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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종교개혁 500년, 그 현장을 가다 [상] 개혁의 밀알 - 체코의 후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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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체코 프라하의 구시가지 광장에는 종교개혁자 얀 후스의 동상이 서 있다. 후스는 부패한 중세 교회에 반기를 들다가 화형을 당했다. 동상 오른편에 후스가 사제로 있었던 틴 성당이 보인다.


독일 정부에서 5년 전에 설문조사를 했다. “세계사의 흐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독일인은 누구인가”를 물었다. 1위에 오른 인물은 괴테도, 베토벤도, 헤겔도, 히틀러도 아니었다. 마르틴 루터(1483~1546)였다. 중세 때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주인공이다. 2017년 ‘루터의 종교개혁’이 500주년을 맞는다. ‘개신교’가 등장한 지 반(半) 1000년이 된다. 3~10일 500년 전의 종교개혁지를 순례했다. 그들이 전하는 개혁의 메시지는 지금도 유효했다. 요즘 한국 교회를 향한 외침이기도 했다. 3회 시리즈를 싣는다.

3일 체코의 프라하로 갔다. 1968년 민주화 시위 ‘프라하의 봄’으로 유명한 도시다. 종교개혁사에서도 프라하는 빼놓을 수 없다. 600년 전 이곳에서 미완의 종교개혁인 ‘중세의 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실패한 봄이었다. 하지만 유럽 전역에 종교개혁을 일으킨 밀알이 됐다.

 프라하는 꽤 쌀쌀했다. 중세의 봄도 그런 추위 앞에서 고꾸라졌다. 그 자취를 좇아 프라하 구시가지 광장으로 갔다. 외국 관광객 200여 명이 대형 시계탑 앞에 모여 있었다. 600년 전에 만든 시계다. 정오가 되자 종이 울렸다. 태엽 소리와 함께 ‘28초의 짧은 공연’이 시작됐다. 시계에 설치된 12사도와 해골 등 인형들이 저마다 메시지를 안고서 움직였다.

 현지 가이드는 “해골은 죽음을, 해골이 들고 있는 모래시계는 삶의 유한성을 상징한다. 정오를 알리는 나팔소리는 ‘회개하라’는 메시지다”라고 설명했다. 거기서 중세 유럽이 보였다. 중세는 종교가 지배하는 사회였다. 성직자든, 귀족이든, 농노든 마찬가지였다. “내 죄를 어떻게 풀 것인가?”는 당시 모든 이의 숙제였다. 그런 ‘숙제 의식’을 바탕으로 면죄부가 등장했다.

◆왜 면죄부가 팔렸을까=중세 때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었다. 유럽 인구 중 거의 반이 죽었다. 중세인은 ‘흑사병이 전염병’임을 몰랐다. 죄로 인해 병에 걸리고, 죄로 인해 죽는 줄 알았다. 그 틈을 교회가 파고들었다. 로마 교황은 면죄부를 팔았다. 숱한 사람이 돈을 주고 그걸 샀다. 현대인에겐 ‘상식 밖의 일’이다.

 면죄부의 시초는 십자군 원정이었다. 교황은 “십자군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죄가 아니다. 아울러 네가 지은 다른 죄까지 사해진다”며 면죄부를 발급했다. 면죄부는 전쟁을 위한 용도였다.

 시간이 흐르자 그게 악용됐다. 교황 요한 23세는 “누구나 면죄부를 살 수 있다. 조상을 위해 면죄부를 사도 된다. 그럼 죽은 조상이 연옥에서 천국으로 옮겨가게 된다”고 말했다. “마음을 가난하게 하라”는 예수의 메시지와 동떨어진 주장이었다. 그만큼 중세 가톨릭 교회는 부패하고, 타락했다.

 독일에서 신학을 공부한 신국일(프랑크푸르트 슈발바흐 성령교회 담임) 목사는 “한국에서 젊은이들이 결혼하면 무엇을 준비하나. 허리 졸라매서 내 집을 먼저 마련한다. 중세에는 젊은이든, 노인이든 돈을 벌어서 가장 먼저 할 일이 ‘면죄부 구입’이었다. 자연스럽고, 당연한 상식으로 받아들여졌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면죄부는 뭘까. 행여 우리는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며 21세기의 면죄부를 팔고 있는 건 아닐까. 금권 선거로 얼룩진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와 교단 총회장 선거, 원로 목사와 후임 목사의 권력투쟁, 이권을 둘러싼 교회 내 분열과 갈등, 자식에게 세습을 했거나 세습을 준비 중인 덩치 큰 교회들 등등, 일부 한국 개신교계의 곪은 풍경이 역설적으로 ‘중세 가톨릭’에서 보였다.

◆얀 후스가 뿌린 씨앗=프라하 구시가지 광장을 걷다가 커다란 동상과 마주쳤다. 600년 전 프라하의 저명한 신학자이자 가톨릭 사제였던 얀 후스(1369~1415)다. 그는 프라하 대학 총장까지 지냈다. 동상은 광장 뒤편의 틴 성당을 바라보고 있었다. 체코인들은 “저 성당에서 종교개혁이 탄생했다”며 자랑스러워 했다.

 후스는 교황을 정면 비판했다. 심지어 “면죄부를 파는 교황은 가롯 유다와 같다”고 선언했다. 유다는 예수를 유대인의 손에 팔아 넘겨 숨지게 했었다. ‘교황은 절대 오류가 없다’는 교황무오설을 철칙으로 여기던 로마 가톨릭에선 죽음을 각오할 정도의 발언이었다.

 그 용기의 뿌리는 어디였을까. 종교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우리는 종교를 통해 달을 봐야 한다. 예수를 보고, 그리스도를 봐야 한다. 그러나 손가락은 종종 달을 치운다. 그리고 스스로 주인공이 된다. 중세의 가톨릭도 그랬다. 예수를 치우고 교회가 주인공이 됐다. 후스는 그런 손가락과 싸웠다. 오직 예수, 오직 달을 보려고 했다.

 결국 교황은 후스를 파문했다. 후스의 저술은 불태워졌다. 대신 후스는 일부 귀족의 지지를 받았다. 프라하에서 그의 설교는 계속됐다. 당시 라틴어는 귀족과 지식인들의 전유물이었다. 서민들은 라틴어를 몰랐다. 성당의 미사와 강론은 라틴어로만 진행됐다. 후스는 거기에도 반기를 들었다. 체코어로 설교했고, 사람들은 환호했다. 후스는 대설교가가 됐다.

 후스의 동상 아래에 섰다. 찬 바람이 불었다. 묻고 싶었다. 지금의 우리는 어떤가. 종교의 이름으로, 교회의 이름으로, 목회자의 이름으로 예수를 가리고 있진 않은가. 예수는 늘 내가 무너질 때 사는 법이다. 종교개혁의 뿌리도 바로 그것이다. “성경으로 돌아가자”“예수로 돌아가자”는 중세 때의 외침도 그것이다. ‘교회’가 예수를 왜곡하는 굴절렌즈가 돼버렸으니 다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다.

 개신교는 그렇게 탄생했다. 이제 한국 교회는 다시 그 물음 앞에 서야 하지 않을까. “행여 우리가 예수를 굴절시키던 중세의 렌즈가 돼있진 않은가” 하는 물음 말이다.

◆100년 안에 백조가 온다=신성로마제국 지기스문트 황제는 후스를 콘스탄스(독일 남부) 종교재판에 소환했다. 사람들은 “가면 죽일 것”이라고 말렸다. 황제는 두 번이나 사신을 보내 “이 땅에서 이단 정죄(定罪)가 사라지게 만들겠다”며 안전을 약속했다. 결국 종교재판 회의에 간 후스는 체포됐다. 석 달간 감옥에 갇혔다. 낮에는 걸어야 했고, 밤에는 벽에 묶여야 했다. 지독한 치질과 두통도 겪었다. 그리고 이단 정죄와 함께 화형 선고를 받았다.

 1415년 7월 16일, 후스는 화형장에 끌려 나왔다. 그는 황제를 향해 종교개혁의 정당성에 대해 설교했다. 황제는 얼굴이 붉어지면서 아무 말도 못했다고 한다.

 ‘후스’는 체코어로 ‘거위’란 뜻이다. 화형대에 불이 붙기 직전 후스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지금 거위 한 마리를 불태워 죽인다. 그러나 100년이 지나지 않아 백조가 나타날 것이다.” 자신이 심은 개혁의 불씨가 100년 안에 거대한 불길로 타오를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실제 거의 100년 만에 ‘백조’가 나타났다.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다. 후스가 화형 당한 게 1415년,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난 게 1517년이다. 유럽은 물론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던 루터는 지금도 독일에서 ‘백조(Swan)’로 불린다. 그 ‘백조’를 만나기 위해 독일로 건너갔다.

프라하=글·사진 백성호 기자

◆얀 후스=영국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았던 체코의 종교개혁자. 프라하 대학의 신학부 교수이자 가톨릭 사제였다. 면죄부 판매 등에 대해 교황청에 반기를 들다가 파문당했다. 설교를 어려운 라틴어로 하지 않고 체코어로 바꾸는 등 파격적인 개혁을 시도했다. 결국 종교재판에서 이단으로 몰려 화형에 처해졌다. 순교 후 후스는 체코에서 민족의 영웅이 됐다. 그의 종교개혁 사상은 독일의 루터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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