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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선 하나로 인간미와 성품까지…그가 캐리커처 그려야 ‘한국의 명사’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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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백절불굴(百折不屈 )’. 박기정(76·중앙일보 캐리커처 담당 비상근 고문) 화백은 이 넉 자를 묵묵히 종이 위에 썼다. 평생의 소신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 그 순간 박 화백의 얼굴 위로 그가 1964년 발표한 만화 ‘도전자’(사진)의 주인공 훈이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듯했다. 50여 년 세월을 시사만화·캐리커처·극화(劇畵)에 불태운 대가로서의 삶 또한 그가 창조한 만화 주인공들의 꺾이지 않는 강한 의지와 통한다. 1978년 2월 중앙일보에 입사해 만평과 캐리커처를 무기로 정권과 정치인을 통렬하게 비판하길 33년3개월. 한국 시사만화 역사의 살아있는 전설이 된 박 화백을 지난달 27일 서울 신사동 자택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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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시사만화와 극화를 동시에 평정한 유일한 작가이십니다.

 “그렇게 됐네요. 1956년 구(舊)중앙일보에서 시사만화 ‘공수재’로 데뷔했는데 그땐 신문사 월급만 갖고는 생활이 어려웠어요. 그래서 만화 단행본 출간도 병행한 거죠. 시사만화가 100m 달리기라면 극화는 마라톤이랄까. 단거리와 장거리를 동시에 뛰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극화는 오래가니 보람이 있죠. 64년작 ‘도전자’는 지금도 팬클럽이 생길 정도니까요. 반면에 한순간 통쾌한 건 시사만화입니다. 콧대 높은 위정자들을 박살내니까 말이죠. 한데 생명력이 짧아 아쉬워요.”

 -비판당하는 쪽에서 가만있지 않았을 텐데요.

 “제5공화국 시절엔 협박 전화를 참 많이 받았어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이었죠. 하루는 참다 못해 ‘당신이 사나이라면 얼굴을 내밀고 이야기해’라고 호통을 쳤어요. 그랬더니 그다음부터 좀 뜸해지더군요.”

 -매일 만평 마감하다 보면 스트레스가 엄청나셨겠어요.

 “마감 시간에 종이가 없어 찾으러 다니거나, 편집자가 문 열고 (빨리 마감하라고) 얼굴 비치고 가는 꿈 탓에 요즘도 가끔 가위눌려요. 스트레스는 술로 풀었어요. 한잔 쭉 마시고 잊어버리는 식이었죠. 담배는 하루에 서너 갑씩 피우게 되고요. 건강 문제가 심각해질 수밖에. 그래서 99년 중앙만평을 그만두게 됐죠. 우리 가족 중 머리숱이 없는 건 나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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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 인물보다 더 실감나는 캐리커처로 유명하신데요.

 “캐리커처는 인물의 성품이 포함돼야 살아나는 겁니다. 그 느낌이 붓을 타고 가는 거죠.”

 박 화백은 책장에 꽂혀 있던 스크랩북 두 권을 꺼내 들었다. 비단으로 감싼 낡은 스크랩북 표지를 넘기자 빛바랜 신문 스크랩 속 캐리커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맨 첫 장엔 1957년 3월 24일 날짜로 대한민국 헌법을 만든 유진오 박사의 캐리커처가 살며시 얼굴을 돌린 채 강직한 눈빛을 던지고 있었다.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누구셨나요.

 “(캐리커처를 가리키며) 여기, 조병옥 박사를 보라고. 선이 굵은 얼굴이죠. 조 박사는 ‘눈썹 없는 호랑이’라고 불렸어요. 눈이 호랑이 같잖아요. 실제로도 결단성 있게 처신하고, 앉으면 묵직하고. 그런데 장면 박사는 선이 엷게 나왔습니다. 그 사람의 섬세함이 반영된 거죠. 인터뷰하면서 참 많은 사람을 만났는데 향기 나는 사람이 감옥 가서 썩는 경우도 봤어요. 높은 자리에 앉으면 썩기 쉬워지는 겁니다. ”

 -인터뷰 대상은 사진이나 자료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 만나 캐리커처 하신 걸로 이름났는데.

 “옛날 정치인들에게 많이 배웠어요. 그분들 뜸을 들여 대답하는데 실수가 없더라고. 그때 내가 20대 초였는데도 독립운동 하신 분들은 나를 ‘박 동지’라고 부르고, 독립운동 안 한 사람들은 ‘박 화백님’이라고 불렀어요. 사람에 따라 존칭이 달라졌죠. 그땐 젊은 혈기에 겁이 없는 편이었는데 그들과 대화하며 내가 얼마나 못났는지 안 겁니다. ”

 -화가들이 자화상 그리듯 본인의 캐리커처도 그리셨겠죠.

 “아쉽게도 내 캐리커처를 못 그렸어요. 내 얼굴이 못난 탓도 있지만 잘 그리려고 시도하다가 계속 실패만 하는 바람에 미완성이랍니다.”

 -이현세의 걸작 ‘공포의 외인구단’도 박 화백 덕에 태어난 것 아닌가요.

 “내가 창작 야구만화를 처음 시도한 건 맞아요. 64년 발표한 ‘황금의 팔’이 었죠. 나중에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됐는데 이 작품 이후 야구만화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일찌감치 60년대에 어떻게 야구·복싱(‘도전자’), 축구(‘치마부대’), 레슬링(‘레슬러’)을 소재로 그릴 생각을 하셨는지.

 “당시에는 스토리 만화가 거의 없었죠. 팔리든, 안 팔리든 남이 안 하는 작품을 한다는 것이 내 원칙이었어요. ‘치마부대’의 경우 계집아이들이 축구로 사내애들을 누르는 스토리였으니까 시대를 꽤 앞서간 셈이죠.”

 -중앙일보 시절에 가장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중앙일보엔 시사만화가로 입사했어요. 사람들이 이름이 똑같다면서 ‘도전자’ 그린 만화가 박기정을 잘 아느냐고 물어보는 겁니다. 관계가 어떻게 되느냐면서요, 하하.”

 -평생 일터였던 중앙일보를 떠나십니다. 인생 후반전의 계획을 들려주시죠.

 “이제부터 제2의 그림 인생이 시작되는 겁니다. 야구를 배경으로 한 가족만화를 1000쪽 정도 짜놓고 손보기 시작하고 있어요. (약속 내용이 빼곡히 적힌 달력을 가리키며) 작품 하려면 약속을 하나하나 정리해야겠죠.”

글=장상용 기자, 사진=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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