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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사건’ 과 국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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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강찬호
정치부문 차장

베이징 댜오위타이(釣魚臺)에서 6자회담이 열릴 때마다 미국 측 수석대표였던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와 우리 측 수석대표는 본관 앞 정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많을 때는 하루에 서너 번씩 같은 장소를 빙빙 돌며 얘기를 나눴다. 건물 안에서 얘기를 나누면 중국 정보기관의 도청장치에 100% 탐지될 것이란 두려움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이 방 안이나 차내에서 대화를 나눠야 할 때는 TV나 라디오 볼륨을 끝까지 올려놓고 얘기를 했다고 한다. 또 우리 측 관계자들이 댜오위타이 숙소를 잠시라도 비울 때엔 반드시 PC나 USB를 들고 나가야 했다고 한다.

 이렇게 외교 현장에는 상대국 정보기관이 어떤 식으로든 정보수집을 하게 마련이다. 중국·러시아뿐 아니라 미국이나 유럽제국(諸國)·일본 등 선진국들도 예외가 없다. 브라질 정부가 대형 항공기를 입찰하는 현장엔 보잉과 에어버스를 팔려는 미국과 프랑스의 베테랑 정보기관원들이 출동해 경쟁국의 전략을 탐지하는 데 열을 올린다. 이러다 보니 어느 나라 외교관이건 협상장에서 숙소로 돌아왔을 때 서류나 가방 위치가 변해 있는 걸 느낀 경험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당신네 정보기관원이 내 방을 뒤졌다”고 항의하는 외교관은 없다. “증거를 내놓으라”는 한마디로 일축당할 게 뻔한 데다 가장 중요한 목표인 협상성사에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교가엔 “외교관은 외국 나가는 순간 24시간 투명한 유리상자 속에 갇히는 것”이란 금언이 있다. 알아서 보안에 유의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번 ‘인도네시아 특사단 숙소 괴한 침입 사건’처럼 정보요원이 상대방 숙소에 들어갔다 들켜 버렸다면 문제가 다르다. 게다가 국정원은 뒷수습까지 엉망으로 해, 언론에 사건의 전모가 노출되는 최악의 상황을 연출했다. 정부는 책임자를 단단히 문책하고 나사 풀린 국정원 시스템을 일신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국정원장도 교체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를 공론화하며 정쟁의 대상으로 삼는 것만큼은 자제할 필요가 있다. 우리와 인도네시아의 국익 때문이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이번 사건에 대해 “위층 투숙객이 방을 잘못 들어온 것뿐이며 도난당한 데이터도 없다”며 문제 삼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한국은 인도네시아에 여섯 번째로 큰 투자국이다. 또 이번에 서울을 찾은 특사단은 한국 기업들로부터 인도네시아 국내 총생산의 2%가 넘는 120억 달러를 투자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돌아갔다. 이렇게 큰 이익이 걸린 협상판을 실체가 불분명한 ‘괴한침입’을 이유로 뒤엎을 이유가 없다는 게 그들의 자연스러운 판단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만 목소리를 높인다면 사건을 조용히 처리하려는 인도네시아 정부가 국내적으로 난처한 처지에 빠질 우려가 커진다. 최악의 경우 여론에 밀려 그들이 원치 않는 ‘외교이슈화’에 나서게 될 가능성마저 있는 것이다.

 국정원의 잘못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되, 국익을 스스로 깎아먹는 공론화만은 자제하는 슬기를 보이자. 우리 정부 대표단이 베이징에서 중국 정보기관에 같은 상황을 당했다 해도 우리의 공식 입장은 인도네시아의 그것과 같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강찬호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