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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연예인은 ‘21세기형 정치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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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21st-Century Statesman
요즘 같은 트위터 시대엔 ‘스타 파워’가 막강한 외교 무기다.
할리우드 인기배우인 조지 클루니는 자신의 명성을 활용해 수단에 희망을 주는 데 일조했다

뉴스위크 할리우드는 2월 27일 아카데미상 발표를 앞두고 치열한 막판 경쟁에 열을 올린다. 하지만 조지 클루니의 관심은 아주 먼 곳에 가 있다. 정확히 1만4500km 떨어진 곳이다. 이 관록 있는 배우는 이번 시상식에서 레드 카펫을 밟고 나가 한 부문의 수상자를 발표할 예정이지만 후보에 오른 자신의 작품은 없다. 그의 마음속에는 아카데미상과는 무관한 다른 드라마가 자리 잡았다.

지난 1월 클루니는 그동안 여러 번 찾았던 남(南)수단으로 돌아갔다. 그곳 사람들이 20년간의 내전을 끝내고 평화로운 방법으로 북(北)수단의 하르툼 정부로부터 분리독립을 얻도록 자신의 스타 파워를 활용하려는 의도였다. 클루니는 지난 5년간 수단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면서 자신의 새로운 역할을 찾았다. ‘21세기형 인기연예인 정치가’를 말한다.

자신의 명성을 활용해 사람들이 그 명성보다 더 중요한 문제에 관심을 갖도록 하려는 힘들고도 야심 찬 일이다. 지난 1월 남수단이 국민투표로 분리독립을 결정하자 북아프리카와 아랍의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봉기가 들불처럼 일어났다. 그 결과 오랜 독재체제에서 지도부가 권력을 잃고 그 국가들은 더 넓은 국민참여 정치로 탈바꿈하는 중이다. 인터넷을 통한 소셜 네트워킹이 형성한 새로운 환경에서 인기연예인의 명성은 아주 강한 힘을 발휘한다. 선출된 지도자나 일부 국가보다 대중의 논의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요즘은 휴대전화와 인터넷 때문에 독재정권의 존립이 더 힘들어졌다”고 클루니가 말했다. “인기연예인이 나서면 언론도 지금까지 책무를 다하지 못한 곳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우리 배우들이 정책을 만들진 못한다. 하지만 어느 때보다 정치인들에게 행동하도록 압력을 가하기가 쉽다.”

클루니는 몇 주 전 남수단에서 AK47소총을 든 10대 병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흰색 픽업 차량을 타고 붉은 먼지투성이 도로를 달렸다. LA는 지구 반대편에 있었다. 그런데도 그의 마음은 파파라치에 가 있었다. “아무튼 그들이 나를 뒤쫓을 생각이 있다면 여기서도 나를 따라오기 바란다”고 클루니가 말했다.

클루니는 남수단의 역사적인 국민투표 전날 밤 아비에이를 돌아봤다. 남북 수단 간 경계에 위치하며 석유 매장량이 많아 양측이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는 곳이다. 이레 후 투표 결과가 발표됐다. 그에 따라 아프리카 최대 국가인 수단이 두 개의 독립국가로 분리될 예정이다. 21세기의 첫 대량학살로 기록된 다르푸르 사태를 포함해 20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은 뒤에야 드디어 남수단이 독립의 길로 들어섰다. 3개월 전만 해도 불가능해 보였던 결과다. 여러 관측통에 따르면 바로 그 일에 클루니가 중심 역할을 했다.

조지 클루니의 영화를 본 아비에이 주민은 없다. 하지만 그는 여러 차례의 아프리카 여행을 통해 이곳에서 신망을 얻었다. 대부분은 대량학살 종식 운동을 벌이는 시민단체 ‘이너프 프로젝트(Enough Project)’의 공동 설립자 존 프렌더개스트와 함께 여행했다. 이곳의 각 분파에 클루니는 관료주의에 제약을 받지 않고서도 권력에 접근하고 마을 주민의 목소리가 세계에 들리도록 증폭시킬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비친다.

인기연예인 정치가의 역할은 자유계약 외교관과 비슷하다. 정책 전문가의 도움을 받고 정책을 사전에 공부해야 한다. 하지만 과거 사회운동가로 활약한 스타들보다 더 실용적이다. 요즘 연예인 정치가들은 권력의 지렛대를 활용해 문제를 해결한다. 예를 들어 클루니는 통화할 때 휴대전화의 단축키를 사용할 정도로 수단의 반군 지도자들과 가깝다. 그는 현지 무장대원들이 AK47 소총으로 가슴을 밀치는 일을 당하기도 했다. 영화 촬영장에 있을 때는 e-메일로 매일 수단의 상황을 전달받는다.

이제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위성까지 확보했다. 민간 자본으로 구입한 이 위성으로 확보한 사진은 제한 없이 공개되며(SatSentinel.org) 남-북 수단 간 경계 지역의 군사 움직임을 감시하는 용도로 활용된다. 그 지역은 말 그대로 ‘화약고’다. 미 국가정보국(DNI)은 1년 전 그 지역을 “새로운 대량학살이 일어날 가능성이 지구상에서 가장 큰 곳”이라고 규정했다. “나는 유엔이나 미국 정부 소속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달리 제약을 받지 않는다”고 클루니가 말했다. “나에겐 770km 상공에 카메라가 있다. 대량학살 반대운동을 하는 파파라치라고 불러달라.”

북수단의 이슬람주의 정부를 이끄는 오마르 알바시르 대통령이 클루니의 떠들썩한 방문을 달가워할 리 없다(알바시르는 국제형사재판소에 의해 전쟁범죄로 기소됐다). 위성 확보 소식이 전해지자 북수단 정부는 클루니가 “평화 정착과 아무 상관없는 다른 속셈을 가졌다”는 보도자료를 냈다. 하지만 세계 언론에선 그런 한 쪽짜리 보도자료가 클루니의 각광받는 아프리카 방문에 비교가 되지 않는다.

클루니는 카키색 엑스오피시오(기능성 의류 브랜드) 조끼, 흰색 사파리 셔츠, 경량 바지, 낡은 등산화 차림이다.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외교관처럼 보이지도 않고 그렇게 행동하지도 않는다. 영화에서보다 더 야위었고, 약간 키가 작으며, 얼굴은 햇볕에 그을렸고, 희끗희끗한 수염이 꽤 자란 모습이다. 오는 5월이면 만 50세다. 실제로 의미 있는 일에 시간을 쓰겠다고 작심한 인상을 풍긴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니컬러스 크리스토프는 이렇게 평했다. “대량학살이든 질병이든 굶주림이든 대중의 관심을 집중시키면 사람의 목숨을 구한다. 그게 진실이다. 인기연예인은 그런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문제를 해결하도록 정치적 의지를 이끌어낼 능력이 있다.”

클루니는 2005년 크리스토프가 쓴 여러 편의 다르푸르 관련 칼럼을 읽었다. “아카데미상 시즌이 막 끝난 시점이었다. 내 작품 두 편이 후보에 올라 아양을 떨며 홍보하느라 바빴다. 시상식이 끝나자 마음이 불결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마음을 정화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클루니는 아버지 닉(켄터키 출신의 기자였다)이 국제 뉴스가 인기 스타들의 가십에 가려버릴 때 몹시 화를 냈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그래서 아버지와 동행한 첫 수단 여행에서 심각하고 마냥 진지한 외교에 인기와 명성이라는 달콤한 당의정을 입혀보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인도주의 위기에 무턱대고 뛰어들면 위험천만하다는 사실을 곧 깨달았다. 아버지와 함께 머문 난민촌에 그는 우물, 오두막, 주민센터를 지을 돈을 기부했다. “바로 1년 뒤 이웃마을 주민들이 그 우물과 오두막을 차지하려고 사람들을 죽였다”고 클루니가 잦아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도 물과 거처가 필요했다. 정말 끔찍했다. 도움을 계속 줘야 하지만 매우 신중해야 한다. 돈을 기부한다고 해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존 프렌더개스트는 인기연예인 사회운동가들을 널리 알리는 일로 칭찬도 받고 지탄도 받는다. 클린턴 대통령 시절 국가안보회의(NSC) 아프리카 담당을 지낸 프렌더개스트는 운동화를 신고 어깨까지 내려오는 희끗희끗한 머리를 하고 이곳저곳을 누빈다. 2003년 앤절리나 졸리와 콩고를 방문한 일이 피플지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프렌더개스트는 효과 있는 구호운동의 공식을 발견했다. 그래서 클루니와 손잡고 록그룹 U2의 보노와 컬럼비아대 지구연구소의 제프리 삭스 교수가 만든 틀을 활용해 활동에 나섰다. 보노와 삭스는 제3세계의 부채 탕감과 표적화된 구호를 통해 아프리카의 극단적 빈곤을 덜어주는 운동을 홍보했다. 동시에 그들은 부시 행정부에 압력을 넣어 에이즈 치료제 확보를 위한 보조금을 늘리도록 했다.

“보노의 모델이 잘 먹혀들었다”고 클루니가 말했다. “요즘은 어느 때보다 스타연예인에게 관심이 많다. 그런 인기는 상품 판매 외에도 분명히 다른 용도가 있다.” 브래드 피트(허리케인 카트리나 이재민 구호), 벤 애플렉(콩고 구호), 숀 펜(아이티 지진 구호) 같은 스타가 그 뒤를 이었다. “요즘 영화계에서 떠오르는 젊은 배우들은 단순히 참여만 하지 않고 무엇이 문제인지 잘 알며 그런 지식을 팬들과 공유한다”고 클루니가 말했다. 이젠 그냥 ‘평화 운동가’가 아니다. 각자의 전공이 따로 있다.

클루니가 수단에 관심의 초점을 맞추자 미국 정부의 고위 정책입안자들은 매우 기뻤다. 그들은 클루니가 주는 정보와 그가 불러일으키는 관심으로 큰 도움을 얻는다. 클루니는 미 상원 외교위원회와 유엔안보리에서 수단 사태와 관련해 브리핑했다. 대통령이 친구라는 사실도 큰 장점이다. 클루니와 버락 오바마는 1961년생 동갑으로 다르푸르 사태에서 처음 함께 일했다. 오바마는 백악관에서 클루니를 처음 만나본 뒤 그의 조언에 따라 수단 특사를 임명했다. 지난해 10월의 두 번째 만남은 존 케리 상원의원의 하르툼에 파견으로 이어졌다. “자신을 비추는 스포트라이트가 사라져도 클루니는 계속 수단에 관심을 가지면서 여당과 야당을 가리지 않고 정책입안자들과 협력한다”고 보수주의자인 샘 브라운백 캔자스 주지사가 말했다. 케리 상원의원은 클루니와 프렌더개스트를 두고 “그들이 미국 관리 어느 누구보다 아비에이 현장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말했다. “백악관도 그들의 말을 귀담아 듣는다.”

클루니는 다음 영화 ‘아이즈 오브 마치(The Ides of March: 3월 15일을 가리키는 말로 카이사르 암살이 예언된 날이라는 뜻에서 흉사의 경고를 말한다)’에서 결함투성이의 대통령 후보를 연기한다. 자신이 대본도 함께 쓰고 직접 감독하며 자신이 대통령 후보에게서 듣고 싶은 말을 대사로 만들었다. 하지만 민주당 캘리포니아 지부의 간헐적인 러브콜에도 불구하고 클루니는 기존 정치판의 제약을 거부해 왔다. “그동안 정치를 할 자격이 있을 만큼 바르게 살지 않았다”고 클루니는 남수단 수도 주바의 센트럴 펍 테라스에 앉아 피자를 게걸스럽게 먹으며 말했다. “수많은 여자와 잤고 마약도 많이 했다. 사실이다. 똑똑한 후보라면 처음부터 ‘그렇다, 주색잡기를 많이 했다. 마리화나를 물담배로 피우며 그 물까지 마셨다. 이젠 정책에 대해 이야기하자’라고 말할 거다. 만약 내가 정치를 한다면 나의 유세 구호를 아예 그렇게 정하겠다. ‘마리화나를 물담배로 피우며 그 물까지 마셨다’고 말이다.”

일대 일로 만나면 클루니는 재미있고 상냥하고 열정적이고 소탈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기자의 아들’임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확실히 그는 남자답고 대범하다. 짓궂은 장난을 잘 치고 표정까지 영락없이 이야기꾼이다. 술을 마시며 밤 늦게까지 이야기하길 즐긴다. 하지만 아침엔 누구보다 일찍 일어난다. 4시간만 자도 된다는 그의 말에서 자신보다는 일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이 배어난다.

클루니의 공공외교 전략은 영화 홍보를 본보기로 한다. “먼저 사람들을 극장으로 끌어들여야 한다”고 클루니가 말했다. “간결하고 명확한 문구가 비결이다. 포스터에 올리는 한 줄의 짧은 문장으로 명확한 의미가 전달돼야 한다. ‘전쟁을 시작되기 전에 막을 수 있습니다’ 또는 ‘제2의 다르푸르 사태를 막을 기회가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런 식이다.”

“오랫동안 매일매일 관심을 갖기는 매우 어렵다”고 클루니가 말했다. “그 점에서 배우가 유리하다. 영화를 한 편 찍으면 한동안 사라져도 된다. 존과 나는 그렇게 하려고 한다. 서너 달마다 관심을 되살릴 새로운 무엇을 갖고 돌아가려고 한다.” 그러면서 클루니는 수단 문제에 미국인의 지속적인 관심을 유도하려면 인기 드라마 ‘위기의 주부들’ 수단판을 만들 필요가 있을지 모른다고 우스개를 했다.

오두막과 붉은 아카시아 나무가 흩어진 메마른 평원을 차를 타고 가로지른 뒤 우리는 기관총을 탑재한 지프에 탄 군인이 경비를 서는 한 마을에 도착했다. 초가 지붕의 오두막에 들어서자 아비에이 행정관 뎅 아로프와 응곡 딩카 족장 쿠올 뎅이 클루니를 반갑게 맞으며 일행에게 앉으라고 손짓했다. “우리가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요?”라고 클루니가 물었다. 그러곤 그들의 말을 들었다.

그들에 따르면 주민의 사기가 떨어졌고 북수단과 손잡은 이웃 유목민 미세리야족과 긴장이 팽팽했다. 응곡 딩카족이 남수단과 독자적으로 연합을 선언하겠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면 새로운 내전이 발생할지 모른다. 클루니와 프렌더개스트는 두 시간에 걸쳐 그들을 진정시키며 아비에이의 우려를 남수단 정부와 미국에 꼭 전하겠다고 약속했다. 클루니가 오두막을 나서자 CNN과 스카이뉴스(영국의 위성방송)의 카메라가 기다리고 있었다. 가장 가까운 도시가 약 900km나 떨어졌고 포장도로도 상하수도 시설도 없는 곳이지만 클루니가 아비에이로 행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 방송사들이 카메라를 보냈다.

그 다음 우리는 메작 만요레로 알려진 ‘귀향자’ 캠프로 향했다. 진흙 벌판 위에 벽이 없는 방들이 있었다. 침대와 탁자, 의자가 마치 과거 집주인이 살았을 때 놓였던 듯이 배열돼 있었다. 지난 4개월 동안 독립의 기대를 안고 북수단을 떠나 남쪽으로 돌아온 4만 가구 중 일부 가족이 그곳에 기거하고 있었다. 이제 그들은 임자 없는 땅에서 지붕도 없이 가재도구를 늘어놓고 살아간다. 맨발의 아이들이 클루니를 이리저리 따라다녔다. 어떤 때는 다정한 표정, 어떤 때는 겁 먹은 표정이었다. 몇몇은 병색이 짙은 아기를 안고 있었다.

클루니가 그곳을 둘러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들은 가진 모든 가재도구를 꾸려 이곳에 왔다.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열렬한 희망 때문이다. 가족의 절반이 목숨을 잃어 갈 곳 없는 사람들이 모여든 난민촌은 많이 가봤다. 하지만 이들은 역사적인 사건의 일부가 되기를 원해서 이곳에 왔다. 그들은 일이 잘 풀리리라 믿는다.” 하지만 바로 그날 그곳에서 3.2km 떨어진 응곡 딩카족의 한 마을을 미세리야 민병대가 습격해 경관을 포함해 부족민이 30명 넘게 숨졌다. 결국 그들도 80명 이상의 희생자를 내고 퇴각했다.

클루니의 그날 밤 침대는 아비에이의 구호요원들이 지내는 숙소의 휴대용 침낭이었다. 그는 플라스틱 가구에 걸터앉아 건물 잔해가 흩어진 마당 위로 해가 지는 동안 미지근한 하이네켄 맥주를 들이켰다. “구호요원들은 급료도 없고 위험한 일을 본업으로 삼는다. 내 본업은 보수가 두둑하다. 최악의 경우에도 배달된 형편없는 음식을 먹는 게 고작이다. 나는 그들이 하는 일에 관심을 집중하려고 불안한 줄타기를 한다. 정말 메스꺼울 정도로 자화자찬이 많기 때문이다.”

클루니의 인기연예인 정치가 전략은 좌우에서 비판도 듣는다. 뉴욕대 교수로 ‘백인의 책무(The White Man’s Burden)’의 저자인 윌리엄 이스털리는 이렇게 말했다. “남수단의 성공은 스타들 덕에 이뤄진 게 아니라 그들이 끼어들었는데도 불구하고 일어났다고 해야 맞다. …스타들의 외교관 역할을 왜 원하는지 모르겠다. 배우나 록가수 수업을 받은 이들을 불러다가 핵발전소 수리를 맡기는 꼴이다.”

하지만 지난해 10월만 해도 남수단 주민과 외교관들 사이에는 분리독립 국민투표가 이뤄질 가망이 없다는 회의가 깊었다. 물론 상황 반전을 클루니의 공로로 전부 돌리기는 무리다. 살바 키이르가 이끄는 남수단의 예비정부가 남부 연합을 잘 유지했고, 오바마 행정부와 유엔이 지난해 가을 새로운 외교의 초점을 찾았으며, 수단의 최대 석유 투자기관인 중국 정부가 뒤늦게 국민투표를 지지한다고 발표해 상황을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미국 외교협회(CFR)의 제임스 호지는 이렇게 말했다. “인기연예인이 정책 변화의 촉매제는 된다. 하지만 정책의 변화 자체는 정치인이 일으킨다.”

그러나 클루니가 국민투표 D-100일 언론 홍보를 시작하자 영자 신문, 잡지, 웹사이트에서 수단의 국민투표 언급이 한 달 만에 6건에서 165건으로 늘어났다. 지난해 10월과 지난 1월 사이 수단의 국민투표는 방송과 케이블 뉴스 기사 96건에서 언급됐다. 그중 클루니에 초점을 맞춘 기사가 3분의 1이다. 같은 기간에 9만5000명이 백악관에 e-메일을 보내 남수단에 적절한 조치를 취하라고 요구했다. 데이브 에거스의 소설화된 회고록으로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위대함(What is the What)’의 수단 난민 주인공 발렌티노 아차크 뎅(미국인에겐 ‘실종 소년’으로 알려졌다)은 이렇게 단호하게 말했다. “국민투표는 클루니 없이는 실시되지 않았다. 절대 불가능했다. 클루니는 수백만 명의 목숨을 구했다. 그는 이런 사실을 잘 모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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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투표에서 98.8%의 찬성으로 남수단 분리독립이 결정된 지 며칠 뒤 클루니는 디트로이트에서 ‘아이즈 오브 마치’의 촬영장을 물색했다. 말라리아에서 갓 회복한 그는 위성 사진의 발표를 주선하면서 이집트 봉기를 곱씹었다. “지금 세계는 긴밀히 연결돼 있다. 억압적인 정부에서 벗어날 자유를 택한 남수단의 국민투표는 이 지역 전체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달리 상상할 수가 없다.” 프렌더개스트는 이렇게 덧붙였다. “알자지라 방송에서 남수단의 국민투표가 방송된 뒤 며칠 안 가 이집트 시위가 본격화됐다는 사실이 순전히 우연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영상이 민중에게 힘을 느끼게 해줬다. 남수단에서 불기 시작한 자유의 산들바람이 이집트에선 강풍으로 바뀌었다.”

남수단 공화국은 7월 9일이 돼야 공식 독립국가로 출범한다. 장애물은 아직 남았다. 특히 아비에이가 문제다. 양쪽에 낀 이 지역은 언제라도 내전의 도화선이 될 가능성이 있다. SatSentinel.org가 처음으로 발표한 고해상도 위성 사진에서 북수단이 아비에이 경계선 주변에 병력 약 5만5000명과 포대를 배치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방어용이든 공격용이든 북수단 정부는 이제 병력 증강 배치를 부인할 방법이 없다.

“이곳에 살며 아내와 자녀가 학살될까 두려워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증폭시키는 일이 내 임무”라고 클루니가 말했다. 인기연예인 정치가로서 갖는 기회와 책무를 요약한 말이다. “그는 산꼭대기에 올라가 외치려 하지만 성능 좋은 확성기도 없고 산도 별로 높지 않다. 그래서 높은 산을 가졌고 성능 좋은 확성기를 가진 누군가가 나서서 자신의 가족과 마을을 보호해달라고 요청하고 싶어한다. 그러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당신 큰 확성기가 있소?’라고 묻는다. 나는 ‘그렇소’라고 말한다. ‘소리를 널리 퍼지게 할 만큼 높은 산도 있소?’ ‘그래요, 상당히 높은 산을 갖고 있죠.’ ‘그럼 나를 위해 소리 좀 질러 주겠소?’ 그러면 나는 ‘좋아요, 그렇게 하리다’라고 말한다.”

번역·이원기

JOHN AVL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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