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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만난 사람 ┃ ③ 카페 주인 된 영화감독 이건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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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면

정확히 1년 전이다. ‘동네 카페’ 취재를 위해 서울 곳곳에 숨어 있는 카페를 찾아다녔다. 그러다 알게 된 곳이 성내동에 있는 ‘커피와글’이다. 손님이 직접 찍은 사진을 전시한다 하여 찾은 커피와글은 테이블 두 개가 전부인 66㎡(20평) 남짓한 좁은 공간이었다. 그러나 카페를 아끼는 손님의 마음씨와 주인과 손님의 살가운 관계는, 커피나 마시고 일어서는 여느 카페에선 찾아보기 힘든 풍경이었다. 이 정 넘치는 공간의 주인은 이건동(43)씨. 듬직한 풍채와 푸근한 인상의 40대 아저씨였다. 가게 여기저기에 놓인 비디오테이프와 빛 바랜 영화 포스터가 심상치 않다 했는데, 그는 자신이 “영화감독이었다”고 털어놨다. 그때부터였다.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기를 들어보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은.

글=윤서현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이건동씨는 자칭 ‘행복탐험가’다. 자신과 손님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일을 찾아 다니는 그의 얼굴에는 늘 웃음이 가득하다.

# 영화감독, 원두 볶는 사랑방지기가 되다

‘커피와글’은 한적한 주택가 좁은 골목 안에 있다. 묵직한 나무문을 열고 들어서면 카페 한가운데에 12인용 대형 원목테이블이 자리를 잡고 있다. 그 테이블을 초등학생과 한 쌍의 연인이 함께 차지하고 있었다. 초등학생은 숙제에 열중이었고, 연인으로 보이는 커플 사이에는 냉랭한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 커플 사이에 갓 구운 쿠키를 슬쩍 내밀며 주인 이건동씨가 말을 건넸다. 그 덕분인지 찬바람 일으키며 들어왔던 커플은 손을 맞잡고 돌아갔다. “화해해서 다행이에요. 이게 마법의 쿠키랍니다.” 이씨가 커플이 앉았던 자리를 정리하며 웃었다.

 이씨는 전도 유망한 미국 유학파 영화감독이었다. 그러나 필모그래피는 2003년 개봉한 ‘해피 에로 크리스마스’ 한 편이 전부다. 그에게는 “진심을 담지 못한 작품”이기도 하다.

 “원래는 22명이 등장하는 B급 ‘에로무비’였어요. 근데 제작사에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제 시나리오를 고쳤죠. 그러곤 차태현·김선아씨가 캐스팅된 거예요. 두 스타급 배우의 출연이 확정된 상태에서 감독을 안 하겠다고는 못하겠더라고요.”

 처음부터 자신의 작품이 아니었으니 촬영 내내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결국, 영화는 흥행에 참패했다. 첫 연출작을 내놓고 밀려드는 것은 허탈함뿐이었다. 그 허망함을 달래준 게, 뜻밖에도 커피였다.

 “영화 망하고서 만날 술이었지요. 어느 날 밤새 술을 마시고 집에 가는 길이었어요. 우연히 한 카페를 들여다봤는데 거기서 커피 강습을 받고 있는 아주머니 표정이 그렇게 밝을 수가 없는 거예요. 순간, 저게 뭐기에 싶었죠.”

 호기심에 접한 커피의 세계는 놀라웠다. 미국 생활 9년 동안 커피 한 모금 홀짝이지 않은 그였지만, 커피 아카데미 6곳을 수료하고 전국의 커피 장인을 찾아다녔다.

# 늘 와글와글한 ‘커피와글’을 위해

2008년 7월 커피와글을 열었다. 그때만 해도 카페에 전념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맛있는 커피를 내리며 시나리오나 쓰려고 했다. 한데, 같이 신나게 웃고 떠들고, 서로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단골이 늘면서 시나리오 생각은 까맣게 잊게 되었다. 대신 커피와글을 무대로, 손님과 함께 매일 새로운 ‘영화’를 찍고 싶어졌다. 한 동네에 사는 ‘배우’들이 마음껏 즐길 수 있도록 두어 달에 한 번씩 특별한 이벤트도 만들었다. 단골 출신 뮤지션이 결성한 ‘와글 프로젝트 밴드’의 데뷔 공연을 비롯해 가야금 연주회, 사진 전시회, 메이크업 강습을 잇따라 열었다.

 물론 사람들은 이벤트가 없는 날에도 커피와글을 찾아왔다. 여자친구에게 차인 20대 청년은 이씨 앞에서 밤새 울었고, 남편이 게임중독에 빠졌다는 30대 주부는 이씨를 붙들고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이렇게 조금씩, 커피와글은 삭막한 서울 주택가에서 온기 훈훈한 사랑방 노릇을 했다.

 지난 4월 23일 토요일 저녁 커피와글에서 봄맞이 콘서트가 열렸다. 운동복 차림의 남자 고등학생부터 갓난아이 업고 나온 엄마까지 30여 명이 카페를 메웠다. 초대가수 진호가 드라마 ‘연애시대’에 삽입됐던 자신의 곡 ‘만약에 우리’을 비롯해 노래 몇 곳을 감미로운 목소리로 들려주자, 이 작은 카페는 커피향만큼이나 행복한 공기로 가득 찼다.

 이씨가 가슴속에 간직하고 사는 말이 있다. 언젠가 한 손님이 이씨에게 건넨 “이곳은 다시 오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마력이 있다”는 칭찬이다. 그에게 바람을 물었다.

 “이곳에서 사랑을 키우고 정을 나누고 추억을 쌓으며 살았어요. 앞으로도 그러면 좋겠어요. 늘 와글거리는 소통 공간으로 남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이건동은 … 1968년 대전 출생. 서울 대원외국어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 유학을 떠났다. 인디애나대학에서 비교문학을 공부하다 영화에 빠져 뉴욕대학 등에서 영화를 전공했다. 97년 한국으로 돌아와 2003년 영화 ‘해피 에로 크리스마스’를 감독했으나 영화는 망했다. 2008년부터 서울 성내동에서 카페 ‘커피와글(blog.naver.com/coffeewaggle, 02-476-4775)’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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