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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Special Knowledge (256) 대학 캠퍼스 안의 역사적 건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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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4면

새 학기를 맞은 대학가가 새내기들로 수놓아지는 때입니다. 청춘의 향기로만 가득한 것 같은 대학 캠퍼스, 그 안에 역사가 숨쉬는 걸 아시는지요? 짧게는 60년 전, 길게는 400여 년 전 지어진 건물들이 강의실로, 본관으로 여전히 쓰이고 있는데요. 각 대학의 정체성을 담은 건물들이죠. 그래서 아무리 학교 부지가 좁아도 새로운 건물을 짓는 건축 공사 속에서도 “이 건물엔 손을 못 댄다”는 곳이 대학마다 하나씩 있습니다. 우리 근ㆍ현대사를 지켜온 건물들로 봄 마실을 나서보시는 건 어떨까요.

심서현 기자

고려대 본관, 일제시대 한국인 건축가가 설계

고려대 서울캠퍼스 정문으로 들어가자마자 첫눈에 보이는 고딕풍의 건물입니다. 캠퍼스를 좌우 절반으로 접으면 그 정가운데에 위치하는 중심축이기도 합니다. 1934년 지어진 6층 석조건물로 사적 285호입니다. 요즘엔 소설과 영화로 유명한 ‘해리 포터’에 나오는 ‘호그와트' 마법학교를 연상시킨다고 해서 ‘호그와트 건물’이란 별명으로 더 유명하다네요. 인촌 김성수 선생이 1932년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했을 때 한국에서 으뜸가는 종합대학으로 만들리라는 뜻을 담아 야심차게 지었다고 합니다. 다른 대학 캠퍼스의 근대건축물은 대부분 외국인이 설계했는데, 이 건물 설계는 일제강점기였음에도 한국인 건축가 박동진 선생이 맡았습니다. 민족사학의 자부심이지요. 그래서일까요. 탑은 하늘로 높이 솟았고, 울퉁불퉁한 화강암의 질감은 당당하고 웅장합니다. 본관은 ‘배울 학(學)’ 자를 형상화했고, 본관 앞 잔디는 ‘큰 대(大)’ 모양을 나타냅니다. 정문의 두 기둥에는 민족과 고려대를 상징하는 호랑이 상(像)이, 후문에는 국화인 무궁화가 조각돼 있습니다. 일제는 당연히 이 문제를 걸고 넘어졌죠. 박동진 선생이 “무궁화가 아닌 벚꽃”이라고 속여 무사히 넘어갔답니다.

동국대 정각원, 한때는 선조의 왕자 정원군의 사저

동국대 법당인 정각원은 서울시 지방유형문화재 20호입니다. 조선 후기 건축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줍니다. 원래는 조선시대 궁궐인 경희궁의 중심이던 숭정전이었습니다. 경희궁은 선조의 왕자인 정원군의 사저였다가 광해군이 1616년 궁으로 승격 개축했고, 영조 때 ‘경희궁’의 이름을 얻었지요. 숭정전은 왕이 신하들의 하례를 받고 정령을 반포하던 궁의 중심이었습니다. 일제 침략기에는 경성중학교 교실로 사용되다가 조계사로 팔려가는 고난을 겪기도 했는데요. 해방 후 그 자리에 현재의 동국대학교가 들어섰습니다. 1976년 9월 현재의 자리로 옮겼고, 1977년 2월에 ‘정각원’으로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처음에는 학교 강당으로 쓰였다가, 개보수를 거쳐 법당으로 개축됐습니다. 봄이면 남산에 핀 꽃을 바라보며 풍경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학생들이 마음의 짐을 비우러 올 만하지요. 자아명상, 요가 등 몸과 마음을 쉬게 할 수업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불자들은 이곳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도 한다는군요.

성균관대 명륜당, 임진왜란 때 불탔다 1601년 중건

명륜당은 조선시대 유일한 국립대학인 ‘성균관’의 종합강의실이었습니다. 퇴계 이황이나 율곡 이이 선생도 이곳에서 공부했지요. 1000원짜리 지폐 속, 퇴계 선생 뒤로 보이는 바로 그 건물입니다. 1398년(태조 7년)에 지었다가 1592년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소실된 것을 1601년 중건해 오늘에 이릅니다. 18칸으로, 좌우에 협실이 있고 중간에는 당(堂)이 있습니다. 유생들이 유교 경전을 중심으로 공부하던 곳으로 ‘인륜을 구명하는 집’이란 뜻입니다. 소과, 대과를 치르는 과거 장소로도 쓰였다는데요. 1519년에 윤탁이 심었다는 600년 된 은행나무는 수험생들의 떨리는 필체를 굽어보았을 것입니다. 성대 캠퍼스 커플들은 지금도 이 나무 주변에서 사랑을 속삭인다니, 시시콜콜한 연인들 사연도 다 간직하고 있겠네요. 기숙사인 ‘양현재’도 명륜당과 함께 지어진 건물입니다. 28개의 방에 많게는 100명이 넘게 살았답니다. ‘성균관 스캔들’이 현실 속에 있었다면 바로 이곳에서 났을 법합니다.

연세대 언더우드관, 6.25땐 김일성 집무실로 쓰이기도

서울 신촌동의 연세대 언더우드관. 사적 276호로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주요 순간들을 지켜봤다. 100만 인파가 모인 1987년 7월 9일 이한열 열사 장례식과 노제도 이 건물 앞에서 시작됐다.



긴 백양로를 걸어 올라간 이들을 두 팔 벌려 반겨주는 언더우드 동상, 그 뒤로 자리잡은 4층 석조 고딕 건물이 언더우드관입니다. 1924년에 준공된, 연세대의 ‘심장’이죠. 연세대 창립자인 호레이스 그랜트 언더우드 박사를 기념하기 위해 그의 동생인 존 언더우드가 기부한 돈으로 지었습니다. 문과대학으로 사용하다 1982년부터 총장실, 기획실, 교무처 등이 있는 본관으로 쓰고 있습니다. 6·25 전쟁 중에는 김일성 집무실로 사용된 적도 있다는군요. 언더우드 박사의 검약정신을 나타내는, 단정한 이 건물은 사적 276호입니다. 담쟁이 넝쿨이 무성해 봄·여름엔 초록빛 생기를, 가을·겨울엔 고풍스러운 운치를 더합니다. 영화 촬영지로도 인기죠. “나 잡아봐라~!” 분홍 원피스, 전지현씨의 팔랑대는 몸짓을 기억하세요? 영화 ‘엽기적인 그녀’의 명장면도 이곳 앞에서 찍었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숨결이 어린 ‘핀슨관’에도 가보셔야 합니다. “동주 시비가 어디냐”고 물으면 됩니다. 1928년에 지어져 연희전문학교 기숙사로 쓰였습니다. 38학번 문과 새내기 윤동주는 최현배 선생이 내준 조선어 숙제와 이양하 선생이 안겨준 영시 과제를 들고서 이 기숙사 방으로 돌아왔다는군요.

이화여대 파이퍼홀, 개성에서 가져온 화강암 사용

1935년 완공된 이화여대 최초의 건물이자 본관입니다. 지하 1층, 지상 3층, 총 건평 1295평의 튜더식 석조 고딕건물이죠. 네모난 창문과 아치가 독특합니다. 여기에 쓰인 화강암은 개성에서 가져온 것이라네요. 건물 위편의 십자가 조각은 기독교 대학의 상징입니다. 일제 말기에 뽑혔다가 1966년에 제 자리를 찾았습니다. 빼어난 건축미에,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고등교육기관 건물이라는 점에서 2002년 5월에 등록문화재로 지정됐습니다. ‘파이퍼 홀’ 이름은 건축기금을 쾌척한 파이퍼 부부를 기념한 것입니다. 미국의 사업가였던 이들은 1920년 아펜젤러 선교사의 부탁을 받고 조선의 여학교를 짓는 데에 12만 5000달러를 내놓았습니다. 한번 밟아보지도 못한 땅, 흰 저고리·깜장 치마의 소녀들을 위해서 말입니다. 3층의 ‘애다 기도실’에도 들러 보세요. 1926년, 이화여전 졸업반의 김애다 학생은 당시 불치병인 결핵에 걸렸습니다. 1931년 소천하기까지 병상에서의 5년을 학교와 환우를 위한 기도에 고스란히 쏟았다고 합니다. 이화의 향기도 그녀를 기리려고 만든 자그마한 이 기도실에서 시작됐을 것 같네요.

전남대 인문관 1호, 광주민주항쟁의 정신 서린 곳

1955년에 지어진 붉은 벽돌의 3층 건물입니다. 광주 용봉동에 있는 전남대는 이 건물로 시작했죠. 중심에는 뾰족한 아치형 지붕이 섰고, 양쪽으로 좌우 대칭 날개식으로 강의실이 펼쳐집니다. 한국전쟁 직후라 물자가 없어 자체 벽돌공장을 지어서 벽돌을 만들어 가며 세운 건물이라고 합니다. 무엇보다 ‘5월 정신’이 깃든 곳으로 유명하지요. 1980년 5월 광주민주항쟁 때 시민들이 여기에 모여 민주주의와 인권을 토론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인문대 강의실로 쓰이고 있지요. 한때 철거 위기에 놓이기도 했는데요. 신고전주의 건축물로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4년 문화재청이 등록문화재로 지정하면서 보존하기로 결정됐습니다.

최초의 대학은?

우리나라 최초의 대학은 어디일까요? ‘기원’으로 보면 성균관대가 최초입니다. 조선 태조가 성균관을 설립한 1398년을 건학 원년으로 보는 것이죠. 1895년에는 3년제 경학과가 설치되는 등 성균관에 근대적 변화가 있었습니다. ‘성균관대학’이 된 것은 1946년입니다.

의과대학은 연세대에 처음으로 생겼습니다. 1885년 세워진 광혜원을 시초로, 1899년 제중원 의학교가 설립됐습니다. ‘사립 연희전문학교’로 인가받은 것은 1917년입니다. 고려대는 일제강점기 조선인이 세운 최초의 고등교육기관입니다. 1905년 세워진 ‘사립 보성전문학교’는 1921년에 정식 인가를 받았습니다. 안암동에 온 것이 1934년, ‘고려대학교’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1946년입니다.

처음으로 ‘대학’ 문패를 내건 것은 숭실대입니다. 1897년 미국 선교사인 배위량 박사가 세운 학교는 1901년 평양의 ‘숭실학당’이 됐고, 1912년에 ‘숭실대학’으로 정식 인가를 받았습니다. 일제에 의해 1938년 폐교됐다가 해방 후 재건됐죠. ‘대학부’는 배재학당에 먼저 생겼습니다. 1886년 고종 황제에게 이름을 받은 ‘배재학당’에 1895년에 대학부가 설치됐습니다. 1925년에 조선총독부에 의해 학교 이름을 빼앗겼다가, 1981년 ‘배재대학’으로 다시 열었습니다.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은 이화여대입니다. 1886년 미국 선교사 스크랜튼 여사가 연 여학교에 고종 황제가 ‘이화학당’이라는 이름을 내렸습니다. 1925년에는 ‘이화여자전문학교’가 됐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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