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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렬 외세배척론자 이토, 영국 유학 뒤 개화파로 변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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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일본은 모두 개항 과정에서 격렬한 진통을 겪었다. 일본은 많은 진통 속에서도 개화의 방향성은 잃지 않았고 이토 히로부미 같은 개화파 인물들을 길러냈다. 조선은 거꾸로 대부분의 개화파 인재가 살해되거나 망명해야 했다. 이토는 ‘개화 일본’의 역동성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망국의 몇 가지 풍경 ⑦이토와 일본 개화

하세가와 사령관과 통감부로 가는 통감 이토 히로부미. 이토는 1873년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 등과 함께 ‘국력 양성을 우선해야 한다’며 조선 정벌론에 반대해 이를 관철시켰다. [사진가 권태균 제공]

조선에 1870년대 초에 개화파를 양성하던 박규수의 사랑방이 있었다면, 일본에는 요시다 쇼인(吉田松陰·1830~1859)의 송하촌숙(松下村塾:서당)이 있었다.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급진개화파 김옥균과 온건개화파 김홍집이 나왔다면, 요시다 쇼인의 송하촌숙에서는 개항 후 일본의 문치파를 대표하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와 무단파(武斷派)를 대표하는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가 나왔다.

박규수의 사랑방을 일종의 개화파 정치학교로 만든 인물은 중인 역관(譯官) 오경석(吳慶錫·1831~1879)이었다. 미국 페리 제독의 흑선(黑船)이 일본에 큰 충격을 주었던 1853년(철종 4년), 오경석도 베이징에 11개월 동안 머무르면서 중국의 실상을 목도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오경석은 철종 11년(1860) 8월 영·불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하고 원명원(圓明園)을 불태운 충격적인 현장까지 목격한 후 능동적으로 문호를 열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반면 조슈(長州: 지금의 야마구치) 하급 번사의 아들로 태어난 요시다는 일왕을 받들고 서양세력을 물리쳐야 한다는 존왕양이(尊王攘夷) 사상을 굳혔다. 존왕은 반막부(反幕府)를 뜻했고, 양이도 개항을 결단한 막부에 대한 비판이었다.

막부는 조슈번에 명을 내려 요시다 쇼인을 에도로 보내도록 해 사형시켰다. 이것이 안세이 대옥(安政大獄)으로서 미·일 수호통상조약(1858)과 도쿠가와 이에모치(<5FB3>川家茂)의 쇼군(將軍) 승계를 반대한 세력에 대한 탄압이었는데 14명이 사형을 당하거나 옥사했다. 요시다는 사형당했지만 이토를 비롯한 그의 사숙(私塾) 출신들이 일본 근대화를 주도하게 된다. 요시다는 번(藩)과 신분질서를 근간으로 하는 일본 봉건체제를 신분에 상관없이 참가할 수 있는 통일적인 정치체제로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전에는 허수아비였던 천황이 중요해져서 존왕(尊王)사상이 싹텄다.

이토 등은 스승의 가르침대로 존왕양이 운동에 나서는데, 존왕사상은 계속 유지하지만 외세를 배격하자는 양이는 버리게 된다. 스승의 사상을 절반만 계승한 것이다. 14세 때 요시다 쇼인 문하로 들어간 이토는 동문들과 막부 타도와 양이 운동에 나서면서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이토가 정치무대에 첫 모습을 나타낸 것은 극렬 양이론자로서였다. 1862년 이토는 천황가와 막부의 융합론인 공무합체론(公武合<4F53>論)을 주장하는 나가이 우다(長井雅樂)의 암살을 모의하고, 시나가와 고텐야마(御殿山)의 영국 공사관에 불을 질렀으며, 야마오 요조(山尾庸三)와 함께 외국인을 우대하는 식전(式典)을 연구하던 하나와 다다토미(<5859>次<90CE>)를 암살했다.

그러다가 이듬해인 1863년(고종 즉위년)에는 느닷없이 영국을 배우겠다면서 이노우에(井上聞多)와 영국으로 향했다. 뱃삯을 지불했지만 선장의 강요로 수부(水夫)일까지 했는데, 상해에서 런던까지 가는 약 4개월 동안 호리 다쓰노스케(堀辰之助)가 편찬한 영일소사전(英和<5BFE><8A33>袖珍<8F9E>書:1862)을 가지고 선원들에게 영어를 배웠다. 그러나 영국 유학은 오래가지 못했다. 고향 조슈번이 외국과 전쟁을 벌인다는 소식을 듣고 1864년 귀국해 포르투갈인 행세를 했다. 1867년 막부가 천황에게 정권을 돌려주는 대정봉환(大政奉還)으로 조슈와 사쓰마번 중심의 신정부가 수립되면서 이토는 영국 유학 경험 덕분에 외국사무계에 배치되었다. 평민 출신 이토가 일본 근대정치사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첫발이 시작된 것이다.

1 무사 시절의 이토 히로부미. 이토는 젊은 시절 스승 요시다의 영향을 받아 격렬한 양이론자였다. 2 이와쿠라 사절단. 왼쪽부터 기도, 야마구치, 이와쿠라, 이토, 오쿠보. 이와쿠라 사절단은 귀국 후 일본의 근대화를 주도하게 된다.

이토 추종자였던 가네코 겐타로(金子堅太)가 지은 이토 히로부미 전(伊藤博文傳:1940)은 이토의 선조가 13세기 여몽(麗蒙)연합군의 침략 때 몽골 군함을 습격한 고노 미치아리(河野通有)라고 서술했다. 고노의 혈통은 7대 고레이(孝靈) 천황의 아들인 이요(伊豫) 왕자로부터 시작한다. 일본인들 스스로가 제15대 응신(應神) 천황 이전의 천황들은 실존 인물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는 점은 별개로 치더라도 이토 히로부미가 고노 미치아리와 연결되는 어떠한 중간 고리도 없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족보 위조에 해당한다. 부친 이토 주조(伊藤十藏)는 날품 팔던 하층민으로서 하급무사 아시가루(足輕)보다도 낮은 신분이었다. 부친이 지어준 이토의 첫 이름 리스케(利助)는 미천한 가문의 자식이 갖는 흔한 이름이었다. 여기에 불만을 가졌던 이토는 리스케(利介)로 바꿨다가 도시스케(利輔), 슌스케(春輔)를 거쳐 최종적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된다. 그만큼 신분에 대한 콤플렉스가 컸다. 같은 송하촌숙 동문이었던 다카스기 신사쿠(高衫晋作)는 이토를 ‘리스케’라고 불러도 이토는 ‘다카스기 님’이라고 존칭을 붙여야 했다.

이토가 외국사무계에서 처리한 첫 번째 사건은 히젠(備前)번의 양이파 병사가 외국 군인에게 상해를 입힌 고베(神戶)사건이었다. 대장(隊長) 다키 젠사부로(瀧善三郞)에게 할복령이 내렸는데, 이토는 외국인들 앞에서 할복을 감시하는 입회 역할을 맡았다. 영국공사관에 불을 질렀던 이토가 외국의 앞잡이가 돼 양이파 장교의 할복을 감시했던 것이다. 1871년 11월 이토는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등과 함께 구미로 향하는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 사절단의 일행으로 선발돼 두 번째로 해외에 나갔다. 일본을 개국시켰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던 미국은 이와쿠라 사절단을 크게 환대했고, 1872년 1월에는 그랜트 미국 대통령을 예방했다. 이와쿠라 사절단은 구미 문물시찰과 불평등조약 개정 등의 목적을 갖고 있었지만 치외법권 등의 조항이 담긴 불평등조약 개정에는 실패했다. 일본에는 아직 헌법이 없고 재판 또한 구미 각국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미국이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쿠라 사절단이 독일로 가서 빌헬름 1세와 재상 비스마르크와 회견하는 1873년께 일본 본토는 이른바 정한론(征韓論)으로 시끄러웠다. 신정부 수립 다음 해인 1868년 12월 일본은 대마도주 소 요시아키라(宗義達)를 통해 대수대차사(大修大差使) 히구치 데쓰시로(<6A0B>口鐵四郞)를 동래에 보내 왜학훈도 안동준(安東晙)에게 서계와 국서를 전했다. 그런데 이 문서에 ‘우리나라(일본)의 정권이 황실에 돌아갔습니다…조정으로부터 칙명을 받아(일본외교문서 1권)’라는 내용 등이 있었다. 황실·봉칙(奉勅) 등의 용어가 사용되었다는 이유로 조선에서 접수를 거부한 것이 갈등의 시작이었다. 1870년 7월 외무대승(外務大丞) 야나기하라(柳原前光)는 “북쪽은 만주에 연하고, 서쪽은 청과 접해 있는 조선을 우리의 영역으로 만들면 황국보전(皇國保全)의 기초로서 장차 만국경략진취(萬國經略進取)의 기본이 되지만 만약 다른 나라에 선수를 빼앗기면 국사는 끝난다”면서 조선 강점을 주장했다.

일본 대외 전략의 기본 이념인 ‘주권선(主權線)’과 ‘이익선(利益線)’ 개념이 이때 벌써 등장한다. 주권선인 국경선을 지키려면 그 바깥쪽에 설정한 이익선을 지켜야 한다는 전략인데, 이때 이미 조선이 이익선이었다. 1870년 12월 외무대승(大丞)인 마루야마(丸山作樂)는 “조선국은 황국을 위해 중요한 지역으로 지금 손쓰지 않으면 반드시 다른 나라가 정복할 것”이고, “조선이 문명개화한 뒤에는 도저히 정벌할 수 없다”라면서 조선 침공을 위한 결사대를 모집한 적도 있었다. 1873년 일본이 부산 왜관을 일본공관으로 바꾸면서 쓰시마 상인뿐만 아니라 도쿄 상인도 무역행위에 나서자 조선이 단속하겠다고 통보했다. 이때 동래부에서 왜관에 게시한 문서에 일본을 ‘무법지국(無法之國)’으로 표현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일본 내에 정한론이 불거졌다(일본외교문서 6권). 이 내용은 조선 측 사료에는 나오지 않는데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와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 등이 정한론자로서 즉각 정벌을 주장했다.

메이지 정부에 대한 사족과 농민들의 반발을 외부로 돌릴 필요가 있었던 점도 정한론의 배경이었다. 정한론은 이와쿠라 사절단이 귀국한 후에 결정하기로 미뤄 놓았는데, 1873년 8월 이와쿠라 사절단이 1년10개월 만에 귀국했다. 이와쿠라와 오쿠보는 모두 일본은 외정(外征)에 나설 때가 아니라 국력을 더 기를 때라며 조선 정벌을 반대했다. 이와쿠라 등은 10월 23일 메이지 천황의 동의를 얻어 정한론을 폐기시켰고 사이고와 이타카기 등 정한론자들은 일제히 사직했다.

이때 이토도 ‘내치우선론’에 동조해 정한론을 반대하면서 오쿠보 등의 신임을 획득했다. 어쨌든 이토와 조선의 첫 관계는 그리 나쁘지 않게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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