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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익 ‘다윈의 정원’] 지구의 ‘지배자’는 박테리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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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면

장대익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은하계의 다른 행성에서 지구 탐사를 나온 외계인 과학자들이 뭔가에 대해 열띤 공방을 펼치고 있다. “당연히 인간이지 무슨 소리야, 호모 사피엔스만큼 지배력이 강한 종이 지구상에 또 어디 있다고.” “어허, 이거 막둥이에게 너무 후한 점수를 주는 거 아니야? 종(種) 수로 따지자면 개미가 최고지.”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세 번째 외계인 과학자가 혀를 끌끌 찬다. “자네들, 정말 과학자 맞아? 아니, 여기 오래 있다 보니 지구인들처럼 멍청해졌나 봐.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지구의 진짜 지배자를 어떻게 못 알아볼 수가 있어. 지구의 대표는 단연 박테리아지. 박. 테. 리. 아!”

 현상을 더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우리는 때로 ‘외계인의 시선’이 필요하다. 지구의 생명체를 대표하는 선수를 공정하게 선발해야 할 때처럼 우리 자신이 당사자가 되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말하자면 외계인의 시선은 제3자 입장이다. 그 눈으로 보면, 지구의 지배자는 인간도 개미도 아닌 박테리아(흔히 ‘세균’이라 불림)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광학 현미경으로나 겨우 보일까 말까 한 이 미물이 대체 뭐 그리 대단하단 말인가?

 박테리아의 ‘연세’는 35억 살 정도다. 더 놀라운 점은 지구에 처음 등장한 이후 단 한 차례도 자취를 감춘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2억3000만 년 전에 출현해 1억6500만 년을 호령하다 6500만 년 전쯤에 자취를 감춘 공룡과 비교해 보자. 우리의 세균님께서는 그에 비하면 까마득한 대선배요 불멸의 생명체다. 또한 박테리아보다 복잡한 구조를 지닌 진핵생물도 생명의 역사가 반이나 지난 시점에 처음 등장했다. 최초의 다세포 동물의 경우는 어떤가? 그도 박테리아가 29억 살을 먹은 시점에서야 처음 출현했다. 그러니까 박테리아는 지구 생명의 역사에서 대부분의 세월 동안 주인 노릇을 해온 존재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박테리아가 나잇살만 더 먹은 것은 아니다. 총중량도 수퍼헤비급이다. 최근 발견된 바다와 지구 내부의 박테리아까지 포괄한다면, 세균은 생물량(총 무게)에 있어서도 나무를 제치고 가장 큰 생명체로 등극했다. 게다가 존재감도 최고다. 남극의 빙하 속뿐만 아니라 용암이 녹아 내리는 화산 지역까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곳이 거의 없을 정도다. 최신 연구에 따르면 사람의 피부에만 무려 1000여 종의 박테리아가 우글거린단다. 지구상의 어떤 다른 생명체도 이 정도 포스를 가진 것은 없다.

 이쯤 되면 고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처럼 “박테리아 만세!”를 외칠 만하다. 그는 지구의 생명체가 점점 더 복잡해지는 방향으로 진화가 일어났다는 통상적인 진보 개념에 반기를 들면서, 황량했던 35억 년 전이나 온갖 생명들로 가득한 지금의 지구나 생명체의 대표 선수는 박테리아라고 주장했다. 인간의 출현으로 복잡성의 최고치는 증가했지만, 박테리아의 무소부지(無所不至)로 인해 복잡성의 최빈값에는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박테리아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산다. 그의 ‘목표’는 자신의 복사본을 더 많이 퍼뜨리는 것이다. 물론 마음이 없는 세균들에게 그런 생각이나 의도가 있을 리 없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을 가장 잘 이해하고 예측하기 위해서는 실제로 그들이 그런 목표를 가지고 행동한다고 가정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세균의 눈높이에서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이런 관점에서 박테리아를 좋은 놈과 나쁜 놈으로 구분하는 방식은 지극히 인간 중심적이다. 예컨대 결핵균·콜레라균·탄저균은 독성 때문에 우리에게는 몹쓸 병원균으로 분류되지만, 그 자신은 매우 효율적인 복제장치를 가진 존재다. 반면에 장을 튼튼히 해주는 유산균은 우리에게 고마운 존재이지만 세균의 관점에서는 그저 자신의 생존과 번식을 위해 진화했을 뿐인 이기적 존재다.

 최근 독일과 스웨덴에서 16명의 목숨을 앗아간 장출혈성대장균(EHEC)이 전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고 있다. 이 대장균에 ‘수퍼 박테리아’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는 기존의 항생제로 잘 제압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수퍼 박테리아의 출현은 생명의 진화 역사에서 이상한 현상이 전혀 아니다. 그리고 그런 박테리아에 당하지 않기 위해 새로운 방어장치를 진화시킨 생명체의 출현 또한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박테리아나 다른 생명체나 모두 자신의 복제본을 더 많이 남기게끔 행동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그런 장치를 자연의 솜씨에만 맡기지 않았다. 우리는 세균에 견디게 해주는 예방주사를 발명했고 세균 자체를 몰살시키는 항생제를 개발했다. 다만 이번 사례처럼 세균을 ‘길들이는’ 우리 기술력의 속도가 세균의 자연스러운 진화 속도를 못 따라가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는 것이 문제다. 이런 진화적 이유 때문에 우리의 의학 수준이 더 높아질수록 박테리아의 역습은 오히려 더 심해질 것이다. 불행히도, 인간과 세균 간의 진화적 군비경쟁에는 휴전협정이 없다.

장대익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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