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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시대 15m 쓰나미” 촌장은 잊지 않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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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일본 미야코(宮古)시 아네키치(姉吉) 지역 해발 60m 지점에 세워진 비석. 비석에 새겨진 “여기보다 아래에 집을 짓지 말라”는 선조들의 경고에 따라 고지대에 집을 지은 후손들은 이번 쓰나미에 무사했다. [요미우리 제공]

일본의 한 어촌마을 촌장의 지혜와 고집이 지진해일(쓰나미)로부터 마을 주민 3000여 명의 목숨을 구했다. 이와테(岩手)현에선 동일본 대지진에 이은 쓰나미로 8000여 명의 사망자와 행방불명자가 발생했지만, 북부 후다이(普代) 마을에선 단 한 명의 사망자도 없었다. 쓰나미가 덮친 일본 동북 해안지역에서 사망자가 전혀 없는 마을은 이곳이 유일하다.

 산리쿠(三陸) 해안가의 이 마을은 지난달 11일 약 14m 규모의 쓰나미가 덮쳤지만 높이 15.5m가 넘는 방조제와 수문 덕분에 마을 사람 전부가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요미우리 신문이 4일 보도했다. 방조제는 1967년, 수문은 84년 완공됐다. 각각 5800만 엔(약 7억5000만원)과 35억 엔(약 453억원)의 현 예산이 투입됐다. 방조제와 수문은 계획 당시 “너무 높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는 ‘만리장성’으로 불리던 같은 현의 미야코(宮古)시 방조제 높이 10m를 크게 넘어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와무라 유키에(和村幸得) 촌장은 높이 15m 이상을 고집했다. 메이지(明治) 시대에 15m 높이의 쓰나미가 밀려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이 지역은 1896년과 1933년 두 차례의 쓰나미로 439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래서 촌장은 “예산 낭비”라는 주변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높이 15m 이상의 방조제와 수문 건설을 관철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와무라가 당시 역사적 교훈을 바탕으로 고집했던 ‘높이 15m 이상의 방조제 건설 관철’이 옳았다는 것은 이번 쓰나미 때 입증됐다. 지난달 11일 거대한 쓰나미가 해초양식을 주업으로 하는 이 마을 앞의 항구시설을 삼키며 마을 쪽으로 몰려 왔다. 그러나 마을 앞에 설치된 높이 15.5m, 길이 155m의 방조제를 넘지는 못했다. 3일 현재 후다이 마을에서 사망자는 없고, 단 한 명이 방조제 밖에 있다 행방불명된 것으로 파악됐다. 반면 10m의 방조제가 있는 미야코시는 쓰나미가 방조제를 넘어오는 바람에 수백 명의 사망자와 행방불명자가 발생했다. 후카와타 히로시(深渡宏·70) 촌장은 “쓰나미 피해를 막으려는 고(故) 와무라 촌장의 열의가 주민들을 구했다”고 말했다.

 미야코시의 아네키치(姉吉) 지역의 12가구(40명)도 선조들의 경고 덕분에 이번 쓰나미에서 목숨을 구했다. 1896년과 1933년 두 차례의 쓰나미로 주민 대부분이 사망한 이 지역은 당시 살아남은 주민들이 해발 60m 지점에 “여기보다 아래에는 집을 짓지 말라”는 내용의 비석을 세웠다. ‘높은 곳에 사는 것은 자손의 안락, 엄청난 재앙의 쓰나미를 생각하라’는 하이쿠(俳句·일본의 전통 시)도 새겨 넣었다. 후손들은 이 경고에 따라 비석보다 높은 고지대에만 집을 지었다. 11일 쓰나미 경보가 발령되자 항구에 있던 주민들은 재빨리 집으로 대피했고, 거센 쓰나미는 비석 50m 아래에서 멈췄다. 기무라 다미시게(木村民茂·65) 자치회장은 “어릴 때부터 ‘비석의 가르침을 잊지 말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며 “조상의 교훈 덕분에 마을 주민 전체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정현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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