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년 미국 시카고에서 두 엘리트 청년이 소년을 유괴해 엽기적으로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레오폴드와 로엡 사건’이다. 레오폴드와 로엡은 자신들의 정신적 우월성을 입증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완전 범죄’를 꿈꾸며 살인을 저지른다. 이달 5일 사망한, 뮤지컬 ‘웨스트사이드 스토리’의 극작가 아서 로런츠가 시나리오를 쓰고 히치콕이 감독한 영화 ‘로프’는 바로 이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샌드라 불럭이 형사로 나온 영화 ‘머더 바이 넘버’도, 국내에서 2007년 초연된 뮤지컬 ‘쓰릴 미’도 그렇다. 완전 범죄가 영화·연극·문학의 꽤 쓸 만한 소재인 셈이다.
범죄 행위에 나서는 사람치고 자신이 붙잡힐 거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나같이 완전 범죄를 꿈꾼다는 얘기다. 이러니 인간 사회에서 범죄 행위가 없어질 리 없다. 완전 범죄의 전제는 증거인멸이다. 실제 범인이라도 유죄를 입증할 증거가 없는 한 결백을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세상에 완전 범죄는 있을 수 없다는 게 오랜 사회 통념이다. 달팽이가 늘 지나간 흔적을 남기듯 모든 범죄는 증거를 남기는 법이다. 증거를 인멸해 완전 범죄를 꾀하려면 우주의 블랙홀로 증거들을 집어넣는 게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스티븐 호킹의 말을 빌리면 블랙홀로 무엇인가를 던졌을 때 그 안에 들어있는 정보는 영원히 소실되기 때문이다. 증거 인멸을 위해 부수고 태운 컴퓨터의 뇌까지 ‘디지털 포렌식스(digital forensics)’ 수사 기법으로 정밀 복구해 증거로 활용하는 세상이니 그럴 만도 하다.
완전 범죄의 장애는 증거만이 아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서 주인공 라스콜니코프는 완전 범죄를 저지르고도 결국 자수한다. ‘양심과 죄의식’에 이끌려서다. 선현과 종교의 가르침도 완전 범죄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지우라는 거다. 소크라테스는 “완전 범죄가 가능한 상황에서도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고 설파했다. 올바른 행위만이 진정한 행복을 보장한다는 이유에서다. 불교가 말하는 업보(業報), 인과응보(因果應報)의 가르침도 다르지 않다.
대학 교수가 ‘시신 없는 살인’이라는 완전 범죄를 노리고 아내를 살해·유기한 사건의 충격이 크다. 주도면밀하게 증거 인멸을 시도했지만 강에 버린 아내의 시신이 발견돼 허사가 됐다. 한을 품고 죽었을 아내가 시신으로 돌아와 결정적 증거가 된 셈이다. 완전 범죄의 헛된 꿈에 사로잡힌 인간의 어리석음이 씁쓸할 따름이다.
김남중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