크리스토프 슐링엔지프의 자전적 영상물을 보며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어린 시절 모습부터 죽기 전 의사와 나눈 대화까지 작가의 일생을 담은 비디오아트다. [베니스 AP=연합뉴스]


잡을 수 없는 시간, 아무도 비껴갈 수 없는 죽음. 예술의 근본 주제다. 올해 베니스 비엔날레는 시간·죽음 등 인간사의 근본적이고도 묵직한 주제에 주목했다. 현대미술의 경향을 압축해 보여주는 격년제 행사인 베니스 비엔날레가 4일(현지시간) 개막했다. 올해에는 역대 최대 규모인 89개국이 참가했다. 해외 작가 기획전 등 37개 부대행사도 펼쳐진다. 전시는 11월 27일까지 계속된다.

지금 세계의 미술계는 무엇을 고민하고 있을까.

황금 사자상을 받은 크리스천 마클레이.

 제54회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심사위원단은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에 미국 작가 크리스천 마클레이(Christian Marclay·56)와 독일관 전시를 각각 꼽았다. 본전시와 국가관별 전시 두 갈래로 구성되는 베니스 비엔날레에서는 본전시 참여작가와 국가관에게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각각 수상한다.

 수상작인 마클레이의 ‘시계’(2010년작)는 지난해 말부터 올 초까지 국내에서도 소개된 작품이다. 서울 한남동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열린 개인전을 통해서다.

수천 편의 영화 속 시계 장면을 짜깁기해 실시간과 정확히 맞물려 상영되도록 한 24시간짜리 영상물이다. 보는 장르인 미술을 듣게 만든 사운드 아트 작업이자, 서로 다른 영상물의 저변에 ‘유유히 흐르는 시간’이라는 키워드가 관통하고 있음을 보여준 무게 있는 작품이다.

 국가관에 주는 황금사자상은 지난해 폐암으로 작고한 크리스토프 슐링엔지프(Christoph Schlingensief)를 대표작가로 내세운 독일관이 차지했다. ‘두려움의 교회(Church of fear)’라는 제목으로 전시장을 예배당처럼 꾸몄다. 이 엄숙하게 꾸며진 장소 곳곳에서 작가가 삶과 죽음에 대해 자전적으로 이야기한 영상물을 곳곳에 대형 스크린을 통해 상영했다.

 이외에 주목되는 젊은 예술가에게 수여하는 은사자상은 하룬 미르자(영국), 특별상은 리투아니아 국가관(다리우스 믹시스)과 클라라 리덴(스웨덴)이 각각 수상했다. 일생 동안 세계 미술계에 끼친 업적을 기리는 공로상은 일레인 스터티반(미국)과 프란츠 웨스트(오스트리아)에게 돌아갔다.

 올 베니스에선 전쟁·혁명 등 격변의 지구촌을 은유한 작품도 눈길을 끌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일부 국가관에서 이슬람혁명 등 올해의 큰 사건을 반영한 예술 작품들이 선보인 것에 주목했다. 예컨대 미국관 앞에는 뒤집힌 탱크 위에서 달리기 퍼포먼스를 한 설치작품이 나왔고, 이집트관에선 재스민 혁명 때 사망한 이집트 작가 아흐메드 바시오니의 마지막 퍼포먼스를 상영했다. 또 벨기에관에서는 성폭행 혐의로 구속된 스트로스칸 전 IMF 총재의 모습을 미디어 아트 작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비판적인 시선도 있었다. 현장을 둘러본 김선정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는 “메인 이벤트인 본전시의 개성이나 경향을 추려내기 어려웠다. 시장에서 잘 팔리는 작가들이 전면에 배치돼 미술의 도전정신이 빛 바랜 모습이었다. 그래서인지 국가관 전시로 관람객들이 더 몰렸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베니스만의 특색, 국가관
문화 위상 상징하는 공간 인식…나라마다 돈 쏟아부으며 경쟁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정경. [한국문화예술위 제공]

“저는 베니스 비엔날레가 일종의 문화전쟁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작가 개인뿐 아니라 국가간의 경쟁도 치열하고 자본도 엄청나게 들어가는 전쟁이죠. 저는 비엔날레에 참가하면서 그런 전쟁을 안 하겠다고 결심했어요. 그래서 전쟁을 상징하는 군복에 꽃무늬를 입혔고, 또 그 군복을 빨아서 빨랫줄에 늘어놓았어요.”

 올해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대표 작가로 참가한 이용백(45)의 말이다. 그가 이런 부담감을 느낀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베니스 비엔날레의 독특한 운영 방식 때문이다. 독일 카셀 도큐멘타, 미국 휘트니 비엔날레와 함께 세계 3대 미술제로 꼽히는 베니스 비엔날레에서는 본전시 외에 국가관별 전시를 꾸려 각국이 경쟁하는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특성 때문에 ‘미술 올림픽’이라고도 불린다.

 본전시는 총감독이 정한 주제에 따라 작가들을 선정해 전시한다. 여기까지는 여느 비엔날레와 똑같다. 국가관은 건립·유지·전시가 각국 부담이다. 별도 국가관을 갖지 못한 많은 나라들은 이탈리아관 한 켠에 공간을 마련해 자국 미술을 알리고 있다.

 베니스 비엔날레 주최 측은 전시도록도 국가별 알파벳순으로 만들고, 국가관에도 시상을 하고 있다. 국가관 전시는 그 나라 미술의 현재를 알리는 장이자, 나아가 국가의 문화적 위상을 상징하는 공간이 됐다.

 이런 운영방식은 베니스 비엔날레의 오랜 역사와 관련이 있다. 비엔날레가 창설된 1895년 당시 유럽서는 만국박람회가 한창이었다. 김홍희 전 한국관 커미셔너는 “ 참가국들이 국가별로 도열해 그 문화적 위상을 뽐내는 박람회 형식을 미술전에 그대로 적용한 게 베니스 비엔날레의 시작이었다. 예부터 패권주의 경향이 강한 행사였다”며 “주최 측 입장으로는 각국 국가관에 비용을 부담시키며 경쟁시키는 동시에 화제를 만들어내는 영리한 전략이 된 셈”이라고 말했다.

 한국관은 1995년 생겼다. 29번째 국가관이며 일본에 이어 아시아에선 두 번째였다. 한국관은 1995년 전수천, 97년 강익중, 99년 이불이 특별상을 수상한 뒤 오랫동안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하고 있다.

권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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