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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열사에 대해 못다한 이야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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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면

이정은 연구위원(문학박사)은 다양한 조사를 통해 유관순 열사의 결심과 의지를 들여다봤다. 보도 기사, 함께 공부한 동문들의 증언 등. 그가 펴낸 『3·1운동의 얼』이 그 결과물이다. 이 책은 유 열사의 일대기와 함께 독립만세운동이 벌어지는 처절한 현장을 그렸다.

 “그 아이(유관순)는 고향 마을 사람들과 주변 지역 사람들을 분기시키고, 태극기를 만들었으며, 장날 시위운동을 조직했다. 독립운동을 하자는 전갈을 전하기 위해 몇 십리 길 걷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 아이의 아버지, 어머니, 오빠도 다른 많은 사람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다 일본인의 총에 맞았다. 결국 그 아이는 체포됐다.”

 박인덕 선생 자서전 일부를 인용한 내용이다. 유관순을 영웅화하기 위해 과장하거나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지금도 유관순의 수형자 기록표(사진)가 남아있다. 이 기록표에는 직업란에 정동여자고등보통학교 생도라고 적혀 있다.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가 정동에 있었기 때문이다. 기록표에는 또 고아가 된 유관순에게 가족이라고는 감옥에 있는 숙부 유중무의 장남 유경석만 있어 연락주소가 ‘유경석 방’으로 돼 있다. 출옥일은 1921년(대정10년) 1월 2일로 돼 있는데, 형 확정 후 10개월 정도 지났을 때 적어 넣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연구위원은 “출옥일이 언도일 1년6개월 뒤인데 이는 일제가 1920년 4월 영친왕과 이방자의 결혼을 기념해 한국인 재소자들의 형기를 절반으로 감형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1919년 3월1일 국어학자 이희승은 전화 한 통을 받고 탑골공원으로 달려갔다.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만세가 터졌다”는 통화내용을 듣고서다. 그는 “서울의 거리는 열광적인 독립 만세를 연달아 부르는 군중으로 가득찼다. 대열 앞에는 학생들이 선두에 섰다. 서울 시민들과 지방에서 올라 온 시골사람들이 이에 호응했다”고 회상했다. 그 수많은 인파 안에 소녀 유관순이 있었다.

 3월 13일 유관순은 이화학당에서 몰래 빠져 나와 천안으로 내려왔다. 내려오는 기차 안에서도 ‘대한독립’을 외쳤다고 한다.

 고향에 온 유관순은 분위기에 놀랐다. ‘서울소식’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다음 날인 3월14일에야 목천보통학교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날 오후 4시 이 학교 학생 120여 명이 교정에서 평화적인 시위운동을 벌였다. 천안 인근에서 일어난 최초의 시위였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틀이 지난 3월 16일 밤. 예배가 끝난 뒤 유관순은 유중권(아버지)과 유중무, 조인원, 이백하 등 20여 명이 남은 자리에서 서울의 3·1운동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리고 모두 시위운동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모두 찬성하고, 바로 구체적인 방침을 논의했다. 아우내 장날인 4월 1일을 거사의 날로 잡았다. 이날은 음력으로 3월1일이어서 또 하나의 의미 있는 날로 생각했다. 총본부는 지령리에 두고, 아우내장을 가운데로 삼아 ‘상호5’리 거리에 삼각형으로 있는 수신면 장명리와 갈전면 백전리에 각각 중앙 연락기관을 두기로 했다. 아우내장을 중심으로 안성 진천 청주 연기 목천 등 여섯 고을을 망라해 각 촌 각 면의 연락기관을 분담시켰다.

 “밤에는 예배당에서 마을 부녀자들과 같이 태극기를 그렸고, 뒤에 왜경에게 살해된 김구응, 김상헌, 김치관, 박유복, 서병순, 신을우, 박영학 등을 알게 됐다.” 조병호가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3월 20일 입장 장날에 사립 광명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같은 달 28일 오전 6시 30분에도 입장장터에서 또 한번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날엔 3명이 숨지고 6명이 부상한 것으로 기록됐다. 이어 다음 날, 그 다음날에도 입장의 만세시위는 계속됐다. 4월 1일 아우내장. 청주와 진천에서 만세꾼들이 모여들었다. 성환 등지에서도 인파가 몰려들었다.

 평화적인 독립시위가 본격적으로 진행될 무렵, 유관순은 헌병군의 총검에 찔리고, 주먹과 발로 채였다. 아버지 유중권도 칼에 찔렸고, 얼마 뒤 다시 일본 헌병의 총에 맞아 죽었다. 이 내용들은 감옥에서 유관순과 함께 있던 어윤희가 유관순에게 들은 얘기를 옮긴 것이다. 유관순에 대한 판결문에는 “압수 증 제1호 구 한국 국기는 자기(유관순)가 만들었다. 압수 물건 중 구 한국 국기 한 자루는 유관순 소유의 제1범죄 공용물이므로…”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처럼 힘겹게 독립운동은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정은 위원은 “유 열사에 대한 자료가 많지 않았다. 해방 이후 제대로 조사된 적 없어 행정공문서와 보도기사, 지인들의 증언 등을 토대로 글을 썼다”며 “후손들이 입시 위주의 교육에서 벗어나 우리 역사를 자세히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김정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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