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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스페셜 - 월요인터뷰] ‘강남 좌파 스님’이 사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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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봉은사 전 주지 명진(明盡) 스님은 “봄이 되기 전에 핀 꽃이 철부지다. 철을 모른다(不知)는 뜻이다. 나도 시도 때도 모르고 퍼붓고 있으니 철부지다. 사춘기의 순수성은 고발과 도전이다. 나는 영원한 철부지, 영원한 사춘기로 살고 싶다”고 말했다. [안성식 기자]

지난달 28일 서울 남산에서 봉은사(서울 강남구 삼성동) 전 주지인 명진(明盡·61) 스님을 만났다. 스님은 최근 첫 책을 냈다. 제목이 『스님은 사춘기』(이솔출판사)다. 교보문고 등 대형서점 종교 부문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지난해 불교계를 달궜던 ‘봉은사 사태’ ‘강남 좌파 주지’ 논란과 함께 이젠 전국적 지명도를 가진 명진 스님에게 ‘사춘기’에 대해 물었다. 절집 안에도, 절집 밖에도 “명진 스님은 지금도 사춘기야”라는 시선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에게 ‘사춘기 명진’을 물었다.

-제목이 눈에 띈다. 누가 정한 건가.

 “직접 정했다. 늘 사춘기이고 싶다.”

 -왜 사춘기인가.

 “태어나서 소년이 청년이 되기 전에 사춘기가 온다. 그때 생각한다. ‘나는 왜 사나. 내가 대학 가려고 이렇게 공부를 하는 이유는 뭔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나. 집안이 불행하면 왜 나도 불행한가. 이 우주는 얼마나 넓나. 허공은 어디서 끝이 나나’. 그런 물음을 던질 때가 사춘기다. 그런데 사람들은 결혼하고 아이들 먹여 살리면서 사춘기적 물음과 멀어진다. 그런 물음을 끝없이 갖고 가는 사람은 70~80세가 돼도 사춘기다. 그런 물음이 없으면 청소년기라 해도 진짜 사춘기는 아니다.”

 -스님께선 ‘진짜 사춘기’인가.

 “나는 그 물음 자체를 사춘기라고 본다. 그런데 그런 물음을 안 던지고, 망상 피우고, 남 욕하고, MB가 잘했느니 못했느니 할 때는 사춘기가 아니다. 그때는 팔춘기, 십춘기가 된 거다.”

 -왜 팔춘기, 십춘기가 됐나.

 “정치권력이나 사회권력을 비판할 때 약자의 편에 서는 경우가 많았다. 집이 없고, 교육을 못 받고, 형편이 어려우면 자기성찰을 위한 철학적 고민을 하기가 어렵다고 본다. 먹고, 입고, 교육받는 정도는 평등해져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지만 더 많은 사람이 자기성찰을 위한 물음을 던질 수 있도록 우리는 나눠 가져야 한다. 그게 자비심이다. 중생의 아픔을 같이하기 위해서는 칠춘기도 되고, 팔춘기도 될 수 있지 않나.”

 -그건 팔춘기에 대한 변명, 혹은 정당화가 아닌가.

 “부처님도 고락이 있는 사바세계가 인간들이 도 닦기에 좋다고 했다.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종교인의 역할이라고 본다. 그렇게 변명을 합시다.”

 -지난해 환갑이셨다. 그런데도 ‘좌충우돌 스님의 수행기’라는 서평 제목이 있더라. 좌충우돌(左衝右突) 명진 스님, 어찌 생각하나.

 “좌충우돌. 좌파한테도 들이받고, 우파한테도 들이받으란 얘기로 들린다. 그런데 왜 우파만 욕을 하느냐. 이런 뜻이 담겨 있는 것 아닌가. 우파만 욕하는 ‘우돌 스님’이 되지 말고, 좌파와 우파 모두 때리는 ‘좌충우돌 스님’이 되라고 하는 얘기 같다.”

 -좌파도 때리고 우파도 때리라는 그 말에 공감하나.

 “1999년 민족공동체추진본부 집행위원장을 맡으면서 1년에 한두 차례, 총 10여 차례 평양에 갔다. 나도 평양 가면 굉장히 싸운다. 북한의 고급 관료들에게 마시던 물컵도 집어던졌다. ‘집단농장을 통해 너희가 생산성을 높였느냐. 아니다. 개인이 욕심을 좀 갖게 해줘야 한다. 그래야 생산성이 올라간다. 당신들은 관료주의다’고 퍼부었다.”

 -북측 사람들 반응은 어땠나.

 “‘관료주의란 말 함부로 하지 마시오’라며 엄청 화를 냈다. 관료주의라는 말은 북에서 ‘반동’이란 말과 마찬가지더라. 북측 사람들은 ‘명진 스님은 화끈하고 시원하다. 그런데 성질이 급하고 못 참는다’고 평하더라.”

 -국내에선 왜 ‘좌충’은 안 하고, ‘우돌’만 하나.

 “사실 보수 측보다 진보 측을 더 꾸짖고 싶은 심정이다. 그런데 진보는 없는 쪽이고, 보수는 있는 쪽이다. 이런 상황에서 진보를 꾸짖는 건 너무 가혹하다. 김대중(DJ) 정권과 노무현 정권이 한국사회의 흐름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 주류 보수라는 국민정서를 무시했다. 그래서 정권을 내놓게 됐다. 국민정서에 맞추는 통합과 소통을 통해 사회변화를 모색하는 방법을 썼어야 했다. 좀 더 치밀하고, 좀 더 사려 깊게, 좀 더 멀리 내다봐야 했다.”

 -총무원 직영사찰 지정 문제로 불거진 봉은사 사태를 돌아보면 어떤가. 좀 더 치밀하고, 사려 깊고, 멀리 내다봤나.

 “나도 (개혁에 실패한) 조광조가 된 거다. 사돈 남 말하고 앉아 있는 거다. 하하하. 김대중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이 범했던 오류를 똑같이 범했다. ‘나는 잘한다’는 자만심도 있었다. 종단의 다른 스님들과 템포를 맞추며 함께 가질 못했다. 봉은사 산문을 나서지 않고 1000일 기도했다는 뿌듯함, 강남의 큰절에서 누가 이걸 하겠나 하는 자만심이 있었다.”

 -봉은사에 대한 집착도 있었나.

 “그렇다. 봉은사에 대한 집착이 굉장히 강했다. 봉은사라는 물적 토대, 1000일 기도를 통해 모인 기운이 있었다. 그것이 무너지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그래서 엄청 분노했다. 사람들의 기대치에 못 미치는 폭언에 가까운 말도 했다. 나도 인정한다. 그런데 봉은사를 통해 한국 불교를 바꿔보고 싶은 열망이 너무 강했다.”

 -봉은사 주지에서 물러나며 문경 봉암사에서 동안거에 들어갔다. 결재 중에 고(故) 리영희 선생의 49재 때 외출을 했다. 봉은사 1000일 기도 중에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 때 산문 밖으로 나갔다. 그건 수행자의 자세인가.

 “리영희 선생님은 서울공고 선배다. 80년대에 만나 가깝게 지냈다. 1000일 기도 회향 때 평생 쓰던 만년필을 주시더라. 산문을 나설 때는 한없이 미안했다. 어떤 핑계를 대더라도 옛날부터 내려오는 규칙을 어긴 것은 대중에게 잘못한 일이다. 참회하는 마음이다.”

 -앞으로 계획은.

 “충북 제천의 월악산에 흙으로 된 암자가 있다. 거기서 100일 정도 정진하며 지내려 한다. 책 냈더니 인터뷰 요청도 많고, 강연 요청도 많다. 다 끊고 지낼 작정이다.”

백성호 기자

지난달 28일 오후 서울 남산에서 명진 스님과 나눈 대화를 동영상으로 촬영했습니다. 스마트폰에서 QR(Quick Response·빠른 응답)코드 리더기를 작동시킨 뒤 왼쪽에 있는 QR코드를 화면중앙 네모 창에 맞추면 동영상이 뜹니다.

월악산 암자 100일 정진 들어간 명진 스님

명진 스님은 1950년 충남 당진에서 출생했다. 19세 때 해인사 백련암에서 출가했다. 75년 순천 송광사에서 첫 안거(安居)를 하고, 해인사·봉암사·용화사·상원사 등의 선방에서 40안거를 했다. 87년 민주화운동 당시에는 불교탄압대책위원회 위원장도 맡았다. 94년 조계종 종단 개혁회의 상임위원, 2005년 봉은사 선원장을 역임했다.

스님은 2006년 서울 강남의 봉은사 주지를 맡았다. 1000일 동안 산문 출입을 하지 않고 매일 1000배씩 기도를 했다. 봉은사 직영사찰 지정 문제를 놓고 조계종 총무원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2010년 11월 봉은사 주지에서 물러났다. 요즘은 충북 제천의 월악산 암자에서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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