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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 재조명 시리즈 ② 석오 이동녕 선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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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천안은 충절의 고장이다. 유관순 열사부터 석오 이동녕, 유석 조병옥 선생, 충무공 김시민 장군 등을 배출한 고장이다. 아산에도 활발히 활동한 독립운동가와 치열한 독립운동의 현장이 있다. 중앙일보 천안아산이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와 함께 지역의 독립운동가를 재조명해 보는 독립유공자 시리즈를 기획했다.

석오 이동녕 선생은 상해로 건너가 임시의정원의 초대 의장을 맡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산파역을 수행했다. 석오를 비롯한 임정요인이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다. 왼쪽부터 김구 박찬익 이동녕 엄항섭 선생. [사진=독립기념관 제공]

이동녕 선생과 2011년 오늘

한국독립운동은 1894년 의병 봉기로부터 시작됐고, 1945년 8월 한국광복군이 국내 진공작전을 추진하던 중 일제의 항복으로 끝났다. 실로 한국독립운동은 무장투쟁으로 시작해서 무장투쟁으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특히 올해는 항일 무장투쟁과 관련해 매우 뜻 깊은 해다. 항일 무장투쟁의 전사들을 배출한 신흥무관학교 설립 100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은 1911년 서간도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에 세워진 독립군 양성소인 신흥강습소다. 이러한 신흥강습소의 독립군 사관 양성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중심에 바로 천안출신 이동녕 선생이 있다.

한말 계몽운동을 전개하다

이동녕 선생은 1869년 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동리에서 출생했다. 현재 목천읍 동리의 생가는 복원됐고, 그 옆에는 기념관이 세워져 선생의 위업을 기리고 있다. 연안 이씨 양반 명문가에서 태어난 이동녕 선생은 어려서부터 전통 한학을 익혔고, 1892년에는 진사시험에 합격하는 문재를 보였다.

전통 유학사상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일제의 거세지는 침략과 민중들의 사회 개혁 욕구를 목격하면서 근대화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을 경험하면서 이동녕 선생의 근대 민족의식은 더욱 굳어졌다. 경상북도 의성군수와 영해군수를 역임한 부친 이병옥을 도와 함경남도 원산에 광성학교를 세워 교육 계몽운동을 하고, 1896년 독립협회의 간사직을 맡아 개화·개혁운동에 참가하다가 옥고를 치른 것은 그 같은 근대화 의지를 실천한 것이다.

 하지만 조국의 운명은 더욱 기울어 갔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자 이동녕 선생은 결사대를 조직해 저항했으며, 1906년 북간도로 넘어가 진천출신의 이상설과 함께 서전서숙을 세워 민족지도자 양성에 힘썼다. 1907년 국내로 돌아와서는 신민회의 결성을 주도하고, 총서기를 맡아 활동하면서 국외 독립군 기지 개척론을 주창하며 이를 앞장서 실천해 갔다.

이승만 상해 부임 환영식(1920년 12월 28일).

서간도에서 독립군 양성에 나서다

경술국치 직후인 1911년 6월 서간도에서 이회영 형제들과 함께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설립해 독립군 양성에 힘을 쏟고, 앞으로 다가올 독립전쟁을 준비한 것이 바로 이러한 독립군 기지 개척론을 실천한 것이었다. 이때 세워진 신흥강습소는 신흥무관학교의 모체가 됐고, 이곳에서 배출된 독립군들은 후일 청산리대첩 등 항일 무장투쟁의 주역이 됐다.

 1914년에는 노령으로 건너가 이상설 등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광복군정부를 결성했지만, 제1차 대전이 발발함에 따라 연해주와 만주 일대에서의 독립운동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이동녕 선생은 이런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대종교를 중심으로 민족의식을 고양하면서 연해주와 만주 일대에 흩어진 항일 민족역량을 한데 모으며 결전의 시기에 대비해 갔다.

3·1독립선언서에 앞서 1918년 11월 길림에서 대종교 2대 교주 김교헌·김좌진·신규식 등 30여 명과 함께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 “육탄 혈전으로 독립을 완성”하자고 역설한 것도 굳은 의지의 표출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신적 지주

3·1운동이 일어나자 이동녕 선생은 상해로 건너가 임시의정원의 초대 의장을 맡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산파역을 수행했다. 그리고 통합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에 이어 국무총리와 대통령 직무 대리·주석 등을 역임하면서 20여 년 동안 임시정부를 영도했다. 김구도 ‘백범일지’에 “금일의 오인(吾人)을 있게 한 이면에는 이동녕의 지원이 있어 가능하였다”고 했듯이 선생을 부형(父兄)처럼 떠받들었다.

 상해에서 수립된 임시정부는 1932년 4월 윤봉길의 의거 이후 항주·진강·장사·광주·유주·기강 등지로 옮겨 다녔는데, 임시정부가 가는 곳에는 언제나 선생이 있었다. 고난과 시련에 처했을 때마다 최고 어른으로 정신적 기둥이 돼 임시정부를 사수했던 것이다.

 1939년 기강에 도착해 선생이 네 번째 국무위원회 주석으로 김구와 합심해 전시내각을 구성하면서 강력한 항일전의 수행을 위해 광복군 창설을 서두르게 됐다. 방법으로는 군사간부의 양성과 함께 한인교포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만주지역으로 가서 병력을 모집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이루어진 것이 조성환을 단장으로 황학수, 이준식 등과 청년공작원으로 구성된 군사특파단의 서안 파견이었다. 섬서성 서안은 화북지역을 점령한 일본군과 최전선을 형성하고 있는 곳이었고, 또한 20여 만 한인 동포들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동녕 선생은 일흔이 넘은 노구를 이끌고 김구와 함께 광복군 창설을 위해 노심초사하다가 지병인 천식이 급성폐렴으로까지 악화됐다. 결국 선생은 그렇게도 소원하던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한 채 낯선 이국 땅 기강에서 1940년 3월 13일 71세의 나이로 순국하고 말았다.

 평생을 조국광복과 민족독립에 바친 이동녕 선생이 마지막까지 외쳤던 것은 ‘대동단결’이었다. 독립 달성을 위해서는 모든 이념과 파벌을 초월한 민족의 대동단결이 무엇보다도 급선무라는 것이다. 이러한 선생의 높은 뜻은 과거의 지난 일에 그치지 않고, 오늘날 통일의 과제를 안고 사는 우리에게 살아 숨쉬는 교훈이 되고 있다.

1939년 3월 17일 기강에서 치러진 이동녕 선생 장례식.

이동녕 선생은
백범 김구 선생이 존경했던 인물 … “공정하고 사심 없는 분”

이동녕의 가족

석오는 연안 이씨다. 석오(石吾)란 호는 진사시험에 합격한 23세 때 지었다. ‘나를 돌로 생각한다’는 겸손의 의미를 갖고 있다. 25세 되던 1894년 결혼해 이듬해 첫아들 이의직을 출생했다. 이의직은 석오가 세운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사망한다. 이에 앞서 부인과 둘째 아들 이의식(1900~?) 등은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의식은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를 1회로 졸업하고 의학박사가 돼 서울에서 개원했다. 해방 후 미군정 민주의원에 뽑혔고, 반민특위 감찰관을 지냈다. 6·25 때 납북됐다. 그는 이철희(1925~1976)와 이석희(1932~ ) 등 두 아들을 뒀다. 철희씨는 미 샌프란시스코대학을 졸업하고 해방 후 귀국한다. 경무대 대통령비서관, 문교부 편수국장, 국사편찬위원회 사무국장, 서울교대 학장 등을 지냈다. 석희씨는 경기고·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대우개발 사장, 대우그룹 부회장, 대우증권 회장, 대우통신 회장(1995년)을 역임하고 은퇴했다. 현재 광복회 부회장, 이동녕선생기념사업회 부회장으로 있다.

 석오의 증손자인 용순(50)씨는 서울대 정치학과를 나와 조선일보 기자로 입사, 국제부 차장을 지냈다. 용석(46)씨는 조지워싱턴대를 졸업하고 국내에서 사업을 하고 있다.

상해임정청사 전경(1919년).

겸양의 미덕을 지닌 위인

석오에 대한 당시 주위 평가는 한결같다. 백범 김구는 “석오는 자신의 공은 숨기고 남을 칭송하는 경양의 미덕을 지닌 위인이었다”라고 했다.

 “임정에서는 늘 그분이 중심이 되어 일을 꾸몄어요. 백범(김구)도 그분 앞에 가면 그분이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윤기섭·조완구·이시영도 이동녕 그분의 의사를 존중했습니다.”(아나키스트 정화암의 회고)

 “임종을 제가 했는데 워낙 공정하고 사심이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중략) 동갑내기인 성재(이시영)와는 늘 행동을 똑같이 했고 일곱살 아래인 백범이 선생님 대우를 깍듯이 존경했던 분이 석오였습니다. 무슨 큰 일이 있을 때면 백범이 꼭 선생을 찾아와 상의했고, 그럴 때면 ‘백범, 백범’ 하면서 같이 시간가는 줄 모르고 머리를 맞대고 말씀하셨습니다.”(김의환의 부인 정정화 회고)

 정정화는 석오 말년 가족들을 대신해 모신 인물이다. 정정화는 “석오는 숨을 거둘 때까지도 깨끗하고 꼿꼿한 자태를 전혀 흐트러뜨리지 않았고 깔끔한 용모답게 공사(公私)에 있어 너저분한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고 했다.

‘남녀학생에게’

석오가 임정 내무총장으로 있던 1919년 10월, 그의 명의로 본토수복을 염원하는 포고문을 선포한다. 제1호가 고국의 청년에게 보내는 글 ‘남녀학생에게’다. 그가 살던 상하이 프랑스조계 보창로 단칸방에서 초안을 작성한 후 김구·조완구 등과 의논해 수정했다. 3·1운동의 주역인 학생들에 대한 자부심과 사랑이 글 속에 배어있다. 또 애국심을 호소하는 그 절절함이 크게 묻어난다.

 “내무총장 이동녕은 친애하는 우리 남녀학생에게 고한다. 포악한 적의 수중에 있으면서 자유를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한 제자(諸子, 모든 이)의 고결한 정신에 대해 찬탄을 금할 수 없다 (중략) 애국적 열정이 우리 2천만 동포의 흉중에 가장 비장한 자각과 결심을 일으키기에 족하기 때문에 (중략) 아(我)민족은 일본에 대하여 합병의 대죄악을 광정(바로 잡음)하는 외에는 여하한 개혁이나 선정도 요구하지 않는다 (중략) 오호라! 동포여. 조국의 위기를 구원함은 지금이다. 제자의 분기할 때가 또다시 도래하였다. (중략) 삼천리 강산에 무수한 태극국기를 게양하자!(중략) 제자를 무참하게도 적중으로 내모는 것을 생각할 때 오인(나)의 흉중은 실로 칼로 찌르는 것 같은 감이 있다 (중략) 청년 남녀 제자여. 노력하라. 국가는 의뢰한다.”

김정규 기자
도움말=김용달 독립기념관 수석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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