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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103)

중앙일보

입력

일러스트 ⓒ 김영진, heakwan@ymail.com

돌아눕는 뼈 3

육체는 ‘하나의 영토’라고 이사장은 설법했다.
육체는 ‘신들로 가득 찬 최고의 사원’이라는 것이었다. 눈(眼)과 귀(耳)와 코(鼻)와 혀(舌)와 살(身)은 다섯 가지 감각의 뿌리(五根)로서 육체의 창(窓)이며, 그 창을 통해 물질(色)과 소리(聲)와 냄새(香)와 맛(味)과 감촉(觸)을 인식(五識)하고, 이를 종합하고 조율하여 복합적인 생명에너지로 바꿔내면 그게 곧 의식세계라고 했다. 이사장은 육체를 특별히 추앙하지도 않았고 폄하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육체와 의식세계를 인위적으로 분리해 이원화하는 건 자연스럽지 않은 일이라고 했다. 세계가 오직 의식의 조작에 의해 달라질 수 있다는 경전들의 경구에 대해 이사장은 사뭇 비판적이었다.

육체의 욕망은 참된 진리에 비해 단지 환상적이고 말초적인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유심론적 주장은, 육체만이 아니라 최종적으로는 의식세계조차 작위적으로 부정하는 결과가 될 것이므로, 모든 걸 잃어버릴 편협한 도그마에 불과하니, “개한테나 주라!”고 이사장은 소리쳤다. 그는 육체의 감각과 깊은 의식세계를 ‘자연스럽게’ 한 몸뚱어리로 통합하라고 가르쳤다. 그럴듯한 말이었지만 노림수가 깃든 말이었다. 성적인 욕망조차 억압하거나 감추지 말고 자연스럽게 풀어가라는 암시가 깃든 말이기도 했다. 그는 감각적인 육체가 상승과 추락의 위태로운 갈림길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잘 활용하고 있었다.

여린의 방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나는 짐작하고 있었다.
이사장은 더욱더 잘 알고 있을 터였다. 밖의 세상보다 명안진사에서 더 용인의 범위가 넓은 게 있다면, 성적 욕망의 발현이었다. 성관계만은 놀랄 만큼 자유롭게 열려 있었다. 주로 안살림을 맡아 하는 ‘이모’들은 패밀리들 중 마음에 드는 사람을 거리낌 없이 유혹했다. 다만 ‘패밀리’ 범주에 들지 않는 일용직 일꾼들을 끌어들이는 일만은 엄격히 금지됐다. 외부로 소문이 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식당건물에 딸린 이층엔 방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섹스를 위한 몇 가지 도구들까지 준비돼 있다고 했다. 일에 지장을 주지 않는 시간이라면 패밀리들은 누구나 그 방에서 섹스의 유희를 즐길 수 있었다. 방구댁에 이끌려 멋모르고 따라 들어갔다가 다짜고짜 옷을 벗기려 드는 바람에 혼비백산 도망쳐 나온 적도 있었다. 방구댁은 도망치는 나를 손가락질하며 깔깔거리고 웃었다. 김실장이 대낮에 괴춤을 여미면서 이층에서 내려오는 걸 본 일도 있었다. 혼음(混淫)도 마다하지 않는 눈치였다. 말하자면 명안진사는 성관계에서만은 일종의 ‘자연스러운’ 해방구였고, 누구보다 이사장이 그것을 묵인하고 장려했다. 다만 애기보살과 여린만은 누가 됐든 명안진사에서 그 방으로 데려갈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관음이자 세지보살의 현현이었으므로.

“자넨, 꼴에, 세지보살이 장님이라 싫은가 보이?”
샹그리라 주차장에서 부딪친 백주사가 물었다.
“아, 아닙니다…….”
“세지보살 안마솜씨는 남달라. 지금이라도 한번 올라가보게. 몸을 풀어야 일도 제대로 하지. 요즘 자네 일이 많으니, 이사장님도 자네를 세지에게 보내라 특별히 내게 이르셨네. 이사장이 베푸는 자비로 알게. 생긴 건 우락부락한데 남자가 왜 그 모양인가?”
“아, 네에…….”
그렇지만 나는 올라갈 수 없었다.

두려움은 없었다. 안마를 받으러 올라갔다가, 안마과정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내가 짐작하고 상상해온 일들이 사실로 확인될까 봐 그런 것도 아니었다. 나에게 남아 있는 감정이라고는 슬픔뿐이었다. 내가 짐작하고 상상해온 일들이 낱낱이 확인돼도 분노를 느낄 것 같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녀는 나에게 여전히 ‘아주 옛날에’ 있었던 ‘보랏빛 점’을 가진 전설 속의 소녀로 남아 있었다. 나를 위해 세계의 폭력에 맞서준 유일한 전사였으며, 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대서 우주의 순결한 바람을 넣어준 단 하나의 어린 천사였다. 세상이 그녀를 어떻게 다루든지, 내게 있어 그 점은 결코 훼손되지 않을 것이었다. 그녀는 ‘감미’였으며 ‘존엄’이었고, 그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절대적인 아름다움은 자연법이 만든 최고의 가치로서 훼손될 염려가 없다고 나는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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