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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의료민영화 덫에 걸린 민영의료보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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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한기정
서울대 법대 교수

지난해 말 세브란스병원 등 국내 의료기관 5곳이 국제 의료보험 회사인 MSH 차이나와 진료비 지급 계약을 체결했다. MSH 차이나 가입자들이 한국 병원에서 진료를 받으면 한국 병원에 비용을 낸 뒤 MSH 차이나에서 돌려받는 불편을 겪어 왔는데, 이 계약으로 병원이 진료비를 MSH 차이나에 청구하고 환자는 진료비를 따로 내지 않게 됐다는 설명이다. <중앙일보 2010년 11월 29일자>

 이 기사를 읽은 우리나라 민영의료보험 가입자들은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원래 병원에 진료비를 낸 다음 보험회사에서 돌려받는 것이 아니었던가?” 맞다. 우리나라 민영의료보험 가입자들은 병원에 돈을 내고 서류를 받아 다시 보험회사에 돈을 청구한다. 진료비가 소액인 경우에는 절차가 번거로워 보험금 청구를 포기하기도 한다.

 외국에선 대부분 그렇지 않다. 민영의료보험의 경우 보험회사가 병원과 계약을 맺고 병원에 직접 진료비를 지급한다. 왜 우리나라는 불편하게 돼 있나. 보험회사와 병원 사이의 계약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의료법은 ‘환자를 의료기관에 알선·소개하는 행위’를 금지한다. 보험회사가 특정 병원과 계약을 맺고 보험가입자를 해당 병원에서 진료받도록 하면 ‘알선·소개 행위’에 해당된다.

 이런 규제는 보험소비자의 불편을 초래한다. 보험소비자 분쟁의 원인도 된다. 최근 보험회사에서 ‘진료비가 과다하다’는 이유로 보험금 지급을 거부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진료행위의 가격과 범위에 대해 보험회사와 병원이 미리 합의해 두었다면 생기지 않을 다툼이다. 실질적으로는 보험회사와 병원 사이의 분쟁인데, 피해를 보는 것은 애꿎은 소비자다. 이러한 문제에 따라 노무현 정부 시절 보험회사와 병원 사이의 가격계약을 허용하는 의료법 개정안이 발의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개정 내용이 ‘의료민영화’라고 주장하는 반대론에 부딪혀 무산됐다.

 최근 정치권에서의 복지 논쟁의 초점이 의료 문제로 옮겨 가고 있다. ‘무상의료’라는 구호가 무성하다. 국민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주장이다. 우려스러운 점이 많다. 일부 정치권의 주장이 민영의료보험의 고유한 역할과 기능을 부정하고 있다. 민영의료보험을 활성화하려는 시도를 ‘의료민영화’라며 배척한다.

 국민건강보험 확대를 주장하는 쪽에서는 “민영의료보험 활성화가 국민건강보험 위축과 의료공공성 약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이유로 민영의료보험 활성화에 반대한다. 그러나 민영의료보험은 국민건강보험으로 보장받지 못하는 비급여 진료에 한정돼 있다. 보험회사와 병원 사이의 계약을 허용하는 것이 의료공공성의 약화를 초래한다는 주장은 지나친 논리적 비약이다. 국민건강보험 강화와 민영의료보험의 활성화는 결코 대척점에 서 있지 않다. 공(公)보험과 사(私)보험의 역할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간 민영의료보험은 급속도로 성장했다. 전체 가구의 4분의 3이 민영의료보험에 가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료민영화’라는 반대론 때문에 걸맞은 제도 정비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노령화 사회로 새 의료기술과 신약에 대한 수요는 날로 늘고 있다. 그러나 고가의 신기술은 공보험으로 보장할 수 없다. 전 국민이 재원을 나누어 부담하는 사회보험의 원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민영의료보험의 적절한 뒷받침이 없으면 선진 의료기술은 소수 부유층의 전유물이 될 것이다. 중산층 서민도 새로운 의료기술에 접근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민영의료보험 제도를 정비하고 소비자의 편의성이 제고되어야 한다.

 필수적이고 표준적인 의료서비스는 공보험이, 새롭고 다양한 의료서비스에 대한 수요는 사보험이 맡는 식으로 역할을 배분해야 한다. 민영의료보험이 활성화돼 새로운 의료서비스에 충분한 재원이 조달되어야만 의료산업의 발전과 경쟁력 강화도 가능하다. 합리적이고 구체적인 제도 정비가 필요하다.

한기정 서울대 법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