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중앙시평

불신의 사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강원택
서울대 교수·정치외교학과

‘시(詩)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 말고 똑 이렇게 쓰럇다’로 시작되는 시인 김지하의 ‘오적(五賊)’이 발표된 것은 경제개발이 한창이던 1970년의 일이다. 김지하는 당시 지배층의 부정부패와 타락을 ‘서울 장안 한복판에 모여 살고 있는 다섯 도둑 이야기’로 풍자했다. 그가 말한 다섯 도적은 고급 공무원, 장성, 장차관, 국회의원, 재벌 등이었다. 이 시에서 시인은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국가 전체의 이익을 추구하기보다 사적인 영달과 이익을 좇는 행태를 비꼬았다. 시가 출판되던 무렵은 급속한 경제개발과 함께 사회경제적 격차가 커졌고 와우 아파트 붕괴 사고가 대표하듯이 부실시공과 비리가 횡행했으며, 정치적으로도 그다지 자유롭지 못했던 시절이다. 시 오적이 그린 세상은 사회 지도층의 공적 책임, 도덕성이 결여된 사회였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문득 오늘날은 과연 오적이 발표되었던 때와 얼마나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면에서 보면 부산저축은행 사건은 와우 아파트 붕괴만큼이나 충격적이다. 다수의 선량한 예금자가 피해를 당한 사이 특권층은 영업 정지 이전 몰래 예금을 빼냈고, 경영진은 정·관계 로비를 믿고 불법대출과 부실대출을 일삼았다. 그 과정에서 감독기관인 금융감독원 간부들은 그 은행 간부들과 유착되었고, 감사원의 감사위원은 금융감독원장에게 감사 강도를 낮춰 달라는 청탁을 했다. 이제는 금융정보원장도 관련자로 거론되고 있다. 물론 거액의 금품을 대가로 한 영향력 행사다. 공직을 이용한 사적 이익 추구의 전형적 사례이고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이다.

 부산저축은행 사건뿐만 아니라 고위 공직과 사적(私的) 이익 간의 충돌은 여기저기서 찾아볼 수 있다. 장차관은 퇴임하면 로펌에 취직하고 그 회사의 사적 이익을 위해 공공 기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로비스트가 되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로펌에서 근무하다가 다시 장관직을 맡기도 한다. 이처럼 고위 공직과 사적 이익을 오가는 회전문(revolving door)은 여전한 관행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부산저축은행 사건에서도 금감원 전직자들의 취업이 문제가 되었지만, 사실상 거의 모든 정부 부서의 대다수 장차관과 고급 공무원들이 로펌이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회사의 영입대상이 되고 있다. 오죽하면 대형 로펌의 수뇌회의가 국무회의급이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오겠는가. 최근 제도적 개선이 이뤄지기는 했지만 법조계의 전관예우 역시 퇴임한 전임 법관의 사적 이익을 위해 사법부의 재판권이라는 공적 권위가 일정 기간 활용되는 사례였다. 전관예우는 법원의 형량 선고가 법조인 간의 개인적 관계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걸 전제로 하는 것이다. 심지어 북한과의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국방부의 군납 비리, 부실 정비는 계속 드러나고 있다. 개인적 이익을 위해 국가 방위라는 공공재조차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김지하가 오적을 썼던 때와 오늘날을 그대로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민주화가 진전되었고 사회적 투명성이나 권력에 대한 감시, 언론의 자유는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향상되었다. 그러나 최근 일련의 사건을 보면서 과연 오늘날 고위 공직자들의 도덕성과 윤리가 오적의 시대에 비해 더 나아졌다고 말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고위 공직이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 전체를 위한 자리이기보다 개인의 사적인 치부와 출세의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보수나 진보와 같은 어느 정파와 관련된 문제는 아닌 것 같다. 특단의 대책이 없다면 보수정부이든 진보정부이든 이런 문제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비리 사건이 터질 때마다 국회의원들도 단골로 빠지지 않지만 그래도 정치인들은 선거를 통해 심판받고 일거수일투족은 언론과 시민단체의 감시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에 비해 행정부와 사법부의 고급 공무원들에게는 그와 같은 지속적인 감시와 감독이 어렵고 더욱이 공직을 떠난 이후에는 마땅히 견제할 수단도 없다.

 많은 국민이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보며 허탈해하고 상실감과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 북한의 연평도 포격보다 우리 체제에 더 위협적인 것은 국가의 공적 권위에 대한 불신이다. 와우 아파트의 붕괴가 시 오적의 시대를 상징했다면 오늘날에는 고위 공직자를 바라보는 신뢰의 탑이 소리 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강원택 서울대 교수·정치외교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