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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소 아닌 정보로 사는 생명체 관객은 관찰자 아닌 참여자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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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호 31면

일본의 전화회사 NTT가 100주년 기념으로 설립한 ICC(Inter Communication Center)는 기술과 예술 간의 융·복합을 통해 새로운 예술을 창출하는 야심찬 프로젝트로 출범했다. 1997년 디지털 혁명의 열기가 하늘을 찌를 때였다. 갓 오픈한 ICC를 방문한 필자 앞에 개관에 맞추어 당대 최고의 미디어 아티스트들에게 요청해 제작한 작품들이 펼쳐졌다. 예술이 과학기술을 만나 펼쳐진 신비와 매혹의 향연이었다. 그중 크리스타 소머러와 로랑 미뇨노의 ‘Life Spacies’(사진 1)는 마치 살아있는 판타지 생물을 만난 듯한 감동으로 오랫동안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시대의 안테나, 디지털 아트 <2> 사이버 세계의 인공생명 예술

텍스트 입력하면 먹이로 벌레로 변이
다소 기괴한 형태의 3차원 영상 앞에 서면 작품이 내게 반응한다. 나의 움직임에 따라 특정 식물이 성장하고, 벌레같이 생긴 인공생명들이 자기복제를 하며 증식한다. 작품 앞에 놓인 모니터에 텍스트를 입력하면 곧 글이 벌레가 되어 스크린에 탄생한다.(사진 2) 또 관객이 입력하는 글자들이 인공생명의 먹이가 되기도 한다. 먹이를 충분히 먹어 에너지가 충만해진 벌레는 짝짓기를 해서 후손을 만든다. 작가가 지정한 유전적 코드에 의해 변이를 일으키며 인공생명은 진화한다. 이때 관객은 단순한 관찰자가 아닌 생명현상의 참여자가 되어 있다.

물론 실리콘 생명이다. 기계와 자연의 경계를 흐려놓은 노버트 위너의 ‘사이버네틱스’ 이론과 자기복제를 하는 존재자를 이론적으로 밝힌 폰 노이만의 ‘세포자동자’ 개념이 1980년대 복잡계 이론들과 만나 탄생한 생명이다. 통계물리학과 전산과학의 발전에 진화생물학이 가세해 컴퓨팅 기술로써 구현되는 인공생명의 등장은 생명 자체에 대한 논쟁을 새롭게 한다. 즉 자기조직성, 항상성, 외부 변화에 대한 적응성을 물론이고 아래로부터의 창발성과 같은 생물학적 특질을 보이는 인공생명에 대해 크리스 랭턴과 같은 주창자들은 생명논리적으로 ‘가능한 생명(life-as-it-could-be)’으로 보호육성할 것을 권한다. 인공생명들이 최적의 환경에서 진화하고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한 ‘인공생명 야생 보호구역’을 인터넷상에 설정하자는 제안도 있다.

실제로 우리 주위엔 이러한 인공생명들이 컴퓨터 프로그램(‘soft’)으로, 로봇(‘hard’)으로, 그리고 아직은 드물지만 생물과 결합된 형태(‘wet’)로 늘어가고 있다. 그래픽 프로그램처럼 대부분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착한 인공생명이지만, 몇몇 웜바이러스는 사이버무기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런데 명령을 순순히 따르던 인공생명이 어느 날 갑자기 의식이 창발해 우리에게 반기를 들 수도 있을까? 사이버펑크 소설이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테마인데, 기술이 인간의 인지능력을 초월한 오늘날, 허무맹랑한 망상은 아닐 것이다.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의 버그덩어리 프로그램, 인형사가 우리에게 던진 말은 의미심장하다.

“… 당신들의 DNA도 역시 자기보전을 위한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아. 생명이라는 건 정보의 흐름 속에서 태어난 결절(마디)과 같은 것이지. 종으로서의 생명은 유전자란 기억 시스템을 가지며, 사람은 단지 기억에 의해 개개인일 수 있다. 설령 기억이 환상의 동의어였다고 해도. 컴퓨터의 보급 덕분에 기억을 외부화할 수 있었을 때, 당신들은 그 의미를 더 진지하게 생각했어야 했지….”

복잡과 혼돈은 예술 창작의 토양
탄소 성분이 없는 생명이 가능할까? 인공생명 옹호론자들이 탄소화합물 유기체로서의 생명체 개념을 훌쩍 넘게 된 것은 생명의 본질을 ‘정보’로 본 어윈 슈뢰딩거를 비롯한 양자물리학자들의 영향이 크다. 양자물리학의 유명한 실험, ‘더블슬릿 실험(Double Slit Experiment)’에서 드러난 전자의 파동-입자 이중성은 확률에 기반한 가능성의 존재로 생명의 개념을 확장하고 추상화했다. 또 잠재적 가능성으로서의 생명을 현실화시키는 데 핵심으로 정보의 교환·흐름·소통을 지목한다. 특히 이 실험에서 드러난 ‘관찰자 문제’, 즉 관찰자의 유무에 따라 파동에서 입자로 바뀌는 현상은 정보의 소통에 의한 물리적 변화를 생명 현상으로 보는 견해를 강화한다.

닐 보어가 “생명 현상에서 우리는 단지 관찰자로 그치지 않는다. 언제나 행위자다”라고 말했을 때, 인간과 만물은 정보처리장치다. 17세기 라이프니츠 ‘단자론’의 울림이 있는 이 정보처리장치의 ‘자율성’은 철학과 신학의 ‘자유의지’의 문제와 함께 아직 미결이다. 혹시 인공생명의 ‘반란’을 연구하면 알 수 있을까?

우주를 기계로 본 뉴턴의 결정론적 세계관이 양자물리학에 자리를 내주면서 세계는 불확정적이며 상호작용에 열린 가능성의 우주로 바뀌었다. ‘복잡’과 ‘혼돈’으로 대변되는 오늘날은 다른 한편으로 예술 창작의 비옥한 토양이다. 현대 예술, 그중에서도 디지털 아트의 개방성, 비결정성, 관객 참여, 그리고 창발성은 다름 아닌 시대정신(zeitgeist)의 발현이다. 원근법에 충실한 풍경화가 ‘이발소 그림’으로 폄하되고, 알 수 없는 추상화와 그보다 더 알 수 없는 디지털 아트가 각광받는 이유다. 예술을 자연의 모방(mimesis)이라 할 때, 인공생명 예술은 포스트 뉴턴의 새로운 자연을 시뮬레이션하며 생명의 신비에 한걸음 더 다가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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