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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아바타, 또 다시 낙동강 대망론의 진원지 되다

중앙일보

입력

어머니의 섬김정신이 이장→군수→장관→도지사로 성장한 내 인생의 주춧돌
“꿈은 이루어지기 위해 존재한다”며 차기 대권 도전 가능성에 대한 여운

월간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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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에서 용난다”는 말이 있다. 영어에도 “Rags to riches(가난뱅이가 부자로)”라는 표현이 있지만 어려운 환경에서 스스로 몸을 일으켜 잠룡의 반열에 오른 김두관(金斗官) 경남도지사의 경우는 ‘부’보다 ‘자리’에 비중을 둔 우리 속담 쪽이 더 어울린다.

강준식의 우리 시대 인물 탐구 >> 김두관

무엇이 그를 일으켜 세웠던 것일까? 4·27 재보선 다음날 경남도청 별관 집무실에서 만난 그의 첫인상은 2개의 단어로 요약되는데, 하나는 ‘뚝심’이고 다른 하나는 ‘겸손’이었다. 아주 큰 키도 아니고 그렇다고 뚱뚱한 것도 아닌데 듬직해 보이는 그의 몸무게를 물어보니 “예, 90kg입니다. 통뼈인지는 모르겠는데 좀 많이 나가지요” 하고 대답했다. 같은 곳에서 도지사 출마 3번, 국회의원 출마까지 5번 만에 성공한 그의 ‘뚝심’은 고교 때 씨름선수를 만들어주었다는 그의 통뼈에서 비롯된 것일까?

‘겸손’에 대해 그는 인터뷰 도중에 “우리 어머니가 국문도 잘 모르시지만 언덕은 내려다봐도 되는데 사람은 내려다보면 안 된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저는 그 말을 굉장히 의미 있게 새기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어머니의 평생 교훈이기도 하겠지만 그의 이력을 보면 ‘겸손’이야말로 인생을 살아가는 그의 전략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운동권이라 할지라도 보통은 서울로 올라와서 무엇을 시도하는 법인데, 그는 거꾸로 시골로 내려가서 자기 입지를 다지는 특이한 방법을 취했다. 이때 그의 논리는 “서울에는 내가 아니라도 운동할 사람이 많다. 사람이 없는 고향으로 가서 사회변혁을 위한 튼튼한 뿌리를 만들자”는 것이었다고 한다(김두관, <김두관의 지방자치 이야기>, 2003).

그는 시골로 내려가서 마을 이장부터 시작하는 ‘겸손’을 택했다. 거기서 현장 행정을 익힌 뒤 중간 중간의 공백은 있지만 남해군수→행정자치부 장관→청와대 정무특보→열린우리당 최고위원 등을 거치며 중앙정치를 경험했다. 그러다가 6·2 지방선거에서 경남도지사가 되면서 갑자기 전국적인 인물로 떠오른다.

묘하게도 그의 잠재력에 주목한 것은 한나라당 쪽이었다. 한 신문은 “지난해 9월 초 한나라당의 최고위 관계자가 언론사 정치부장들과 만찬을 함께했다. 이 관계자는 ‘차기 대선에서 가장 두려운 야당 후보가 누구냐’는 질문을 받자 서슴없이 ‘김두관 경남지사’라고 답변했다”는 기사를 실었다(<서울신문>, 2011년 1월 17일). 경남에서 53.5%를 득표한 그가 야권 단일후보로 나올 경우 기존의 호남표와 진보표에 영남표를 덧붙일 수 있어 노무현 전 대통령과 유사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아시아경제>, 2011년 3월 21일).

물론 손학규 민주당 대표가 4·27 재보선에 승리함으로써 조명의 앵글은 약간 빗겨났고, 낮은 인지도와 대중성의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으며, 또 단일화만 하면 승리할 수 있느냐는 문제도 변함없지만, 그럼에도 현상이 흔들릴 경우 그는 여전히 급부상할 수 있는 다크호스다. 우선 틀이 좋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끄덕인다. 변두리 이장에서 출발해 잠룡의 반열에 오른 그는 대체 어떤 인물일까?

스포츠 해설가의 꿈
1959년 경남 남해군 고현면 이어리에서 아버지 김봉환(金奉煥) 씨와 어머니 박봉순(朴奉順) 씨의 5남 1녀 중 다섯째로 태어난 김두관 지사는 도마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이후 어머니가 이웃집 허드렛일을 마다 않는 환경 속에서 “운동화를 신어보는 게 꿈”이었을 정도로 어렵게 자랐다. 남들 다 가는 수학여행은 가본 일이 없고, 보충수업비 같은 것도 제때 내본 일이 없다. 그래도 꿈은 있었다.
“중·고교 때는 스포츠 해설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오관용 씨라고 여자 배구 해설을 감칠맛 나게 하시던 분이 있었어요. 고두현·허구연 씨는 훨씬 뒤에 나왔지만 제가 운동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작은 공으로 하는 탁구 같은 것은 못 해도 배구·농구·축구는 잘하는 편이었고, 복싱도 굉장히 좋아했어요. 씨름도 좀 했고요.”

다방면이시네. 씨름 특기가 있었다지요?
“잡치기·배지기 이런 것인데 어쨌든 스포츠에 관심이 많아서 복싱 같은 경우는 고등학교 다닐 때 WBA·WBC의 세계 랭킹을 제가 다 외우고 있었습니다.”
선수들 랭킹을?
“예. 무하마드 알리, 조지 포먼, 조 프레이저 등 이런 선수들부터 굉장히 관심이 많았습니다. 홍수환 선수의 남아공 경기가 중계되기 일주일 전부터 새벽잠을 설칠 정도로 좋아했습니다. 유제두, 와지마 고이치(輪島功一), 염동균, 김현치 선수 등 그때 복싱이 굉장히 인기였기 때문에 그렇게 관심이 많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스포츠 해설가가 되는 게 어릴 때의 꿈이었는데, 크면서는 행정하고 정치 쪽으로 관심이 바뀌더라고요.”

‘주장’이라는 별명이 있었다던데?
“점심때나 방과 후 각 반끼리 자장면 내기 같은 축구를 많이 했는데 그런 걸 잘 조직해서 친구들이 ‘주장’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던 기억이 납니다.”
어릴 때부터 리더십이 있었다는 얘기인데 그는 골목대장 같은 것도 좀 하고 그랬느냐는 질문에 대장노릇은 아니지만 친구들을 굉장히 좋아했다고 대답했다.

공부는 어땠나요? 차인태 아나운서의 <장학퀴즈>에 출연해 2등을 했다면서요?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에 제 큰형이 독일 광부로 가게 되어 서울까지 배웅하러 갔다가 출국 날짜가 늦어지기에 큰형에게 ‘TV가 있는 영배라는 친구 집에 가서 보니까 <장학퀴즈>라는 인기 프로그램이 있던데 거기 한번 나가보고 싶다’고 했지요. 그래서 출연을 하게 됐는데 차석을 했어요. 남해에 돌아와 교장 선생님한테 말했더니 2주 뒤에 방영된 그 프로그램을 모두 봤어요. 그 후 김두관 학생이 남해종합고등학교에서 공부 제일 잘하는 학생으로 소문이 났는데 실제로는 한 학급 60명 중 한 15등, 14등 이렇게 했습니다.”

수학을 잘 못해서 전체 성적이 낮아졌다고 한다. 하지만 세계사나 지리, 국사는 압도적으로 잘했다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고교를 졸업한 뒤 진학은 하지 못했다. 졸업생 240명 가운데 4년제 대학에 합격한 학생은 그를 포함해 단 3명이었다. 그는 국민대 어문계열에 합격했으나 등록금 28만3000원이 없어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34년 전의 등록금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마음의 상처가 깊었다는 뜻이다. 살면서 가장 슬프고 억울했을 때가 바로 그때였다고 그는 토로했다. 가난은 그의 가슴에 분노를 심어주었을까? 하지만 그는 시골에 있었고 아직 어렸으며 의식화 교육 같은 것에 접할 기회도 없었다.

그 뒤로는?
“형님을 도와 농사를 지었지요.”
그는 억울함을 농사일에 쏟았다. 밭에다 마늘 심고 비닐멀칭을 하고, 병충해 방제를 하면서 작물을 키우고 모내기를 하고 이러기를 2년. 열심히 해도 생활은 어려웠고 전망은 보이지 않았다.

전문대와 종합대 시절
그에게는 형이 세 명 있었다. 고등학교를 나온 큰형은 서독 광부로 나갔고, 초등학교를 나온 둘째 형은 그와 함께 농사를 지었으며, 중학교를 나온 셋째 형은 기술을 배워 이라크 노동자로 나갔다.

어느 날 그와 농사를 짓던 둘째 형이 “니 군대 가기 전에 전문대라도 적을 두고 가는 게 안 낫겠나” 하고 권했다고 한다.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었다. 그는 결국 형들의 도움으로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하여 그가 진학한 곳은 영주경상전문대, 현재의 경북전문대 행정과였다.

“2년 농사짓다 보니까 예비고사 성적이 고등학교 졸업할 때보다 더 적게 나오더군요. 그래서 4년제 대학을 포기하고 쭉 보니 전문대학 하나가 경북 영주에 있는데, 행정과도 있고 세무회계과도 있더라고요. 평소 어머니 소원이 공무원이라 행정과에 들어가면 소원을 들어드릴 수 있겠다 싶어 지원했습니다. 거기서 열심히 공부했지만, 전문대라 여학생들이 미팅도 안 받아주고 좀 취급을 안 해주는 분위기여서 ‘아! 전문대만 나와 가지고는 사회활동에 한계가 있겠다’ 싶어 동아대 정외과 3학년에 편입했습니다.”

정치를 해보고 싶었나요, 그때?
“제가 역사나 이런 쪽에 관심이 많았고, 실제 전문대 1∼2학년 때의 학점보다 동아대 정외과 3∼4학년 때의 학점이 훨씬 더 좋습니다. 제 기억에 서양 외교사라든지 정치사상사라든지 이런 공부를 하니 머리에 잘 들어오더라고요.”
그 당시 영향을 받았던 책이나 인물이 있었나요?
“당시 흐름도 그랬지만 이영희 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8억인과의 대화>, 에드거 스노의 <중국의 붉은 별>, 염홍철 교수의 <제3세계와 종속이론> 같은 것을 들 수 있습니다.”
그 무렵에 종속이론이 소개되었던가요?
“대중적으론 안 되었을 것 같아요. 그때 전두환 대통령이 막 들어왔을 때죠. 그때 조금씩 봤던 것 같아요. 또 김영환의 <강철서신>도 보고.”

<강철서신>은 한참 뒤죠?
“아, 그럼 그건 군대 갔다 와서인가?”
군대 갔다 와서는 동생하고 같이 있었다지요?
“예. 제가 의정부에서 군대 생활을 했는데 제 밑의 동생(김두수)이 고대를 다녔습니다. 고대 운동권이었죠. 주말에 외박을 나오면 동생하고 만나 시국에 대한 비판도 하고 자료나 문건 같은 것도 얻고 했습니다. 거기다 군대에서도 경북대 운동권 출신의 정동남 병장이 제게 사회과학 서적도 꽤 주고 해서 관물대에 숨겨놓고 몰래 보곤 했지요. 제대 후에는 복학까지 6개월이 남아 있어서 낮에는 월간지 외판원을 했습니다.”

동생과 함께 중화동·쌍문동 옥탑방에서 자취생활을 하던 때였다. 아무 연고도 없는 사무실을 방문해 ‘잡상인’ 취급을 당하기도 했지만 잡지 판촉을 하면서 만났던 많은 현장 사람들과의 대화는 그의 청년시절을 살찌우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외판원이라 잡지를 팔아야 돈이 되었지만, 그는 신간이 나오면 먼저 사무실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내용부터 읽어본 뒤 팔러 나가곤 했다. 정치·경제·사회·역사와 세계적인 흐름을 다룬 기사들이 많이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지적 호기심이 많았다는 얘기다.

그때 바라본 우리 사회는 어떻던가요?
“제가 등록금이 없어 대학을 못 갔잖습니까? 사회과학 이론을 귀동냥하면서 이런 불평등한 사회를 변혁하는 데 나름대로 역할을 해봐야 되겠다, 혼자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어른들을 모시고 동지들을 규합해서 해봐야겠다고 생각해서 민통련에 가입하게 되었지요.”

감옥에서 귀향을 선택하다
월간지 외판원 시절 그가 가입했다는 ‘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은 ‘민주화운동과 민족통일운동은 하나’라는 기본인식 위에 노동·농민·청년·언론 등 사회 각 분야 25개 단체가 1985년 3월에 발족한 재야세력의 연합체였다. 문익환 목사, 계훈제 씨, 백기완 씨 등이 만든 단체였는데 그 산하의 서울민통련은 백기완 씨가 의장, 이재오 현 특임장관이 부의장을 했고, 사무처장은 지금 그의 정무특보가 돼 있는 홍순우 씨가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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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6월 1일, 김두관 경남도지사 후보가 창원대학교 앞에서 유세를 펼치고 있다.

누구라고요?
“홍순우 (경남도지사) 정무특보요. 당시는 민통련 사무처장이었습니다. 저는 막내급이라 민통련에서 문을 연 민족학교를 다녔고요.”
서울민통련 산하의 민족학교(교장 김병걸)는 1985년 5월 일반시민 30여 명을 대상으로 강좌를 열었는데, 김두관 지사는 그들 수강생 중의 한 사람이었다. 당시 경찰은 이들의 회동을 원천봉쇄하여 강의는 주로 부근 다방이나 산에 가서 이루어지곤 했다.

강사진은 김병걸·이우재·김태홍·이해찬·장영대·장기표 선생 등이었던 것으로 그는 기억했다. 민족학교 제1기를 수료한 뒤 그는 서울민통련 사회부장이 되었다. 직선제 개헌쟁취의 지역별 집회가 한창 진행 중이던 때였다.

“5·3인천사태가 일어나기 1주일 전인 4월 26일 청주집회가 열리기로 되어 있었는데, 민통련에서는 저를 책임자로 내려 보냈습니다. 선배를 모시고 갔지요. 결의대회를 마치고 선두에서 데모를 벌이는데 청주 지리를 잘 모르고 하니까 그만 경찰에 붙들렸습니다. 서울에서 원정 데모를 왔다면서 바로 그날 구속영장을 떨어뜨리더라고요. 그래서 집시법 위반으로 89일인가 100일 가까이 살았습니다.”

100일 동안 감옥에 있었다는 얘기인가요?
“예, 그 기간에 제가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게 되었죠. 앞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할 것인지 고민하다가 서울 쪽은 훌륭한 분들이 많으니까 저는 고향에 내려가서 변혁운동의 씨를 뿌리는 것이 중요하겠다, 가장 밑바닥인 풀뿌리 현장에 가서 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민족민주운동 진영의 뿌리를 튼튼히 하고 저변을 확대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요?
“그래서 면회 온 선배들한테 그 말을 하자 ‘사람은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도 보낸다는데 그래도 서울에서 운동을 하다가 국회의원 보좌관도 하고 정치도 한번 해봐야 될 것 아이가, 그럼 서울에 있어야지 촌에 돌아간다는 게 말이 되느냐’ 그러면서 민통련에 복귀해서 같이 일하자고 설득하더군요. 그래도 제가 고향에 가겠다니까 ‘좋다, 니 결심이 그렇다면 동의한다’ 그래서 제가 출옥 후 고향에 내려오게 된 겁니다.”

거꾸로 시골에 내려간 것은 좀 이례적인 발상인데, 말하자면 삶의 전략 같은 것이었나요?
“그렇게까지는 생각을 못해봤고, 서울에는 워낙 인재가 많고 뛰어난 사람도 많고, 제 고향은 제가 가도 할 역할들이 좀 있지 않나 싶어 그렇게 했습니다. 또 제가 누구보다 고향에 대한 애착이 강하고요.”

그에게 고향은 ‘어머니’였다. 서울 생활이 너무 삭막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옥탑방도, 감방도 그가 있어야 할 곳은 아니다. 그의 행동은 뒤에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지만 당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1년 6개월의 선고는 고향의 어머니와 그의 뒷바라지에 고생한 형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을 것이다. 그 점을 생각하면 송구스러운 마음을 억제할 수 없었다고 그는 자서전에 적었다(김두관, <남해군수 번지점프를 하다>, 2002).

낙향의 동기는 그것이 반이다. 가족들이 그를 잡아당겼던 것이다. 그리고 고향에 그의 마음을 잡아당기는 또 다른 자석이 있었다. 그것이 나머지 반이다.

귀향과 결혼
그 자석은 뒤에 그의 부인이 되는 채정자(蔡貞子) 씨였다. 결혼 날짜를 물어보았더니 1987년 1월 31일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가 낙향한 것은 3개월여의 수감생활이 끝난 1986년 8월이나 9월이었을 것이다. 계산해보니 고향에 돌아간 지 4∼5개월 만에 결혼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다면 두 사람의 관계는 언제 시작되었던 것일까?
“남해 후배니까요. 제가 고3 때고 제 처가 고1 때 정도에 얼굴은 한번 봤습니다.”
그의 말은 그랬다. 그러나 부인 채씨가 CBS 아나운서와 나눈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남편과는 어떻게 만나신 거예요?
“남편이 고3, 제가 고1때 만났습니다. 남편은 대학에 입학할 학비가 없어 부산에서 공무원 학원을 다니고 있었는데, 부산에 사는 제 이종사촌을 통해 만났습니다. 남편은 나를 중학교 때부터 봐왔다고 하니 약 10년을 알고 지낸 후 결혼한 셈이죠.”(이하의 인용은 채정자 씨가 손성경 아나운서에게 한 말, <노컷뉴스>, 2010년 6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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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6·2 지방선거 직후 인수위사무실에서 인터뷰 중인 김두관 경남도지사 당선자.

등록금이 없어 국민대 입학을 포기한 뒤 잠시 부산에서 공무원 학원 같은 곳에 다닌 일도 있었던 모양이다. 그때 이종사촌이 소개해줘서 만나게 되었다는 얘기다. 그러니 얼굴 한번 본 사이는 아니다. 실제론 10년이 된 사이였던 것이다.
“군대에서 휴가를 나와서도 친구들과 만나고 복귀 전날에나 전화해서 ‘저녁에 잠깐 보자’고 했습니다. 일반적인 통보도 모자라 나가보면 친구들과 우르르 몰려 있었습니다. 그게 데이트였죠. 연애할 때도 대놓고 솔직하게 얘기하더군요. 나랑 살면 힘든 삶을 살아야 하는데 괜찮겠나, 편하게 좋은 생활하려면 다른 사람과 결혼해야 한다고.”

무슨 독립운동 하던 사람의 연애 같다. 그러나 채정자 씨는 그런 순박함에 마음이 끌렸다고 한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함과 일에 대한 원칙, 의미 있는 삶을 살고자 하는 소신 때문에 결혼을 결심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 보이는 게 다인 순박한 사람이었습니다.”
“편지 한 통으로 프러포즈를 대신했고, 결혼 날짜도 자기 마음대로 정했습니다. 음력 1월 3일이 결혼기념일인데 설 연휴에 고향 분들 다 모여 있을 때 해서 번거롭게 하지 말자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채정자 씨가 언급한 음력 1월 3일은 김두관 지사가 기억하는 양력 1월 31일과 같은 날짜다. 결혼식은 간단히 치러졌다. “모아둔 돈이 없어 반지 하나와 옷 한 벌을 가지고 결혼했다”고 한다. 신혼살림은 시댁에서 시작했다. 그래서 시할머니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야 했다.
“고부간의 갈등도 있었지만 남편은 ‘언제든 참지 말고 이야기해라’라며 사소한 불만부터 어려움을 다 들어줬습니다. ‘그게 그렇게 화나는 일인지 몰랐다’고 다독여줬습니다. 어른들께도 ‘내 자식도 아닌데 이만큼 하면 잘하는 거’라 했고, 야단치거나 나무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시집살이에 시달리는 아내를 다독여주는 것도 일종의 포용력이고 고부간의 갈등을 조정하는 것도 일종의 지도력이다. 가정을 꾸리고 나자 그의 포용력과 지도력은 외부로 향하기 시작했다.
“사람을 워낙 좋아해서 집에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마땅한 공간이 없어 신혼방이 모임 공간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김치 한 통 거덜나는가 하면 야참 만들다가 밤을 새운 적도 있습니다.”
낮에는 농사짓고 밤에는 청년들을 집에 불러들여 만든 조직이 ‘남해농민회’였다.

노무현과의 첫 만남과 농민회
사무국장으로 일했다는 이 농민회야말로 그의 정치적 발판이 된 조직이다. 회원이 50명가량인 조직을 가지고 그가 어떻게 정치적 도약을 하게 되는지 궁금해졌다.
회원은 주로 청년들이었나요?
“20·30대 청년들이 주류였고, 그때 우리 나이가 어리니까 40·50대 어른들이 좀 해주면 좋겠다 싶어 그나마 좀 양심적인 농민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분들을 찾아가서 몇 분 모시고 그랬습니다.”
자료를 뒤적이다 보니 시골 농민회치고는 좀 특이한 일을 한 것이 발견되었다. 농대 교수나 농업 전문가를 불러 농업기술 강좌를 듣는 게 아니라 당시 청문회 스타였던 노무현 의원을 초청해서 강연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2번씩이나. 나는 그게 사실인지 물어보았다.
“예, 한 번은 농민회, 한 번은 사회단체인데 농민회에서 초청해도 사회단체 쪽에서 들으러 오고, 또 사회단체에서 초청해도 농민회 쪽에서 들으러 가곤 했지요. 전체 청중은 200명 정도 되었고요.”

와서 무슨 얘기를 하던가요?
“우리 정치와 사회가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인상은? 대통령 될 분 같던가요?
“이미 청문회에서 보여준 강인한 모습이 각인되어 있어 그랬는지 모르지만 대통령 될 분이다, 이런 생각보다는 굉장히 결기가 있고 정의롭고 ‘아! 정치를 변화시키는 데 나름대로 역할을 하겠다’ 이런 생각은 했습니다.”

남해 한구석의 농민회 사무국장이 14년 뒤에 대통령이 될 사람을 강사로 불렀다. 그러니 참 인연이 묘하다는 것이다. 2003년도에 와서 자신을 행자부 장관으로 발탁해줄 미래의 대통령을 그는 이 시점에 2번이나 만나고 있었던 것이다.

노무현 의원이 영향을 미쳤던 것은 아니다. 사실 그는 이보다 몇 달 앞서 13대 총선에 출마한 일이 있다. 정치적 의지는 일찍부터 나타나고 있었던 셈이다. 민중의당 후보였다.
민중당하곤 다른 거지요?
“다르지요. 민중당은 1992년도에 생긴 당이고, 민중의당은 백기완 대선본부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1988년도에 만든 당인데, 제가 조직한 남해농민회는 전농에 속해 있었고, 전농은 백기완 대선본부에 참가했기 때문에 저도 민중의당 후보로 출마한 것입니다. 당 대표는 지금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 부소장을 하는 정태윤 씨였고요.”
몇 표나 얻었는지?
“그때 민정당 박희태, 신민당 문부식, 공화당 황충기, 민중의당 김두관 이랬는데 제가 3위를 했습니다.(전체 유권자 8만 명 중에서) 2830표를 얻었지요.”

떨어지고 난 뒤에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선거 후 정당법에 의해 민중의당이 해산됐는데, 당을 재건하자는 논쟁이 붙었습니다. 저는 해소파였지요. 왜? 제가 얻은 표만 하더라도 유권자가 민중의당 정강정책에 동조해서 찍어준 표가 아니라 학교 동창, 이웃사촌, 사돈의 팔촌들이 제 안면을 보고 찍어준 표였거든요.”
현실의 벽을 크게 느꼈다는 얘기다. 29세의 나이에 이렇다 할 경력도, 명성도 없는 그가 표를 많이 얻는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그는 지역운동을 강화하고 정치적 기반을 넓혀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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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6월 5일, 민주당 노무현 대통령 후보가 김두관 경남도지사 후보와 마산어시장을 방문해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그래서 농민회를 더욱 대중적인 형태로 전환시키는 한편, 그해 겨울에는 고향 마을인 고현면 이어리 이장을 맡게 된다. 총선에 출마하여 이름을 알렸던 사실이 지역운동의 기반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장으로 있는 2년 동안 그는 ‘책사랑 나눔터’를 개설하고 풍물·등산·낚시·바둑·영화·문학 등 각종 취미반을 운영하여 지역인들과 접촉을 강화해나갔다. 이 과정에 참여한 연인원이 1000명을 넘었다고 한다. 외연 확대를 위해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사업은 1989년에 창간한 <남해신문>이었다.

군민주(郡民株) 형식의 <남해신문>
신문이란 규모가 크든 작든 만들기는 힘들고 돈이 되기는 어려운 사업이다. 그런 사업을 시골에서 시작한다는 것 자체가 이례적인데, 김두관 지사는 이 사업을 일으켜 성공시켰다. 지금도 발행되고 있는 <남해신문>의 태동 과정이 궁금해졌다.

<한겨레> 창간을 보고 흉내 냈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그 영향도 있었지만 당시 전국에 지역신문이 몇 개 있었는데 저희들이 벤치마킹한 것은 충남 <홍성신문>이었습니다. 홍성은 김좌진 장군부터 만해 한용운 선생 등을 배출한 고장으로 예전부터 YMCA 등 활발한 지역운동을 하며 지역신문을 펴내던 곳입니다. 그래서 <홍성신문>을 벤치마킹하고 <한겨레>의 국민주를 본떠 군민주(郡民株) 형식을 취했지요.”
당시 남해 인구는?
“6만3000명 정도였습니다.”

6만여 명을 상대로 신문사업을 한다는 것이 가능한가요?
“인구는 6만3000명이지만 주택 호수로는 2만3000이었거든요. 그래서 2만 부를 찍어 1만 부는 남해군에 돌리고, 1만 부는 남해 밖의 향우들에게 우송했습니다. 저희도 6형제 중 5형제가 밖에 나가 있듯이 남해군민으로서 밖에 나가 있는 인구가 35만 명쯤 됩니다. 남해는 육지와 달리 섬으로 딱 떨어져 있는 곳이라 고향에 대한 응집력이 엄청 강합니다. 이 점에 착안해서 밖에 나가 있는 향우들에게 신문을 보냈더니 모두 구독료를 잘 보내주시더라고요. 향우들의 애향심을 120% 활용한 거지요. 그래서 <남해신문>이 빨리 자리 잡은 겁니다. 열독률도 높았고요. 저는 새로운 향우들을 만나면 주소와 명함을 달라고 해서 전부 입력하고…. 정말 <남해신문>에 올인하는 동안 너무 힘들었습니다. 광고 따기도 힘들고.”

주간지였나요?
“예. 주간지인데 타블로이드 32면이었지요. 지역의 기득권 세력인 공무원과 토호·유지들의 비리나 잘못, 부정을 파헤쳐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신문이 되었습니다. 반대로 주민들은 신바람이 났고요.”
신문사를 처음 시작할 때 인원은 기자와 직원을 합해 5명이었다. 2년 뒤 7명으로 늘었고, 그가 남해군수에 당선되고 나서 신문사를 그만둘 때는 기자 8명, 사무관리국 직원 6명으로 모두 14명이 되어 있었다.
기사도 직접 쓰시고 그랬나요?
“저는 사설 정도를 쓰고 나머지는 편집위원들이 했죠.”
그러나 그런 ‘신선놀음’만 하고 있어도 되는 형편이 아니었다. 신문을 제작한 뒤 면 단위를 우송하고 나면 읍내는 전 직원이 200∼300부씩 직접 돌려야 했다.
“다른 직원들은 2시간이면 되는데 저는 4시간 걸립니다. 제가 책임자니까 지난 주 기사가 좀 왜곡되었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주민들이 여러 가지 정보를 많이 주니까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렇게 얻은 정보는 지면에 반영하기도 하고.”

처음 6개월간은 아예 월급도 없었다. 교통비 정도를 받다가 그와 직원들이 정상적인 월급을 타기 시작한 것은 신문이 자리를 잡은 1993년도부터였다. 뚝심이었다. 그간의 어려움에 대해 그의 부인은 “아이들은 크는데 벌어다 주는 돈은 없고 ‘빨갱이’ ‘진보’라며 사람들은 손가락질했습니다. 양품점, 식당 등 안 해본 일이 없었어요. 너무 힘들었습니다. 아이들과 산책을 하는데 문득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가, 놔버리고 싶다’는 극단적인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고 회고했다(<노컷뉴스>, 2010년 6월 17일).

하지만 어려운 가운데서도 신문을 제작하고 배포하는 과정을 통해 김두관 지사는 약 7년간 주민들과의 유대관계를 착실히 다져나갔다. 이 유대관계야말로 그의 확고한 정치적 기반이 돼줬다. 1995년 ‘개혁행정’ ‘자치행정’의 기치를 내걸고 남해군수에 출마했을 때 그가 믿은 것은 주민들과의 유대관계였다.

남해 풀뿌리 민주주의운동
상대는 30년 공직생활을 한 통영시장 출신의 민자당 후보였다. 그에 맞선 김두관 후보는 이장 출신. 누가 보더라도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이었다.

그러나 선거 결과는 놀라왔다. 광복 후 여당 아닌 사람이 당선된 적이 한 번도 없는, 노인 유권자가 대부분인 그곳에서 군민들은 무소속의 전국 최연소 군수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그것도 압도적 표 차이로.
“사정을 잘 모르는 어떤 사람들은 그런 내 당선을 두고 천운이 따랐고 관운이 좋아서 이루어진 기적이라고도 하지만, 기실 그 결과는 1986년부터 조직적으로 진행되었던 남해지역의 풀뿌리운동의 성과물이었다는 게 내 생각이다.”(<지방자치…>)

남해군수로 취임한 직후 그는 지난날 권위주의의 상징이던 군수 관사를 헐고 그곳에 민원인 전용 주차장과 느티나무 쉼터를 만들었다. 다음으로 군수실의 한쪽 벽을 투명한 유리로 바꾸었다. 모든 행정을 주민들과 소통하면서 투명하게 처리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그러자 지역신문에서는 “관치 허물고 민치 활짝’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혁신조치를 대서특필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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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6월 3일, 김두관 경남도지사 당선자가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봉하마을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박석묘를 찾았다. 김 당선자가 노 전 대통령의 비석을 어루만지며 당선 소식을 전하고 있다.

관사 대신 허름한 자택에서 출퇴근하셨다던데 허름한 자택이라는 게 뭘 말하는 건가요?
“저의 집이 1978년도인가에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한 230만원쯤 들여 지은 집인데 물도 새고 그럽니다.”
그 허름한 집의 대문마저 남해군수 시절에 아예 없애버렸다면서 “누구든지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기를 바랐습니다. 지역 유지는 안 도와줘도 잘살지만, 농사일에 먹고살기 힘든 사람들의 고민이 무엇인지 누군가는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도와야 합니다. 농사일 가기 전 새벽 4∼5시에 문을 두드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서민들에게는 공공기관이나 군청의 문턱이 높았던 거죠. 남편은 ‘오죽했으면 이 시간에 왔겠느냐’며 그들을 위하고 품위를 떠나서 낮은 자세로 섬겨왔습니다”라고 그의 부인 채정자 씨는 회고했다(<노컷뉴스>).

듣다 보니 ‘Serve to lead(지도자가 되려면 섬겨라)’라는 영국사관학교의 표어가 연상되네요.
“저는 330만 도민 어느 누구도 나보다 낮다는 생각을 안 해봤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국문도 잘 모르시지만 언덕은 내려다봐도 사람은 내려다보면 안 된다는 말씀을 하셨지요. 제가 누구를 무시하겠습니까?”
어머니로부터 섬김의 정신을 배웠던 셈이로군요.
“알게 모르게 배어 있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기본적으로는 그런 자세를 갖고 있는데 도민들 보시기에는 도지사가 되었다고 깝죽거린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요.”

취임 후 기자실 폐쇄 조치부터 하셨던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나요?
“욕 많이 봤죠, 그거 해서. 저도 지역신문 안 해봤습니까? 그런데 지방지 기자들이 군청하고 상당히 유착되어 있는 겁니다. 예를 들면 군청 공무원이 사료작물 지원비를 횡령해요. 그걸 <남해신문>은 보도하는데, 다른 신문 기자들은 알면서도 안 하는 겁니다. 군청 기자실에서 고스톱도 치고, 훌라도 치고, 군수나 부군수도 와서 한 번씩 와서 치고 가는데, 촌지가 오가고 보도지침이 하달되는 모습을 보고 내가 군수가 되면 저거부터 없애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1995년 당선이 되자 만날 고스톱이나 치는 주재기자실을 없애고 브리핑룸으로 바꾸겠다고 했더니 난리가 난 겁니다.”

이걸 왜 물어봤느냐 하면 나중에 노무현 대통령 말기의 기자실 폐쇄를 ‘이미 본(데자뷰)’ 느낌이 들어서 말이지요.
“그분이 해양수산부 장관 시절에 제가 남해의 바다목장 문제로 몇 번 만났습니다. 그때 브리핑을 듣고 나더니 김 군수는 어떻게 언론하고 싸워서 이겼습니까 하고 자세히 묻더라고요.”
그때 힌트를 얻은 건가요?
“모르겠습니다. 거기서 힌트를 얻으셨는지. 브리핑룸 말고도 그분은 나중에 스포츠마케팅하고 이런 것들에 대해 저를 굉장히 관심 있게 보셨습니다.”

남의 말을 경청하는 군수
기자실 폐쇄로 지역 언론과의 긴장관계가 형성된 가운데서도 그는 이장과 <남해신문>을 하면서 생각해두었던 일련의 행정 쇄신책들을 밀어붙였다.

그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공개적이고 투명한 민원처리를 위해 주민과 전문가로 구성된 배심원단이 관련자의 의견을 들은 뒤 해결책을 제시하는 ‘민원 공개법정’을 전국에서 처음으로 도입한 일이다. 이 법정을 통해 가령 마을버스의 운행을 어느 업체에 맡길 것인가, 누구에게 어장을 옮기는 우선권을 줄 것인가 하는 첨예한 민원들이 척척 해결됐다.

또 공사현장에 지역주민을 파견하는 ‘주민감독관제’를 시행했고, 민심파악을 위한 여론조사도 수시로 실시했다. 공무원 조직의 의식개혁을 위해 헌신성·전문성·청렴성·창의성·현장성을 ‘공무원 5대 덕목’으로 정하고 능력 위주의 발탁 인사로 조직 내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초기에 적잖이 반발했던 내부 구성원들도 차츰 그의 공정 인사에 수긍했다(<주간동아>, 2003 년 3월 13일).

행정개혁과 동시에 그는 공장유치가 제한적인 남해군을 어떻게 발전시킬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몰두했다. 그래서 얻은 결론은 깨끗한 남해, 볼 거리가 있는 남해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공장 유치가 어렵다면 역으로 환경보전을 통해 깨끗한 남해, 볼 거리가 있는 ‘관광 남해’를 만들어 지역발전을 도모하자는 생각이었다.

그 일환으로 추진한 것이 장묘문화의 혁신운동이었다. 그러자 “화장은 고인을 두 번 죽이는 처사”라거나 “군수가 불효자를 만들고 있다”는 비난이 난무했지만 그는 결국 불법묘지를 없앤 전국 최초의 자치지역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빛을 발한 것이 그의 설득력과 추진력이다.

‘관광 남해’를 만드는 일은 자연환경 보전을 위한 각종 작업을 추진하는 일로 이어졌다. 그런 노력을 인정한 환경부에서는 남해군을 1997년 ‘환경시범자치단체’로 지정했고, 1999년에는 ‘환경경영대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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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9월 9일, 김두관 행자부 장관이 전북대병원에서 주민들에게 집단폭행을 당한 김종규 부안군수를 문병하고 있다.

그 시절 정말 여러 가지를 하셨더군요. 음식물쓰레기 처리를 위한 지렁이 사육장, 에코파크, 수초골재식 지하수처리장, 하천생태복원 정비공사, 나비생태공원 등…. 이런 아이디어들은 책에서 얻은 건가요?
“관사를 헐고 투명행정을 시작한 뒤로 제가 굉장히 열려 있는 군수라는 소문이 났고, 그래서 전국에서 아이디어를 팔러 오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당시 군 예산은 2000억원도 안 되니 다 수용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지만 방금 언급하신 그런 아이디어들은 제가 수용했던 것들이지요.”

그게 다 전국에서 들어온 아이디어였군요?
“우리 직원들이 낸 아이디어도 한두 개는 있지요. 시장·군수 회의에 가면 선배들이 어떻게 그리 아이디어가 많은지 물어요. 그런데 사실은 다 산 겁니다. 저는 보고 들은 게 적고, 많은 전문가들이 좋은 제안을 해주시니 수용한 거지요.”

그럼 ‘남해잔디’ 개발도 그렇게 된 것이었나요?
“예. 여러 사람이 관계한 겁니다.”
그의 대답을 들으며 나는 속으로 생각을 좀 해보았다. 한국적 정치풍토에서 나를 따르라는 식의 야전사령관식 지도자는 흔히 볼 수 있다. 성격이 강한 것도 강한 것이지만 그 기저에는 결국 저 잘났다는 생각이 있다. 그래서 듣기보다 말하기를 좋아하는 이런 유형의 지도자는 교만→독재로 흐르기 쉽다.

이에 비해 남의 의견을 경청하려고 드는 한국인은 그렇게 많지 않다. 나아가 남의 좋은 의견을 수용하는 지도자는 더욱 드물다. 남의 의견을 경청하는 그의 출발점은 ‘겸손’이었을 것이다. ‘겸손’은 ‘경청’을 넘어 ‘수용’과 ‘조정력’의 영역으로 들어간다는 생각에 도달하자 나는 그의 ‘남해잔디’ 이야기가 더 듣고 싶어졌다.

남해잔디와 월드컵
본래 잔디는 한국에서 관상용이나 골프장 같은 곳에 쓰이던 귀족적인 풀이었다. 그래서 김두관 군수는 이 풀을 대중화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가령 학교 운동장에 잔디를 깔아 어린이들이 편하게 뛰어놀고 축구도 하게 할 수는 없을까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독일 분데스리가의 축구 중계를 보니까 축구장 밖에 눈이 쌓여 있는데 잔디는 파랗더라고요. 그래서 어떻게 된 거냐고 주변에 물어보니까 그곳엔 사계절 푸른 잔디가 있다는 겁니다.”

누가 그러던가요?
“당시 박동한이라고 제가 데려온 비서실장이 그런 얘기를 해서 인터넷에 들어가서 보니 정말 그렇더라고요. 그래서 공무원들을 독일과 일본에 잔디 연수를 보내 이걸 도입하도록 했는데 심어보니 겨울에는 강하고 여름에는 약해요. 시행착오를 거쳐 우리 특성에 맞는 남해잔디로 개량했습니다.”

그가 남해잔디 개발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관광 남해’ 만들기와 관련이 있었다.
“남해를 찾는 관광객은 1년에 300만 명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들은 대부분 하루 이틀도 머물지 않고 그저 스쳐 지나간다는 표현이 맞을 만큼 휙 둘러보고 가는 게 전부였다. 그러나 스포츠대회나 전지훈련팀을 유치하면 최소 1주일, 최대 50일은 머문다. 관광객 50명이 오는 것보다 스포츠팀 5명이 오는 것이 지역경제에 훨씬 더 효과적이다.”(<지방자치…>)

이 점에 착안하여 그는 서면 서상매립지의 버려진 땅 10만여 평에 남해잔디를 입힌 공설운동장을 만들고 거기서 1997년과 1998년 K리그 경기를 개최했다. 그리고 1999년에는 그곳에 야구장·콘도 등을 추가하여 스포츠파크를 조성하는 사업에 국비지원 300억원을 문광부로부터 타내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하여 조성된 스포츠파크에서 각종 스포츠 대회가 열리자 골목길에는 운동복 입은 선수들의 모습이 눈에 띄고 때로는 일본과 중국의 축구팀까지 찾아오기 시작했다. 김두관 군수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갔다.

2000년 6월, 그는 실무자들과 함께 한국월드컵조직위원회를 방문했다. 남해군에 선수팀의 캠프를 유치하는 일에 협조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용건을 들은 위원회 관계자는 “왜 그렇게 서두르느냐”는 핀잔 아닌 핀잔을 주었다.

이는 남해군이 그만큼 발 빠르게 움직였다는 얘기다. 더욱이 남해군은 그보다 한 달 전에 이미 홍보책자를 전 세계 축구협회에 발송한 상태였다. 그로부터 각고의 노력 끝에 남해군은 드디어 2001년 12월 2일 덴마크 월드컵팀의 훈련캠프를 유치하는 데 성공한다. 당시 월드컵 개최도시가 아닌 농촌 자치단체에서 외국팀의 훈련캠프를 유치한 곳은 남해군이 유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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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자부 장관 시절의 모습. 제14호 태풍 ‘매미’의 영향으로 물에 잠긴 마산 해운대 프라자를 찾아 구호작업을 하는 관계자를 격려하고 있다.

이 밖에도 그는 남해군이 관광지로 거듭날 수 있도록 당시로서는 생소한 번지점프를 남해대교에서 직접 행하기도 했고, 서독광부와 간호사들이 영주 귀국하여 지낼 수 있는 ‘독일 마을’을 조성하는 데도 조력했다. 일본 나가사키의 ‘화란 마을’인 ‘하우스텐보스’는 단순히 집 모양을 옮긴 것이지만, 남해군의 ‘독일 마을’은 독일에서 귀국한 교민 출신들이 현지에 살면서 독일문화를 보여주는 곳이다.

2기에 걸친 그의 남해군수 시절은 각 방면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2002년 6월 지방선거에서 경남도지사에 무소속으로 출마할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
“그런데 그해 4월 노무현 씨가 민주당 대선후보로 선출되면서 단체장 1명을 PK에서 당선시키겠다고 큰소리친 겁니다. 당선은커녕 후보 구하기조차 어려워지자 저를 압박한 거예요.”

그를 영입해야 한다고 노무현 후보에게 적극 건의한 이는 이번 4·27 재보선에서 국민참여당 후보로 김해 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이봉수 씨였다(이봉수, <밥 잘 먹어서 장가든 남자>, 2011년). 그가 연락책으로 오갔다.
“선거를 한 달 남겨놓고 민주당에 입당했는데 ‘호남당’의 꼬리표를 다니까 지지율이 22%에서 금세 19%, 다시 17%로 떨어지더라고요.”
그는 김혁규 한나라당 후보에게 패했다. 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인연은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인생의 터닝포인트, 행자부 장관
2003년 1월 어느 날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가 그에게 연락을 취해왔다. 그래서 그와 만나 식사를 하면서 3시간가량 대화를 나눴다. 주로 지방분권과 행정개혁에 대한 이야기였다.
“면담 뒤에 나는 대통령이 행정자치부를 내게 맡기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 가능성은 높게 보지 않았다…. 2월 25일부터 행자부 장관으로 내정되었다는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설마 했다. 그런데 정말로 행자부 장관에 임명된 것이다.”(김두관, <빗자루를 든 이장>, 2003)

고건 총리와 몇 분이 상당히 반대했는데도 노무현 대통령이 그를 균형발전과 지방분권의 적임자로 밀었다고 한다. 그의 인생에 터닝포인트를 가져온 이 전격 인사에 대해 그도 놀랐고 세인도 놀랐다. 시골 군수가 느닷없이 장관으로 ‘점프’하다니. 질투심이 생긴다. 세상 인심이란 그런 것이다.

이를 반영하듯 취임 열흘 만에 한 주요 일간지가 “김 장관은 남해군수로 있으면서 8개월간 <남해신문> 대표이사직을 겸직하여 지방공무원법을 위반했다”는 기사를 대서특필했다. <남해신문> 측에서 등기절차를 밟지 않은 단순 해태의무에 지나지 않은 사건이었지만 야당 대변인은 “사퇴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같은 공격은 아직 서곡에 지나지 않았다. 그해 8월 한총련 소속 대학생들이 포천에서 훈련하던 미군 사격훈련장에 진입, 불법적으로 기습시위를 하면서 성조기를 불태우고 장갑차를 점거하는 사태를 일으키자 한나라당은 이를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김두관 장관의 해임건의안을 제출했던 것이다.

그러자 1986년 민통련 시절에 김두관 장관의 동지였던 이재오 한나라당 의원은 “아무 권한도 없는 행자부 장관의 해임안을 내겠다는 것은 도끼로 닭을 잡자는 것”이라며 반대의사를 밝혔고, 박근혜·남경필 의원은 “시위대책에 관한 직접 책임은 경찰청장에게 있다”면서 신중론을 제기했다. 한편 김두관 장관과 동향인 박희태 의원은 해임안 철회를 한나라당 지도부에 설득했고, 김홍신 의원은 “아닌 죄를 어떻게 죄라 인정할 수 있겠느냐”며 해임안 표결 시 당론을 따르지 않고 반대표를 던졌다.

논란이 분분한 가운데 9월 3일 장관 해임안이 통과되었다. 여소야대의 상황에서 거대야당의 의지를 막을 수 있는 세력이 없었던 것이다. 이에 노무현 대통령은 “해임 요구는 부당한 횡포라고 생각한다”면서 김 장관의 해임 요구를 사실상 거부했다. 그러자 한나라당의 최병렬 대표는 “헌법을 수호할 책임이 있는 대통령이 헌법을 유린하는 것은 중차대한 문제”라고 지적했고, 홍사덕 원내총무는 “못난이의 오기”라면서 “이제는 노 대통령과 직접 싸우는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동아일보>, 2003년 9월 8일).

해임안 통과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중간평가라는 한나라당 주장까지 나오자 한 저명한 칼럼니스트는 이런 글을 실었다.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는 ‘노무현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김무성 의원은 한 술 더 떠서 ‘노무현이를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모두 공식석상에서 나온 말이다. ‘개구리론’ 야유도 한나라당에서 나왔다. 모욕 주기로도 부족해 취임 6개월에 중간평가를 하겠다는 것은 정치도의에 어긋난다.”(장명수, <한국일보>, 2003년 9월 8일)

인터넷에서도 해임안 통과를 비난하고 냉소하는 패러디가 나돌았다. “길 가던 소가 사람 받으면 농림부 장관 해임, 길 가던 화물차가 사람 받으면 건교부 장관 해임, 길 가던 경찰차가 사람 받으면 행자부 장관 해임, 길 가던 군 트럭이 사람 받으면 국방부 장관 해임이냐.”(<한겨레>, 2003년 9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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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지방선거 당시 김두관 경남도지사 후보가 창원 상남시장에서 손가락으로 7번을 보이며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우여곡절을 거쳐 그가 사퇴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러자 “노 대통령이 저를 부르더군요. ‘김 장관, 내가 해양수산부 장관을 얼마나 한 것 같아요?’라고 묻더라고요. 제가 ‘1년 남짓 하지 않았습니까?’라고 했더니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저도 8개월밖에 못 했어요’라고 하더라고요.(웃음) 저는 7개월에서 하루 빠지는 6개월 29일을 했거든요.”(<위클리경향>, 2010년 10월 9일)

그는 정확히 6개월 29일 만에 행자부 장관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야당이 진짜 흔들고 싶었던 것은 노무현 대통령이다. 김두관 장관의 해임은 그보다 몇 달 뒤에 단행되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의 예행연습이었다.

낙동강 대망론
탄핵의 역풍은 거셌다. 2004년 4월 총선에서 젊은 유권자들은 탄핵을 주도했던 75석의 민주당을 9석, 133석의 한나라당을 121석으로 축소시키는 한편, 47석의 미니 정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을 152석의 원내 제1당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지역주의의 벽은 높았다. 김두관 전 장관 또한 열린우리당 후보로 남해·하동에서 출마했으나 한나라당 중진 박희태 후보에게 패하고 말았다. 그런 그를 청와대 정무특보로 다시 발탁한 것은 노무현 대통령이었다.

정무특보는 무슨 일을 하는 자리인가요?
“정무특보는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보좌하고 민심전달의 가교 역할을 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현장의 소리를 충실히 전달하려고 전국을 도는 민심탐방에 나섰는데, 당시 참여정부와 여당에 대한 실망의 소리와 함께 참여정부의 국정운영 패러다임에 관심을 갖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민심투어를 하면서 많은 것을 얻고 깨우쳤습니다.”

2007년 민생탐방 전국투어를 하셨는데, 이것은 손학규 전 경기지사의 100일 민생탐방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었나요? 아니면 독자적인 것이었나요?
“저는 민생탐방을 모두 3번 했습니다. 정무특보였던 2005년에 처음 했고, 2006년 경남도지사에 낙선한 후 다시 했습니다. 그리고 2007년 대선후보 경선 출마를 하기 전에 ‘희망대장정’이라는 이름으로 100일 가까이 전국 각지를 돌면서 국민의 목소리를 들었지요.”
누구를 흉내 낸 것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그가 ‘희망대장정’을 떠나기 직전 청와대 주변에선 묘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논란에 불을 붙인 건 노무현 대통령과 그의 최측근인 안희정 씨다. 노 대통령은 통합신당을 ‘지역주의 회귀’로 규정했다. 이어 안씨는 언론 인터뷰에서 여당 내 유력주자가 없다는 지적에 대해 ‘한강 전선이 아니라 낙동강 전선에서 용이 나온다’며 ‘영남후보론’에 힘을 실었다.”(<문화일보>, 2007년 1월 19일)

“안희정의 화두 ‘낙동강 용’ 발언대로면 이 일대는 경북 상주, 칠곡, 왜관을 이른다. 안씨가 특히 ‘눈여겨보는 사람이 있나’라는 질문에 대해 ‘역사의 해안가에서 지금 날개 달고 날 채비하는 사람이 많다. 바람이 없기 때문에 뜨지 못하는 것’이라며 ‘이 갈등과 고난을 반드시 지지자들, 국회의원 중심으로 보면 낡은 정치’임을 강조한 부분은 눈여겨볼 만하다… 1년 앞으로 다가온 대선을 앞두고 이 얼굴 없는 노의 스탭이 주목한 ‘역사의 해안가에서 날개 달고 채비하는 사람’은 과연 누구를 겨냥한 것일까?”(<시사뉴스>, 2006년 12월 20일)

‘낙동강 대망론’은 당시 정치권을 뒤흔들었다. 통합신당파는 “이는 10년 전 김윤환 의원이 내놓았던 ‘영남후보론’의 후속편인데 이게 바로 지역주의가 아니고 무엇이냐”고 반발했다. 논란이 커지자 기자들은 김두관 전 장관에게 그 발언의 배경을 직접 물었다.

안희정 씨의 ‘낙동강 용’ 발언은 김 전 장관을 염두에 둔 노 대통령의 의중을 드러낸 것이라는 얘기가 있는데?
“우스갯소리다. 동지들이 그렇게 얘기를 해서 안희정 씨의 발언에 대한 보도를 관심 있게 보았는데 ‘위기 속에서 용이 나온다’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전쟁을 빗대서 한강전선에서 밀렸지만 낙동강 전선 사수를 통해 반전을 모색했던 것을 표현한 것으로 본다.”(<뉴스메이커>, 2007년 1월 18일)

(낙동강 대망론은 부인했지만) 2007년에는 실제 대통령 후보에 출마하려는 움직임도 보였는데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너무 빨랐던 것 아닌가요?
“이장 출신의 최초 대통령이 돼서 대한민국을 확 바꾸고 싶었습니다. 제3기 민주개혁정부를 만들어가야겠다는 사명감도 있었고요. 당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샐러리맨의 성공신화라면 저는 이장·군수의 성공신화로, 그리고 상대가 기득권층 대표라면 저는 서민층 대표라는 전략도 있었습니다.”

김두관 지사는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꿈은 이루어지기 위해 존재한다”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차기 대권에 대한 여운을 남겼다.

5전 6기 끝에 일군 경남지사 당선
2007년 대선은 열린우리당에서 간판을 새로 단 대통합민주신당의 참패로 끝났다. 선거 후 노무현 대통령의 최측근인 안희정 씨는 “민주개혁세력이라 불렸던 우리 세력이 우리 대에 이르러 사실상 사분오열, 지리멸렬의 결말을 보게 됐다”면서 “친노라고 표현돼온 우리는 폐족”이라고 참담한 심경을 토로했다(<노컷뉴스>, 2007년 12월 26일).

폐족(廢族)이란 조상이 죄를 지어 벼슬을 할 수 없게 된 자손을 가리키는 말로 세칭 ‘노무현의 자식’이라 불리던 정치인들 가운데는 ‘왼팔(안희정)’ ‘오른팔(이광재)’ ‘경호실장(유시민)’ ‘리틀 노무현(김두관)’ 등이 이 카테고리에 포함되어 있었다. 폐족의 일원인 김두관 전 장관은 심기일전하여 2008년 남해·하동에서 다시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한나라당 여상규 후보에게 패하고 말았다.
1988년 국회의원, 2002년 도지사, 2004년 국회의원, 2006년 도지사, 2008년 국회의원 등 그는 경남에서만 국회의원 3번, 도지사 2번 도합 5번의 고배를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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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5월 20일, 김두관 행자부 장관과 강금실 법무부 장관이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앞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렇게 떨어지면서도 같은 지역에 계속 도전하는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인지?
“우직함이지요. 보통 그 정도 떨어지면 지역구를 옮기는데 저는 강고한 지역패권주의를 꼭 뚫어보고 싶었습니다. 한국 정치의 가장 큰 장애요인이 지역주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009년 11월 그는 같은 지역에서 다시 경남도지사에 출마할 생각을 굳혔다. ‘사생즉’의 각오였다. 이번에는 어쩐지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일이 되느라고 그랬는지 한나라당에서는 이달곤·이방호 예비후보가 공천을 앞두고 각각 “MB복심은 자기에게 있다”면서 힘겨루기를 하여 유권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이에 반해 야권은 김두관 전 장관을 단일후보를 만들기로 합의했다.

그런 분위기가 조성된 배경 같은 것이 있었나요?
“경남에서는 야권이 연대하지 않으면 한나라당 하고 아예 싸움 자체가 되지 않는 곳이죠. 거기다 당시 민주당 국민참여당 진보신당 시민사회 등에는 강력한 후보가 없었고, 민노당엔 강병기 후보가 있었지만 당선을 위해 나름대로 경쟁력 있는 후보로 간주되던 저에게 양보를 했습니다.”

여론조사에서 야권 단일후보가 여당 후보를 이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힘을 얻은 김두관 후보는 ‘노인 틀니’ ‘간병인 없는 병원’ ‘버스환승체계 구축’ ‘일자리 5만 개’ ‘초등학교 무상급식’ ‘4대강 사업 반대’ 등 실생활적인 공약을 걸고 도민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에 반해 하버드 대학 박사 출신의 이달곤 후보는 경제위기 극복, G20 정상회의 같은 거대담론을 앞세웠는데, 주민들의 반응은 “그 양반이 나한테 뭘 해줄 수 있는데?”라는 것이었다고 한다(<동아일보>, 2010년 7월 8일).

남편(김두관) 때문에 선거를 많이 치러본 채정자 씨는 “전에는 악수를 해도, 인사를 해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변화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 이제는 바뀌어야지’ ‘꼭 뽑아주겠다’며 손을 잡아주시는 시민들이 많아서 뭉클했습니다” 하고 당시의 분위기를 전했다(<노컷뉴스>, 2010년 6월 17일).

결과는 남편의 승리였다. 개인적으로는 5전6기였고, 정당사적으로는 60년 만의 비(非)한나라당 승리인 셈이었다. 다음날 오전 김두관 당선자를 따라 김해 박석 묘역을 찾은 채정자 씨는 연신 눈물을 흘렸고, 함께 간 지지자들도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노무현 대통령님, 해냈습니다”라고 외쳐 주위가 숙연해지기도 했다.

참배를 끝낸 김두관 당선자는 “노무현 대통령이 8번 찍고 제가 2번 찍어 지역주의 나무를 쓰러뜨릴 수 있었던 것”이라며 감개무량한 듯이 말했다.

행정의 연속성에 눈뜨다
한때 ‘폐족’ 신세였던 안희정 충남지사, 이광재 전 강원지사와 함께 ‘리틀 노무현 김두관’은 6·2 지방선거를 통해 화려하게 부활했다. 경남 도백(道伯)으로.

당선 원인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실 ‘김두관 당선의 1등 공신은 MB’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지역주민들 사이에는 ‘우리가 김두관한테 그동안 참 야박하게 굴었는데 그래도 도망 안 가고 있는 걸 보면 저 속에 뭐가 있는 거 아이가’ 하는 생각이 많았다. 국회의원·도지사 5번 떨어지는 사이에 인지도도 높아졌다.”(<한겨레>, 2010년 6월 14일)

실제 그가 치른 3번의 도지사 선거를 살펴보면 16.9%(2002년)→25.5%(2006년)→53.5%(2010년)로 선거를 치를 때마다 득표율이 높아졌음을 알 수 있다.

‘무소속’도 한몫했다고 그는 말한다. 출마할 때 의논을 해봤더니 “그냥 무소속하면서 연대해라”고 지역 어른들이 말했다면서 자신을 찍어준 한나라당 지지자들 입장에서는 ‘민주당 김두관’ ‘참여당 김두관’이 좀 부담스러웠을 것이라고도 했다(<한겨레>, 2010년 6월 14일).

그러나 이 대목, 곧 ‘무소속’으로 당선된 부분은 감흥도를 떨어뜨린다. 현대 민주주의체제에서 사회갈등을 공적 영역으로 전달하는 것이 정치의 기능이라면, 이 기능을 담당하는 핵심조직은 정당이다. 그런데 당선을 위해 이 루트를 피해야 했다면 그것은 ‘지역주의’에 대한 정면 돌파였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노풍(盧風)’의 영향은 없었나?
“돌아가시고 나니까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참 야박하게 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 ‘경남 김해 출신의 노무현 대통령이 호남이 주도권을 갖는 정당의 도움으로 대통령이 됐는데 우리가 안 도와줘서 극적으로 죽음을 맞이했다’고 생각들 하시는 것 같다. 선거기간이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주기였다. 노풍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대놓고 노풍을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고성국, <프레시안>, 2010년 12월 30일)
‘리틀 노무현’ 소리를 들었던 그는 참여정부의 지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주주, 안희정·이광재 씨가 2대 주주라면 자신은 최대주주한테 2% 정도의 주식을 얻은 소액주주에 지나지 않는다고 몸을 낮추었다(<한국경제>, 2011년 4월 3일).

막상 도백이 되어보니 어떤 느낌인가요?
“남해군수는 풀뿌리자치를 하는 것이고, 행정자치부 장관은 중앙부처의 조율을 통해 지방정부를 지원하고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죠. 도지사가 다른 것은 자기 완결성을 갖는다는 점입니다. 국방 외교 사법만 빼고 스스로 기획하고 집행하고 마무리하는 것이니까요 도민들에게 무한책임을 느낍니다.”

기초자치단체장을 해봤기 때문에 시장·군수를 대하는 것도 좀 달랐을 것 같은데?
“지금은 시·군과 도의 관계가 수직적 상하관계라기보다 수평적 협력관계로 패러다임이 바뀐 상황이거든요. 사실 주민 입장에서는 도정이나 국정보다는 시·군정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런 시대가 됐어요. 저는 시장·군수가 내 밑에 있다는 생각을 기본적으로 잘 안 하고 있습니다. 실제 그렇지도 않고요.”(<위클리경향>, 2010년 10월 9일)

중앙정부와의 관계에 대해서 그는 충돌할 부분도 있지만 긴밀히 협조할 일이 많기 때문에 예의를 갖추는 것이 옳고, 그런 가운데 싸울 일이 있으면 원칙과 소신을 갖고 싸우겠다고 말했다.

공무원에 대한 시각은?
“공무원은 행정개혁 주체이자 대상이다. 공무원을 혁신의 동력으로 써야 한다. 확정된 정책을 실행하는 면에서는 공무원만 한 조직이 없다.”(<서울신문>, 2010년 6월 8일)
전임자의 공약이나 정책에 대해서는?
“우리의 행정 문화는 전임자의 공약이나 정책을 무조건 자르려는 경향이 있다. 행정은 연속성을 갖고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전임자의 것이라도 마무리가 필요한 공약이나 정책은 마무리를 잘해야 한다. 되도록이면 잘 마무리해드리고 싶다.”(<서울신문>, 2010년 6월 8일)
그러면서 그는 김영삼 대통령 때 구상하고 김대중 대통령을 지나 노무현 대통령 때 시작됐고 이명박 대통령 때 와서 준공된 거가대교의 예를 들면서 행정의 연속성을 강조하기도 했다(고성국, <프레시안>, 2010년 12월 30일). 중앙과 지방의 행정을 두루 경험한 그의 시각은 비교적 균형 잡혀 있다는 느낌을 준다.

포용과 통합의 리더십 추구
정치는 통합을 지향한다. 편 가르기나 뺄셈정치는 지양해야 한다. 이 점에서 포용과 협력과 조화는 지도력의 중요한 미덕이다. 6·2 지방선거 때 야권단일화에 나섰던 시민단체·민주당·민노당·참여당과 함께 민주도정협의회를 구성했는데 그것이 지금도 잘 운영되고 있는지 물어보았다.
“지금까지 여섯 차례밖에 회의를 못 했습니다만 도민과의 소통을 확대하고 도정의 주요 현안에 대해 조언을 해주는 등 그 나름대로 의미 있게 운영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도의원 59명 중 38명, 경남 국회의원 17명 중 14명을 확보하고 있는 한나라당에서는 이 야권연대가 “도의회의 권능을 뛰어넘는 새로운 위원회”라면서 조례에도 없는 불법단체로 간주하기도 했다. 그러나 야권에서는 “한나라당 독점구도에 파열구를 낼 기구”라면서 호평하기도 했다.

협의체를 만든 것은 경남이 유일한 것 같은데?
“강원도에서는 특보를 민주노동당 출신으로 했는데 정책연대는 경남이 유일하다. 도의회도 야4당이 골고루 들어가 30% 정도 점유하고 있다. 한나라당이 90%를 점유하던 때와는 분위기가 다르다. 민주도정협의회가 도지사 정책자문 기구 역할을 하고 있는데 한나라당은 이것을 지방 공동정부의 낮은 단계라고 보고 있는 것 같다. 민주도정협의회를 중심으로 야권이 뭉쳐서 한나라당에 위협을 줄 것이라고 정치적으로 해석하면서 갈등이 빚어지고 있는데 내년에도 만만치 않을 것 같다. 그러나 그 정도 갈등은 감안하고 있다.”(고성국, <프레시안>, 2010년 12월 30일)

6·2 지방선거에서 그와 후보경선을 했던 민노당 강병기 후보를 정무부지사로 기용한 것은 당시 쇼킹한 인사로 받아들여졌다. 그 밖에도 김두관 지사가 취임 직후 단행한 통합적 인사로는 전수식 경남신용보증재단 이사장, 공민배 남해대학 총장, 이은진 경남발전연구원장이 있다. 반드시 그 자신의 정치노선과 일치하는 것만은 아니었으나 그들의 전문성을 보고 발탁한 실용인사였다는 평가다(<경남도민일보>, 2010년 6월 30일).

그러나 ‘김두관 야권연합’의 핵심은 역시 강병기 정무부지사의 기용과 민주도정협의회의 가동이다.
그의 통합적 지도력에 대해 이병하 민노당 경남도당 위원장은 그가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한다”고 말했고, 안승욱 경남대 교수는 “경남도청 밖에 있으나 안에 있으나 합치한다. 밖에 있을 때는 과한 주장을 하지 않았고 안에서는 실천하고 있다”고 평했으며, 이경희 경남진보연합 공동대표는 “야권연합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개혁적으로 도정을 펼치고 있다”고 평가했다(<오마이뉴스>, 2011년 1월 31일).

4대강 낙동강사업 중단을 위해 경남지역의 야권이 똘똘 뭉쳤던 사례는 김두관 지사의 지도력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그가 ‘부산·울산·경남을 통합하는 동남권특별자치도’의 제안을 내놓았을 때 부산시와 울산시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지만 지역 정치권과 시민단체들은 환영의 뜻을 표했다.

부산경제살리기시민연대는 “이미 제주도가 유사한 체제를 가동하고 있는 만큼 부산·울산·경남이라고 못 할 바는 없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부산·울산·경남 특별자치도’ 검토기구 구성을 제안했다.

한편 한나라당 김세연 의원(부산 금정구)도 김두관 지사의 제안에 대한 성명서를 내고 “명칭은 추후 재논의될 필요가 있고, 진정성 또한 면밀히 검토돼야 하지만 기본적인 취지와 방향에 대해서는 동의하고 환영한다”고 밝혔다(<경향신문>, 2011년 3월 10일).

김두관 지사의 통합적 지도력이 나타난 사례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한 기고문에서 “큰 뜻에 동의한다면 작은 차이는 남겨두고 손을 마주잡는 것이 우리의 일”이라고 역설했다(<프레시안>, 2011년 3월 21일). 통합을 지적한 말이다.

드라마 <대물>의 고현정 모델?
지난해 말 SBS에서 고현정 주연의 <대물>이라는 드라마가 방영됐다.
그 드라마의 여주인공이 서혜림인데 처음에는 박근혜 의원을 모델로 한 것이 아니냐고 하다가 중간에는 노무현 대통령, 나중에는 김두관 지사가 모델이라는 설이 나돌았지요?
“이야기만 들었지 저는 그 드라마를 못 봤습니다, 바빠서. 그런데 경남도 내의 한 신문에 서혜림 스토리와 저를 비교하는 기사가 났어요. 제가 남해 출신 도지사인데, 극중 서혜림이가 무소속 출신 야권 단일후보로 출마해서 남해도지사라는 직함을 갖게 됩니다. 거기다 환경을 중시하는 간척지 문제를 가지고 싸우잖아요.”
드라마에서 그녀는 나중에 대통령이 되었다.

앞으로 ‘남자 서혜림’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으신지?
“<대물>의 서혜림처럼 좋은 평가를 받는 인물로 봐주신 점에 대해서는 제가 오히려 고맙고 과분하지요.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어요. 대중성·인지도의 면도 그렇고, 리틀 노무현이라는 별명을 듣지만 노사모 같은 마니아 층도 없고.
“맞습니다. 제가 활동한 지역이 주로 경남이기 때문에 아직 대중적 인지도는 부족하고, 또 노무현 대통령처럼 적극적인 지지층은 부족하다고 자평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바닥에서 성장하고 생활해서 그런지 시민이나 도민들하고는 소통이 잘되고 유대감도 강한 편이고, 유연해서 좀 열려 있다는 이야기는 듣습니다.”

떨어질 줄 알면서도 같은 곳에서 출마한 것이 노무현 전 대통령은 3번, 김두관 지사는 5번이다. 그런데 전자에게는 국민적 감동과 ‘노사모’라는 마니아 층이 생겼는데, 후자에게는 왜 그런 현상이 생기지 않았을까?

그 답은 김두관 지사의 행위가 처음이 아니었다는 점에 있다. 두 번째는 신선감이 떨어진다. 게다가 지역구도 타파가 시대정신이 아닌 시대에 시도되었다. 그 곡은 지나간 유행가다. 남이 히트한 곡이다.

그러니 확 어필하는 무얼 하나 내놓지 그러세요? 김 지사에게도 어필할 수 있는 좌우명이 하나 있으신 것 같던데?
“저거 말인가요?”
그가 눈길로 가리키는 입구 쪽의 벽에 ‘불환빈(不患貧) 환불균(患不均)’이라 쓰인 액자가 걸려 있었다.
“저런 것도 feel이더라고요. 고등학교 때 <샘터>라는 잡지에서 봤는데, 저 말은 <논어>에 나오지만 육상산(陸象山)이란 송나라 학자가 매우 좋아하던 글이라는 식으로 소개했더라고요. ‘백성은 가난한 것에 노하기보다는 불공정한 것에 화낸다’ 이런 뜻인데요.”
핀트가 잘 맞지 않는다. 기대한 것은 글자의 뜻이 아니다. 기승전결의 ‘전(轉)’이다. 다시 입질을 해본다.

여야 양쪽에서 복지론을 내놓았는데 이 화두가 시대정신을 정확히 짚은 것이라고 보시는지?
“지금 사회안전망이랄까, 국민통합을 위해서도 복지문제를 좀 더 내용 있게 추진하지 않으면 안 될 그런 상황에 놓여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복지문제뿐이겠습니까? 평화라든지 정의문제라든지 이런 것도 시대정신이 될 수는 있겠죠.”
물어보려는 의도와 그의 답 사이에 갭이 있다. 기승전결의 ‘전’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시대정신도, 복지론도, 그의 좌우명도 다 2012년 대선을 염두에 두고 꺼낸 말들이다. 선거가 큰 틀에서 좌우의 선택이라고 볼 때, 2002년 대선, 2004년 총선은 좌파동원의 최대치였고, 2007년 대선, 2008년 총선은 우파동원의 최대치였다. 그에 대한 반작용이 광우병 시위→6·2 지방선거→4·27 재보선에서 나타나기는 했지만, 나의 관심사는 그 기세가 2012년의 총선·대선으로까지 이어질 것인가 하는 점이다.

만일 그렇다면 좌파의 최대치가 동원될 수 있는 계기와 동력은 무엇일까 하는 차원에서 김두관 지사에게 화두나 시대정신 같은 것을 계속 입질해본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의 구도에서 박근혜 전 대표를 확 따라잡는 야권 주자는 아직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겸손함, 뚝심, 포용력, 통합적 지도력, 행정 경험, 소통력 등에서 김두관 지사는 남다른 자질을 지니고 있고, 영남표를 잠식할 수 있는 확장성도 지니고 있어 제2의 ‘낙동강 대망론’을 언급한 사람도 있으나 많지는 않다. 인지도와 대중성 면에서 미흡하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2%의 아쉬움 같은 것이 느껴졌다. 사람을 확 끌어당기는 독창적인 그 무엇이, 그런 것이 있어야 날개를 다는데. 한 여론조사의 결과처럼 그는 아직은 안희정 충남지사와 함께 10년 후의 리더군에 속하는지도 모르겠다(<프레시안>, 2010년 9월 13일).

그러나 야권에서 마땅한 후보가 대두되지 않을 경우 그가 대안으로 급부상할 가능성은 있다. 다음 대선을 겨냥하여 진보진영에서는 ‘빅텐트론’도 나오고 ‘백만 민란론’도 등장하고 ‘가설정당’ 또는 ‘우산정당’론도 제기되는 등 야권연대가 모색되고 있는데, 그 자신은 대선을 어떻게 전망하고 있을까?
“2007년처럼 530만 표(22.6%)의 싸움으로 가진 않을 것이다. 야권 단일후보가 결정되면 40% 지지율이 될 거고, 여권 후보도 비슷한 지지율이 될 거다. 나머지 20%를 놓고 누가 11%를 차지하느냐의 싸움이 되지 않을까?”(<서울신문>, 2011년 1월 17일)

남은 20%에서 승자가 11%를 취하면 산술적으로 패자는 9%다. 2%의 차다. 1997년은 1.6%(39만 표), 2002년은 2.3%(57만 표)의 싸움이었다. 그의 말대로 이번에는 11%의 싸움이 될 것인가?

■ 강준식
강준식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문리대와 미국 일리노이대·FTU 등에서 문학·정치학·경제학 등을 공부했다. 196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유신 말기와 5공 중반까지 <시카고·뉴욕동아일보><뉴욕조선일보> 등에서 편집국장·논설주간 등을 지냈으며, 한때는 정치권과 공기업 등에 몸담기도 했다.
저서로는 <서양바람 동양바람><다시 읽는 하멜표류기><김우중의 대도전><혈농어수(血濃於水)> 등이 있으며, 평역서로는 <쓸모없는 것이 쓸모있다-장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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