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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대통령 농락한 ‘제임스 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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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30대 중반의 사기범이 아프리카 대통령 등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한국전력 전무 출신 사업가 등에게서 11억여원을 가로챘다가 경찰에 적발됐다.

 6일 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에 따르면 여권 위조 전과가 있는 한모(36·미국명 ‘제임스 한’)씨는 2009년 10월부터 아프리카 수단의 오마르 하산 아흐메드 알바시르 대통령과 말리의 알파 우마르 코나레 대통령 등에게 선을 대 만났다. 대통령들을 만나기 위해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에 근무했던 통역관까지 고용해 1억 달러의 정부 지원금을 끌어와 병원과 통신망을 지어주겠다고 제시했다. 아프리카 극빈국 대통령인 이들은 우리 정부의 대외경제협력기금(EDCF) 차관 도입에 목말라 있었다. 차관 유치를 위해 서울에 말리 대사관을 개설하고 자신을 말리 대통령 경제정책실장으로 임명해 달라는 e-메일도 주고받았다.

 한씨는 대통령들을 만날 때마다 찍은 사진을 갖고 한국전력 전무를 지낸 사업가 김모(57)씨에게 접근했다. 그에게 “한전 사장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한씨는 한술 더 떠 자신이 대선 때 실무조직팀에 있었고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등 고위층 인사들과도 잘 아는 사이라고 거짓말했다. 그는 이런 수법으로 김씨에게서 한전 사장 내정을 위한 로비자금 명목으로 1억원을 뜯어내고 2000만원 상당의 향응을 제공받았다. 이어 김씨를 통해 소개받은 사업가 송모(58)씨 등 3명에게 아프리카 주택·병원 건설 사업권과 통신망 구축 사업권을 준다고 속여 10억여원을 챙겼다. 경찰청 관계자는 “사업가들이 외국 대통령과 친분을 쌓은 한씨의 영향력과 김 전무의 공신력을 믿고 쉽게 돈을 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경찰 조사 결과 한씨는 서울 서초동에 자기 명의로 유령회사를 차린 뒤 리무진 차량 두 대를 몰고 다니며 수행비서까지 뒀다. 증권가 사설 정보지도 이용해 언론에 보도되지 않은 경제·정치 소식 등을 전하며 마치 고위층을 통해 들은 정보인 양 흘리기도 했다. 경찰은 지난 2월부터 한씨에 대한 첩보를 입수하고 지난달 22일 서울 강동구의 자택에서 그를 붙잡아 지난달 말 검찰에 송치했다. 그는 같은 달 19일 인천공항에서 해외로 도피하려다 출국금지 소식을 듣고 도주 계획을 짜고 있던 중이었다.

  박성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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