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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Global] 세계 발레 ‘백조’로 떠오르는 25세의 발레리나 서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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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의 몸은 약했다. 그래서 수영을 배웠다. 하지만 좀체 늘지 않았다. 강남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엄마는 아이를 발레 학원에 보냈다. 6개월째 기적 같은 일이 생겼다. 선화예중 발레 콩쿠르에서 입상을 했다. 이때부터 그녀의 도전과 신화(神話)가 시작됐다. 세계적 발레리나로 발돋움하는 서희(25)의 인생 스토리다. 마침 미국 배우 내털리 포트먼이 영화 ‘블랙 스완’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뒤 발레도 조명을 받고 있다. 한국엔 서희라는 백조가 있다. 세계 5대 발레단의 하나인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ABT)’ 소속이다. 그녀는 올봄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에서 세 작품의 주연을 맡아 화려한 무용을 선보인다. 완벽한 몸매, 우아한 움직임, 새털처럼 가벼운 점프와 섬세한 연기까지 갖춘 그녀를 j가 뉴욕에서 만났다.

뉴욕 중앙일보=박숙희 문화전문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좌절도 많다. 그러나 난 매일 변한다”

●다쳤다고 들었다. 몸은 괜찮나.

“지난해 말 ‘호두까기 인형’ 중 클라라 역을 연습하다 넘어져 발목을 다쳤다. 다행히 수술은 안 해도 될 정도다. 아직 재활운동을 하며 리허설 중이다.”

●지난해 8월 한국인 최초로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에서 조연급에 해당하는 솔로이스트(Soloist)가 됐다.

“세계 최고 발레단원들과 선생님, 그리고 까다로운 관객들에게 인정받았다는 대외적 의미가 있다. 개인적으론 주역으로 역할에 더 깊게 집중하고 배울 수 있는 여유가 생겨서 좋다. 사실 어떤 때는 본 무대보다 단원들이 다 지켜보는 데서 진행되는 스튜디오 리허설이 더 떨린다. 모두 발레 도사들이다.”

●수석 무용수는 언제쯤 기대할 수 있을까.

“글쎄…. 물론 멀리 가고 싶다. 그러나 천천히 하겠다. 주역이라는 타이틀만으론 예술가가 될 수 없으니까.”

●젊은 나이에 많은 걸 성취했는데.

“발레를 시작한 뒤 피곤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완벽 추구에 좌절도 많이 한다. 그래도 매일매일 다시 발레리나가 되기로 결심한다. 오늘도 노력해서 조금 더 발전된, 내가 원하는 더 나은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다.”

●가장 하고 싶은 역할은.

“강수진 선생님이 맡아서 한국인에게 많이 알려진 ‘레이디 오브 카멜리아(Lady of the Camellias·발레판 ‘라 트라비아타’)’의 마가리트 역이다. 발레단에서 데이비드 홀버그와 배우고 있는데, 언제 공연 기회가 올진 모르겠다. 또 있다. 백조와 흑조를 모두 연기해야 하고, 인간이 백조가 되는 환상적 작품 ‘백조의 호수’ 주역이다.”

●영화 ‘블랙 스완’을 봤나.

“내털리 포트먼의 연기는 좋았다. 하지만 진짜 발레 세계와 동떨어진 부분도 많았다. 거식증이나 캐스팅을 위한 단장과의 관계 등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과장된 측면도 있다.”

●실제 주역을 맡으면 ‘블랙 스완’의 주인공 니나처럼 압박이 큰가.

“리허설 기간 중엔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힘들다. 하지만 막상 공연이 시작되면 보통 때처럼 행동하려 하고, 최대한 마음을 편하게 먹는다. 항상 압박감이 있어서 공연 날이라고 크게 다르진 않다. 매일매일이 그렇다고 보면 된다.”

“하급 무용수였다. 그러나 나만의 줄리엣으로 승부했다”

●2009년 단역배우로 ‘로미오와 줄리엣’의 여주인공을 맡아 화제가 됐다. 미국 발레 전문지 ‘포인트’는 “스타 발레리나가 탄생했다(A Prima is Born)”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는데.

 “줄리엣 역은 기교적이라기보단 상상을 요구하는 역할이다. 수많은 발레리나가 그 역을 해왔다. 당시 발레단에서 내 위치는 ‘코르드 발레’(주역이 아닌 군무 발레리나)였으므로, 나만의 줄리엣을 만들어야 했다. 쉽진 않았다. 느낄지라도 표현하는 것은 어렵다. 역할을 위해 노마 쉬어러 주연의 흑백영화를 비롯해 올리비아 허시, 리어나도 디캐프리오가 출연한 영화도 찾아 봤다.”

●그런 노력 때문에 올봄에도 ‘지젤(Giselle)’과 ‘브라이트 스트림(The Bright Stream)’에서 비중 있는 역으로 출연하는 건가.

“지젤은 줄리엣과 더불어 모든 여자 무용수가 맡길 원하는 로망이다. 남들보다 일찍 역할을 맡게 돼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줄리 켄트, 니나 아나니아쉬빌리 같은 전설적 발레리나들의 공연을 봐왔기 때문에 부담도 된다.”

●지젤은 어떤 인물인가.

“순진한 시골 처녀로, 신분을 숨기고 마을에 온 왕자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왕자의 약혼자가 등장하자 충격으로 죽는다. 영혼으로 왕자와 다시 만나 사랑의 춤을 추지만, 동이 트면 다시 무덤으로 돌아가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

●러시아 집단농장과 작곡가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이 배경인 ‘브라이트 스트림’에선 발레리나 역이다.

“주인공 지나와 함께 발레 학교에 다니다 나는 도시에서 발레리나로 성공하고, 지나는 고향으로 돌아간다. 내가 고향에 공연하러 가며 벌어지는 해프닝을 그린다. 처음엔 도시에서 사온 옷과 신문 기사를 보여주며 도시 생활과 성공한 삶을 자랑하다, 어릴 적 모습으로 돌아가 바람을 피우는 지나 남편을 혼내기도 하는 재미있는 역이다.”

●두 작품에 이어 크리스토퍼 휠든 안무의 새 발레에도 나온다.

“특별히 나를 위해 만들어지는 작품이다. 벤저민 브리튼의 곡을 안무한 발레다. 새로운 작품은 안무와 역량도 중요하지만, 무용수의 뮤즈 역할도 중요하다. 춤과 영감을 주는 두 역할을 해야 한다.”

●‘지젤’의 상대역 데이비드 홀버그와 ‘브라이트 스트림’의 호세 마누엘 카네노는 어떤 댄서인가.

“발레단 최고의 남성 무용수들이다. 난 파트너 복이 많아서 작품마다 그 역할의 최고 댄서들과 춤을 춰왔다. 데이비드와는 ‘라 실피드(La Sylphide)’에서 연기했고, 호세와는 ‘라 바야데르(La Bayadere)’에서 주역을 함께 맡았다.”

●동료들 사이에 질투나 부러움은 없나.

“발레단에 들어온 지 5년이 넘었다. 항상 모든 동료한테 모범이 되고자 노력하고, 다른 무용수들을 보며 많이 배우고 있다.”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의 수석무용수 중 누굴 가장 좋아하나.

“줄리 켄트다. 발레리나가 가질 수 있는 최대의 장점은 여성스러움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녀의 무용의 그렇다. 진짜 예술가만이 가질 수 있는 ‘아우라’가 있는 무용수를 존경한다.”

●역대 발레리나 중에선.

“지난해 ‘라 바야데르’에서 주역을 맡아 나탈리아 마카로바 선생님과 리허설을 했다. 인도를 배경으로 한 발레라서 섹시한 의상을 입고 신과 영접하는 안무가 있는데, 선생님은 “정신적으로 하라, 성적인 것이 아니다(Spiritual not Sexual)”는 한 문장으로 작품을 완벽히 설명했다. 나는 작품을 완벽히 이해하고 춤을 추는 모든 무용수를 존경한다.”

“단백질 많이 섭취하려 합니다”

●발레리나에 대한 일반인의 큰 오해는.

“적게 먹고 얌전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특별한 식이요법은.

“몸에 필요한 음식은 ‘내가 원하는 음식’이라고 배웠다. 가리지 않고 잘 먹고 단백질을 더 섭취하려고 한다.”

●수영한 것이 발레에 영향을 줬나.

“특별히 발레에 주는 영향은 없고, 그저 물에 빠지면 살아남는 방법을 배웠다, 하하.”

●이국땅에서 가장 힘든 때는.

“가족이 보고 싶을 때다.”

●어떻게 극복하나.

“친구처럼 지내는 엄마한테 전화해서 울고, 수다도 떤다.”

●올봄 공연의 ‘개막 파티’에도 모친이 온다던데.

“한국의 어머니가 오셔서 갈라 파티에 함께 갈 예정이다. 정장 차림의 이벤트라 엄마가 벌써 열심히 드레스를 고르고 계신다. 난 보통 디자이너들이 보내주는 드레스에서 골라 입는다.”

●시간이 날 때는 뭐하나.

 “운동하러 간다. 체육관에서 트레이너와 함께 근력운동을 한다. 때론 오페라나 전시회도 가고. 대학교 공부도 한다.”

●대학 공부라니.

“미국에서 예술가들이 공부하는 대학 코스가 있다. 정규 대학 교수들이 와서 수업을 한다.”

●발레리나로서 가장 자랑스러울 때는.

“마음이 뜨거워지는 공연을 했을 때다. 관객의 박수, 그리고 진심이 담긴 감사 편지를 받았을 때도 그렇다. 세계적 무용수들과 같이 일하고, 최고의 선생님들에게 항상 새로운 것을 배우는, 특별한 삶을 산다는 것을 느낄 때다.”

●20년 후 자신의 모습을 그려본다면.

“아마 엄마가 되어 있지 않을까?”

j 칵테일 >> 1m69cm 46kg 몸매

해외생활 13년째인 발레리나 서희는 1m69cm에 46kg의 신체 조건을 갖고 있다. 서구에서도 보기 힘든 몸매라고 한다. 서희의 재능을 지켜본 아메리카 발레 시어터의 예술감독 케빈 매켄지도 “발레리나로서 완벽한 몸을 가졌다”고 찬사를 한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다. 매켄지 감독은 “서희의 가장 큰 자산은 배역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해석하는 ‘통찰력’에 있다”고 평가한다.

발레를 시작한 것은 6학년 때였다. 반 년 만에 선화예중 콩쿠르에 입상해 그 학교에 들어간 서희는 1학년 때 문훈숙 유니버설발레 단장의 권유로, 워싱턴 DC의 키로프 발레 아카데미에 3년 장학생으로 유학을 간다. 여기서 전설적 댄서인 알라 시조바의 혹독한 지도를 받았다.

이후 2003년 스위스에서 열린 로잔 콩쿠르(Prix de Lausanne)에서 입상했고, 같은 해 뉴욕의 유스 아메리칸 그랑프리(Youth America Grand Prix)에서 대상을 탔다. 강수진씨가 수석무용수로 활동하는 독일 스투트가르트 발레단 산하 ‘존 크랑코 발레아카데미’에서 수학하던 중 스투트가르트와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로부터 입단 제의를 받았다. 서희의 선택은 미국이었다. 2005년 견습생으로 출발해 2010년 초고속으로 ‘솔로이스트’ 자리에 올랐다. 말 그대로 ‘스타 탄생’이었다.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엔 수석 무용수 17명(남 9, 여 8)과 솔로이스트 14명이 있고, 코르드 발레 단원으론 58명이 있다. 모두 쟁쟁한 실력파들이다. 그녀가 2009년 줄리엣을 공연했을 때 뉴욕 타임스는 이런 평론을 실었다. “7월의 줄리엣(Juliet in July)으로 상서로운 데뷔. 코르드 발레 무용수에 불과한 서희의 몸은 스텝마다 날아올랐다. 시몬 미스머와 함께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의 가장 매혹적인 발레리나가 그녀다.”

>> 동네 언니 옷 빌려입고 첫 콩쿠르

서희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전교 어린이 회장이었다. 교장선생님은 어느 날 선화예중에서 편지를 받았다. 발레 콩쿠르가 열리니 응모할 학생을 추천하라는 것. 교장선생님은 서희를 보냈다. 그녀의 회상. “저는 당시 취미로 발레를 했어요. 그러니 남들이 얼마나 연습하고 갔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참가했지요.”

문제는 복장이었다. 발레 의상과 슈즈는 비쌌고, 취미로 하던 터라 자신의 옷이며 신발이 있을 리 없었다. “아는 동네 언니의 것을 빌려 입고 나갔어요.” 그러나 상은 그녀의 몫이었다. 마치 신데렐라 스토리 같다. 서희는 “콩쿠르 입상을 계기로 선화예중에 장학생으로 가게 됐어요. 하지만 막상 입학해선 진도를 못 따라가는, 많이 뒤처진 학생에 불과했다”고 했다. 그러나 발레복을 빌려 입은 가녀린 소녀는 특유의 감각과 노력으로 10여 년 만에 세계적 고수 반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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