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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열사의 생애와 독립운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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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면

[중앙포토]

유관순 열사는 한국의 독립운동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가장 먼저 떠 오르는 인물이기도 하다.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고 노력했지만 ‘독립’이라는 빛은 보지 못했다. 18년이란 짧은 생을 마감하고 25년이란 긴 세월이 지난 후에야 결실이 맺어졌다. 유 열사가 나라를 위해 보내온 시간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 이정은 책임연구위원이 되짚어봤다.

편집자 주

18세 소녀 유관순 서대문 감옥에서 숨지다

유관순 열사의 18년 짧은 삶. ‘그녀는 단지 거대한 일본 제국주의의 호수에 던져진 작은 돌 하나에 불과했는가?’ 열사는 감옥에서 숨졌고, 꿈에 그리던 독립은 그녀의 죽음 이후로도 스물다섯 해를 더 기다려서야 왔기 때문이다.

 유관순이 태어난 1902년(12월 16일생). 대한제국은 일본의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위협 앞에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곧 러일전쟁이 터졌다(1904).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기고(1905), 8세 때 국권을 빼앗겼다. 곧 식민지 강압정책 하에 선진화된 일본의 노예로 살 것을 강요당했다. 자주적 한민족으로 살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는 오랜 압제 속에서 좀처럼 오지 않았다.

유교적 전통과 기독교 수용

불안에 빠진 국민들은 강대국의 종교인 기독교의 문을 두드렸다. 교회가 급속히 확산됐다. 유관순의 고향 지령리도 기독교로 개종했다. 유관순의 집안은 조선 중기 광해군 때까지 중앙 정계의 관원을 지낸 명문사족이었다. 아버지 유중권은 개종을 거부하고 유교적 전통을 고수했다. 유관순의 숙부 유중무는 개종해 지령리 교회의 교사가 됐다.

 기독교의 수용은 지령리 신세대들에게 신식교육 기회를 열었다. 마을의 조병옥은 1906년에 공주 영명학교에 들어갔고, 1914년 미국 유학을 떠났다. 숙부 유중무의 아들 유경석은 1910년에, 유관순의 오빠 유우석이 그후 공주 영명학교에, 사촌언니 유예도와 유관순이 1914~1915년에 각각 이화학당에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유관순이 이화학당에서 공부하게 된 데에는 사부인이라 불렸던 앨리스 제이 햄몬드(Alice J. Hammond)의 영향과 도움이 컸다. 사 부인은 특히 여성교육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화학당에서 유관순 열사와 함께 수학한 동문들. 오른쪽 맨 위가 유 열사다. [독립기념관 제공]

이화학당에서 맞은 3·1독립운동

1919년 3월 유관순은 이화고등보통학교 1학년 말이었다. 3월 1일 서울에서 천도교, 기독교, 불교의 종교인 33명 민족대표들이 독립을 선언했다. 독립을 외치는 대중시위운동이 담 밖에서 울려 왔다. 유관순은 친구 몇 명과 교장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담을 넘어 서울 시내의 시위운동에 합류했다.

 3월 5일 남대문역(현 서울역) 앞에서 학생단 주도하에 수만의 학생, 시민들이 제2차 대규모 시위운동을 벌였을 때도 유관순은 참여해 체포됐다가 풀려났다.

 학교가 휴교하자 3월 13일 고향 천안으로 내려왔다. 유관순은 부형들을 설득했다. 아버지 유중권, 숙부 유중무, 동네 어른 조인원(조병옥 부친) 등이 나섰다. 이들은 4월 1일 병천(아우내) 장날을 기해 만세시위를 계획했다. 유관순은 멀고 가까운 지역을 돌며 유림대표와 큰 가문의 어른들을 찾아 시위운동에 나설 것을 적극 설득했다.

 4월 1일 각지에서 약 3000명의 장꾼이 병천 아우내 장터에 모여들었다. 오후 1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유관순은 장대에 매단 큰 태극기를 들고 시위대열에 앞장섰다.

 병천 일본헌병 주재소의 헌병들이 시위대를 제지했고, 총검으로 선두에 선 유관순의 큰 태극기 깃대를 쳐서 부러뜨리고 다시 옆구리를 찔렀다. 일본군의 잔혹한 총격과 총검에 유관순 아버지와 어머니를 비롯해 19명이 목숨을 잃었다. 같은날 공주에서는 영명학교에 다니던 오빠 유우석(준석)이 공주 시위운동을 주도하다 일경의 칼에 부상을 입고 체포됐다.

 공주지방법원은 유관순, 유중무, 조인원 세 사람에게 징역 5년을 언도했다. 아우내 만세시위 주도자들은 서울복심법원에 공소를 제기했다. 경성복심법원은 공주재판의 부당함을 적시하며 유관순을 비롯한 주도자들에게 3년형을 선고했다.

감옥안의 만세시위와 순국

서대문 감옥에 수감된 유관순은 계속해 독립만세를 부르다 많은 고문을 당했다. 1920년 3월 1일 3·1운동 1주년을 맞자 유관순은 또다시 감옥 안에서 독립만세를 선도했다. 이때 받은 고문으로 방광이 파열됐다. 이를 알고도 일제 당국은 치료를 거부하고 방치했다.

 감옥안에서 함께 수형했던 어윤희 여사는 유관순이 배고픔, 외로움, 동생들에 대한 걱정으로 슬퍼했으며, 고문과 상처의 후유증으로 고통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유관순은 1920년 9월 28일 서대문 감옥 안에서 숨졌다. 유관순의 항거는 민족의 자주독립 정신의 상징일 뿐 아니라, 일제하에서 자라난 세대들임에도 역사의 주체로서 민족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고자 했던 신세대의 등장을 상징하는 일이기도 했다.

이정은(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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