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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이슈 터지면 당사자 모두 만나 소통으로 해결”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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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호 08면

지난 2일 오후 5시40분(현지시간) 상파울루 엑스포 전시장. LG전자 행사장에 들어선 룰라 전 대통령은 검은색 3D 안경을 써보았다. 곁에 있던 이호(LG전자 브라질법인장) 전무가 최신형 3D TV의 기술력을 설명했다. 그러자 룰라는 “LG가 프리미엄(고급) 제품을 만드는 것도 좋지만 C클래스(A∼E계층 가운데 세 번째 계층)가 많이 쓸 중가(中價) 제품을 많이 만드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전자제품들을 보면서도 룰라의 관심은 온통 중산층·서민과 교육·복지, 소비확대에 쏠리고 있었다. 예컨대 ‘컴퓨터 네트워크 모니터’(컴퓨터 한 대로 모니터를 16개까지 연결해 쓸 수 있는 시스템)에 각별한 애착을 보인 게 그런 사례다. 브라질 업체들은 컴퓨터를 많이 팔기 위해 모니터를 2개만 연결하는 시스템을 채택하고 있다고 한다. LG 측이 이것을 시연하자 룰라는 측근들에게 “이런 걸 왜 학교에 빨리빨리 설치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저예산으로 더 많이 컴퓨터 교육을 확대할 수 있지 않느냐. 필요하면 내가 직접 얘기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브라질이 잘살려면 교육투자가 중요하다. 그래서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에게도 교육엔 아낌없이 투자해야 한다고 권유했다”고 강조했다.

룰라 전 대통령 브라질 현지 밀착 취재

룰라 전 대통령이 지난 2일 중앙SUNDAY 이양수 기자와 만나 대담을 나누고 있다.

룰라 정부가 금융위기 직후 실시한 ‘브라질 프로젝트’도 소비확대와 서민 지원 의지를 잘 말해 준다. 이 정책은 전기를 많이 먹는 구형 냉장고를 교체하면 세금을 깎아 주는 것이다. 룰라는 이날 “세금을 내렸더니 신형 냉장고를 산 뒤 구형을 버리지 않고 두 대를 쓰는 사람이 많아진 것 같다”며 폭소를 터뜨렸다. 정책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는 토로였다. 첨단 신제품을 볼 때면 가격과 용도를 먼저 묻곤 했다. 영락없는 ‘서민 지도자’였다.

룰라 리더십은 21세기 정치의 ‘신화’다. 쌀밥이 사치였던 극빈층 소년, 초등학교를 간신히 졸업한 선반공, 피델 카스트로를 존경하던 노동운동가, 대선에서 세 차례 떨어진 좌파 정치인…. 그랬던 룰라가 집권 8년간 성장과 복지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또 퇴임 무렵 87% 지지율에서 드러나듯 보수·진보를 망라하는 민심을 잡았다. 국제사회 평판은 어느 강대국의 정상 못지않다. 그는 또 야당 인사들을 중앙은행장 같은 요직에 중용하는 ‘포용 인사’를 실천해냈다.
룰라의 친화력은 대단했다. 그는 원래 제품 설명회가 진행되는 동안 별도로 마련된 VIP룸에서 머물 예정이었다. 그러나 7시쯤 본행사가 시작되자 “나도 구경하고 싶다”며 청중석으로 이동했다. 중간에 무대장치 기술진이 기념촬영을 요청하자 껄껄 웃으며 어깨동무를 했다. 그러곤 연단 앞 여섯 번째 줄에 마련된 예약석에 턱 앉더니 주변 사람들과 악수를 하기 시작했다. 행사장에는 1000여 명이 들어와 있었다. 갑작스러운 룰라의 출현에 사진기 플래시가 터지기 시작했다. 그는 시종 미소를 띤 채 사람들을 맞이했다. 그런 소탈한 모습들은 두 달 전 그가 최고 권력자였다는 사실을 잊게 만들었다.

룰라 전 대통령이 LG전자가 브라질 시장에 새로 출시한 노트북 컴퓨터를 살펴보고 있다.

룰라의 진면목은 뒤이어 펼쳐진 50분간의 연설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연설 초반 30분 동안엔 준비된 원고 20여 장을 넘겨가며 업적들을 하나씩 열거했다. 굵은 바리톤의 목소리와 군더더기 없는 리드미컬한 연설에서 포르투갈어의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연설 도중 강조할 부분이 있으면 그는 원고를 오른손에 쥔 채 왼손과 얼굴과 온몸으로 보디 랭귀지를 구사했다. 가히 대중연설의 천재였다. 그중에서도 두 손의 검지를 치켜들었다 아래로 힘차게 내리꽂는 제스처는 일품이었다. 담담히 듣고 있던 청중은 웃음과 박수, 환호로 뜨거워져 갔다. 원고 없는 연설은 즉흥적인 유머와 순발력이 돋보였다. 청중들은 기립박수로 그를 환송했다.

다음은 룰라 전 대통령과의 면담 내용과 그가 전시회장에서 한 발언, 연설 내용 등을 일문일답 방식으로 정리한 것이다. 당시 룰라는 ‘카니발 휴가(7∼9일) 때까지 언론 인터뷰와 공식 활동을 일절 하지 않겠다’고 선언해 놓은 상태였다. (※표시는 독자 이해를 돕기 위한 설명)

-취임 초 60%였던 지지율이 지난해 임기를 끝낼 때 87%를 기록했다. 성공적인 리더십의 비결은 무엇인가.
“개방적인 소통(open communication)이 중요합니다. 나는 복잡하고 첨예한 이슈가 발생하면 당사자들을 모두 만나 대화하고 소통했습니다. 당사자가 없을 땐 이해관계자들을 두루 만났습니다. 민주주의 방식을 100% 따랐다고 자부합니다. 그 결과 빈곤 퇴치와 경제 성장이란 목표를 어느 정도 달성했다고 봅니다. 임기 8년간 2800만 명이 극빈층에서 벗어났으며 일자리 2000만 개가 창출됐습니다. 지난해 외국인투자는 678억 달러였고, 실질 성장률은 7%를 넘었습니다.”

-성장과 복지의 충돌을 어떻게 극복했나.
“성장과 분배는 같이 나가야 합니다. 브라질 경제는 지난해 중국·인도에 비견될 만큼 성장했습니다. 중산층·서민의 구매력을 높여주면 경제가 활성화될 수 있습니다. 재임 시절 나는 브라질은행(민간은행)에 자동차 할부판매를 위한 신용대출을 하도록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은행 측에선 난색을 표명했죠. 2∼3년 뒤에나 하겠다는 걸 곧바로 실시토록 설득했습니다. 나는 글로벌 금융위기 속에서도 저소득층 지원 프로그램을 확대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제품을 사지 않으면 여러분이 일자리를 잃을 확률이 커진다’며 소비 촉진을 권유했지요. 성장을 위해선 소비 확대가 필요합니다.”

-빈곤층 지원정책은 얼마나 성공했다고 보나.
“내가 가족지원금 제도(Bolsa Familia)를 만들어 빈곤 가정에 최소 85헤알(약 5만7000원)을 지원할 때 사람들은 ‘돈으로 표를 사는 것’ ‘거지에게 동냥을 주는 것’이라고 빈정거렸습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죠. 부자에겐 하루 저녁 술값이겠지만 가난한 사람에겐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큰돈입니다. 이들이 식료품을 사고 자녀 학용품을 사면 경제도 활성화되고 민주주의도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몇몇 사람에게 수억 헤알을 지원해 그들이 은행 이자나 받아먹고 사는 것보다 훨씬 낫지 않을까요?”(※브라질 인구 4분의 1이 이 제도의 혜택을 받고 있다. 최빈곤층은 월 10만원쯤 지원받는다. 문맹·질병 퇴치와 소비 진작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브라질의 빈부격차는 세계 최악이지만 룰라 집권기간에 최저임금은 74%나 올랐다.)

-당신은 좌파 출신인데 시장경제를 중시하는 것 같다.
“나를 사회주의자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은데 인류 역사상 세계 최대의 기업공개가 어디에서 이뤄졌는지 알아보세요. 바로 상파울루 주식시장에서 페트로브라스(브라질 국영 석유회사)가 신주 발행을 통해 700억 달러를 모은 것입니다. 경제에는 우연이나 기적이 없죠. 현실적인 정책 결정이 필요할 뿐입니다.”

-퇴임 후 세운 ‘룰라 재단’의 활동방향은. 전직 대통령인데 정치를 재개할 것인가.
“브라질의 민주화운동을 기리기 위한 민주주의 박물관(Museum of Democracy)을 설립하려 합니다. 소외계층을 돕기 위한 사회활동은 계속할 것입니다. 이달 중순 다보스 포럼에 참석하는 게 첫 번째 공식 행선지가 될 겁니다. 주말이면 가족·친구와 함께 고기를 굽고 맥주를 마시면서 코린치안즈(※룰라가 응원하는 프로축구팀)가 골을 넣는 걸 볼 수 있는 나라, 이것이 브라질입니다.”(※정치재개 여부에 대해선 직접적인 언급을 피했다.)

-당신은 임기 중 ‘위대한 브라질’을 표방했다. 브릭스(BRICs) 시대가 언제쯤 올 것이라고 보나.
“2003년부터 7년간 브릭스 4개국 간의 교역액은 다섯 배쯤 늘어났습니다. 브릭스가 세계경제 성장에 기여하는 비율이 65%나 된다고 합니다. 브라질 국민은 어느 나라에 대해서도 열등감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2003년 주요 8개국(G8) 정상회의에 처음 참석했을 때입니다. 회의장에 들어갔더니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 메르켈 독일 총리 등이 모두 앉아 있더군요. 그런데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들어오니까 다들 일어나기에 나는 기분이 상해 그대로 앉아있었죠. 그랬더니 부시가 내게 다가와 먼저 인사를 하더군요. 브라질 사람들도 이제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앞날이 아무리 캄캄해도 낙관적으로 뭔가를 시도해야죠. 한국이 과거 일본에 대해 열등감을 가졌더라면 오늘날처럼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당당하게 나아간 게 발전의 원동력이 됐다고 봅니다.”

-한국을 두 차례 방문한 인상은 어땠는가.
“브라질도 한국처럼 교육 투자를 많이 해 경제를 발전시켜야 합니다. 나는 임기 중 교육 분야 예산을 증액하고 기술전문대학 110여 곳을 설립했습니다. 가난한 학생들도 이젠 장기 저리로 학자금 대출을 받을 수 있습니다. 또 메디컬대학 학생이 원할 경우 학비를 면제하는 대신 졸업 후 공익봉사를 시키는 게 바람직합니다. 그러려면 정부가 지원자금을 많이 확보해야죠. 지난해 11월 한국에 갔을 땐 너무 급하게 다녀와 한국 지도자를 많이 못 만나 아쉽습니다.”

-LG·삼성·현대 등 한국 기업들의 브라질 진출이 활발하다. 당신이 퇴임 뒤 첫 번째 공식 행사로 LG 행사에 참석한 이유는 무엇인가.
“LG는 2003년 내가 대통령에 취임한 뒤 브라질과 우리 정부를 믿고 투자를 늘리고 휴대전화 공장을 세웠습니다. 그 결과 LG는 더 크게 발전했고요. 그래서 나는 LG를 가장 좋아합니다.(웃음)” (룰라는 2005년 타우바테 지방에 세운 LG 휴대전화 공장 준공식에 참석한 바 있다. 현지 언론들은 LG가 2일 행사에 룰라가 참석한 데 대한 보답으로 ‘룰라 재단’에 30만 헤알(약 2억원)을 기부했다고 보도했다.)

-8년 임기를 마친 뒤에도 건강하게 활동하는 비결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대통령 직에 있을 때는 헬스 트레이너의 지도에 따라 운동을 했습니다. 요즘엔 아내와 함께 날마다 한 시간쯤 아침 산책을 하는 게 전부입니다.” (※룰라는 1990년대 후반부터 몸무게 때문에 다이어트와 함께 가벼운 운동을 병행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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