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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섹스를 말한다

중앙일보

입력

What the Bible Really Says About S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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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위크 욕정에 불타는 두 젊은 연인이 서로를 탐한다.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의 눈과 머리카락에 머물다가 치아, 입술, 뺨, 목, 가슴을 거쳐 ‘몰약의 산’에 이른다.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둘기 같고 네 머리털은… 산 기슭에 누운 무리 염소 같구나,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털 깎인 암양… 같구나, 네 입술은 홍색 실 같고 네 입은 어여쁘고 너울 속의 네 뺨은 석류 한쪽 같구나, 네 목은 군기를 두려고 건축한… 망대 같고, 네 두 유방은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쌍태 노루새끼 같구나,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내가 몰약 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리라…”) 남자는 연인을 열렬히 칭송한다. “나의 사랑 너는 어여쁘고 아무 흠이 없구나.” 여자가 화답한다. “내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 내 마음이 동하여서…”

미국의 유명 신학자 2인의 도발적인 성서 해석

이 노골적인 성애의 찬가는 다름 아닌 성서에 나온다. 구약 아가서(‘솔로몬의 노래’) 4~5장 중 일부다. 이 시의 기원은 예수의 탄생보다 1200여 년 앞선 이집트 이교도의 사랑 노래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추정된다. 성서 해설자들은 오랜 세월 동안 그런 노골적인 묘사를 누그러뜨리려고 애썼다. 문자 그대로 봐선 안 되며 더 깊은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하느님의 이스라엘 사랑을 뜻한다, 또는 예수의 교회 사랑을 의미한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하지만 어떤 심층적인 의미가 내포됐든 표면적으로 볼 때 이 시는 고대의 성애 묘사이며 욕정의 성취를 찬양하는 노래다.

성서는 성(性)을 어떻게 보며 무엇을 이야기할까? 최근 나온 두 권의 책이 그 질문의 답을 찾고자 시도한다. 학자들이 대중에게 읽히려 쓴 책이다. 요즘 보수주의 기독교인들은 성서가 ‘전통적 결혼’의 테두리 안에서 이뤄지는 성행위만을 허용한다는 점에는 반박할 여지가 없다며 믿으라고 강요한다. 저자인 제니퍼 라이트 누스트와 마이클 쿠건은 그 생각이 잘못됐다는 점을 입증하고자 책을 썼다고 말했다. 그들은 성서에서 성과 관련해 아주 노골적이거나 설명이 불가한 이야기들을 연구했다. 예를 들면 딸을 신에게 순결의 제물로 바친 ‘입다’(사사기), 죽을 때까지 서로를 사랑하겠노라 맹세한 두 여인 ‘나오미’와 ‘룻’의 이야기(룻기) 등이다. 저자들은 성서가 가르친 성의 문제는 우익 기독교인들의 주장처럼 반드시 일관되진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려 한다.

누스트는 ‘솔로몬의 노래’인 아가서를 가정과 공동체의 전통적인 관습 밖에서 이뤄지는 미혼 성행위의 찬가로 파악한다. 그녀는 이번 달에 출간되는 ‘성애에 관한 성서의 놀라운 모순(Unprotected Texts: The Bible’s Surprising Contradictions About Sex and Desire)’에서 이렇게 말한다. “성서를 존중해야 마땅한 사람들이 그 이야기와 교훈을 너무도 유치한 구호로 전락시키는 행태에 신물이 났다.” 쿠건의 책 ‘성서는 정확히 성을 무엇이라 말하나(God and Sex: What the Bible Really Says)’는 지난해 말 출간됐다.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은 성에 관한 성서의 가르침이 전혀 상충되지 않으며 전부 일관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성서를 기독교 전통의 맥락에서, 그리고 신이 인간에게 직접 내린 ‘거룩한 영감’으로 씌어졌다고 생각하면서 읽으면, 성과 결혼의 문제에서 도달하는 결론은 오직 한 가지다. 미국 복음주의 기독교의 본산 풀러 신학교(캘리포니아주 패서디나)의 리처드 마우 총장은 “공개적이고 평생을 함께하는 남자와 여자 사이의 결합 이외의 성관계는 신의 창조와 구원의 목표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보수적인 신학자들은 성서가 성에 좀 더 관대하기를 진보주의자들이 바라겠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사실 성서의 ‘올바른’ 해석을 둘러싼 논쟁은 성서 자체만큼이나 오래됐다. 하지만 지금 미국에서 펼쳐지는 문화 전쟁에선 기독교 우파가 동성결혼에 반대할 목적으로 성서, 특히 구약 창세기에서 유추된 ‘한 남자, 한 여자’ 주장을 이용한다. 그 외에도 금욕 학교의 효과를 둘러싼 논란과 교회 지도부에서 여성의 합당한 역할을 둘러싼 교파 간 갈등도 심하다. 그런 치열한 싸움 때문에 나머지 미국인 대다수(3분의 2는 성경을 거의 읽지 않는다)는 별다른 비판 없이 우익의 주장을 믿게 됐다. 누스트는 보스턴대 종교학 교수이며 미국 침례교 목사다. 쿠건은 하버드대 셈족 박물관의 출판국장으로 예수회 사제 출신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책이 성과 성서의 이야기를 기독교 우익이 독차지하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누스트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성서는 반드시 선언과 요구로 우리의 몸과 의지를 꼼짝 못하게 하는 정복군이 될 필요는 없다. 성서는 우리 인간이 욕정에 가득 찬 육신으로 산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려는 복잡한 댄스에서 파트너 역할도 해야 한다.” 그 논거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성서는 고대 문서이기 때문에 그 세부 내용이 전부 현대 세계에 적용되진 않는다.

실제로 성서에는 ‘전통적 결혼’이 존재하지 않는다. 성서에 나오는 여러 사례는 극과 극을 오간다. 아브라함은 본처 사라만이 아니라 몸종 하가와 결혼해서 그 둘 각각에서 아들을 얻었다. 야곱은 라헬과 그녀의 언니 레아, 그리고 그들의 몸종인 빌라와 질파와도 결혼했다. 반면 예수는 독신이었다. 사도 바울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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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남편은 아내를 소유했고 아버지는 딸을 소유했다. 여성의 순결 보호는 아버지의 의무였지만 아버지들은 기분 내키면 딸의 순결을 내던졌다. 예를 들어 창세기에서 롯은 성난 소돔의 군중이 그의 집을 에워싸자 처녀인 두 딸을 마음대로 하라고 내준다. 신명기에선 간통한 여성들을 사형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신약 고린도 전서에선 사도 바울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말한다(일부 보수 교파는 이 구절을 근거로 여성의 목회를 허용하지 않는다).

“성서에는 가부장적 편견이 곳곳에 배어 있다”고 쿠건은 책에 적었다. 그래서 성서의 세세한 내용은 대충 넘기고 사랑, 온정, 용서를 말하는 교훈에 초점을 맞추는 편이 낫다고 그는 주장한다. “전체적으로 성서는 모든 사람의 온전한 자유와 평등이라는 궁극적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끊임없는 운동의 시발점을 기록한 내용으로 이해된다.”

성행위 묘사가 성서 곳곳에 숨겨져 있다.

동성결혼 논쟁에 익숙한 사람들은 성서의 다음 내용을 잘 안다. 구약 레위기는 남성 간의 동침을 ‘가증한 일’이라고 표현한다. 신약 로마서는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는’ 남자들을 지탄한다. 하지만 쿠건은 “성서에는 성행위가 도처에 숨어 있다”고 책에서 말한다.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알아야 제대로 보인다.” 성서의 성 문제 가르침을 충분히 이해하려면 잘 훈련된 눈이 필요하다.

성서의 저자들은 음부를 말할 때 때로는 ‘손’(아가서)을, 때로는 ‘발’을 이야기한다. 쿠건은 아기가 ‘어머니의 발 사이에서’ 태어난다는 구절을 예로 든다. 또 선지자 이사야가 성난 하느님이 이스라엘 사람의 머리털과 발 털을 밀고 수염도 깎으리라고 약속한 구절도 성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룻기에선 룻이 목욕하고 기름을 바른 뒤 어두워졌을 때 남편으로 삼고 싶은 남자 보아스 곁에 누워 그의 ‘발치’ 이불을 든다. 보아스가 깜짝 놀라 깨어나 “네가 누구냐?”고 묻는다. 룻은 자신을 밝힌 뒤 ‘그의 발치’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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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건은 여기서 다소 선정적인 해석을 감행한다. 대학생들을 가르칠 때면 반드시 누군가가 누가복음에 나오는 이 장면을 묻는다고 그는 책에서 말한다. 한 여성이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붓는다”는 내용이다. 누가복음의 저자는 진짜 발을 적었을까? 아니면 다른 상징일까? “현대와 고대의 해석 둘 다가 시사하듯이 성행위를 빗댄 표현인지 모른다”고 쿠건은 책에 적는다. 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이 경우엔 ‘발’이 그냥 발일 가능성이 크다는 견해에 동의한다.

금지는 허용을 의미하기도 한다.

성서는 성 문제에 엄격하고 잘못을 가차없이 심판한다. 매춘, 간통, 여성의 혼전 성관계, 동성애를 금한다. 하지만 각각의 경우에 전부 예외가 있다고 누스트는 지적했다. 창세기에서 다말은 창녀로 가장해 시아버지와 동침한다. 혈통을 이으려는 욕구가 매춘 금지령을 능가한 예다. 또 누스트는 다윗왕이 둘도 없는 친구였던 요나단과 “성적인 만족을 즐겼다”고 도발적으로 주장한다. 구약 사무엘 하에서 다윗은 요나단의 죽음을 이렇게 애통해 한다.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

이혼은 구약에선 허용되지만 신약 복음서에선 금지된다. 예수가 이혼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점만큼은 분명하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는 “누구든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 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 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마태복음에선 예수가 약간 입장을 누그러뜨려 부정한 아내를 둔 남편이 빠져나갈 여지를 남겨둔다. 누스트는 “성 문제를 말할 때 성서는 종종 상충된다”고 책에서 말했다.

공인된 해석이 때로는 틀린다.

잘 알려졌듯이 창세기의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는 동성애, 혼음 등 사회통념에 어긋나는 성행위를 신이 심판하고 벌하는 상징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누스트는 그 해석이 잘못됐다고 주장한다. 천사와의 성행위가 위험하다는 경고를 담은 이야기라고 그는 말한다. 성서의 세계에선 사람들이 천사의 존재를 믿었다. 천사를 두려워했고 천사와의 성행위는 죽음과 파멸에 이르는 죄였다. 노아의 이야기에선 하느님이 ‘사람의 딸들(인간 여성)’과 ‘하느님의 아들들(일부 해석에 따르면 천사들)’ 사이에 난 자손들을 멸하려고(“지면에서 쓸어 버리려고”) 홍수를 내린다. 유대교 외경에는 지상으로 내려와 인간 여성을 잉태시키는 천사(‘파수꾼’으로 불린다)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 행위의 결과로 극악무도한 자손들이 탄생해 신의 무서운 징벌을 부른다. 신이 소돔을 완전히 몰락시킨 이유를 두고 현대의 목회자 대다수는 남자들이 서로 성행위를 했기 때문이라고 풀지만 누스트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보다는 롯의 집에 들어간 하느님의 천사들을 소돔의 남자들이 강간하려고 했기 때문일지 모른다고 그는 말한다. 고린도 전서에서 사도 바울은 교회에서 여성들이 머리를 덮어 써야 한다고 말한다(“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한다”). 누스트는 바울의 그 말이 천사들의 욕정을 불러일으켜선 안 된다는 경고라고 주장한다. “천사들이 지켜보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쿠건과 누스트가 성서의 성 문제 가르침을 대안적으로 해석한 첫 학자는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대중의 인기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다른 학자와 차이가 난다. 도발적인 제목과 유명 출판사를 이용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그들은 분명히 책을 많이 팔고 싶었던 듯하다. 하지만 그들은 성서의 ‘잘못된 공식적인’ 해석을 바로잡고자 책을 썼다고 말한다. 보수적인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난 누스트는 어머니와 함께 소파에 앉아 성서를 읽으며 믿음과 회의가 혼합된 상태에서 성서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파악하려고 애썼다는 기억을 생생하게 돌이킨다. 그녀는 독자들도 자신의 책을 읽으며 그렇게 하기를 권한다.

그러나 혼자 성서를 읽으면 위험한 결론에 도달할 가능성도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특정 시기에는 성서가 노예제, 가정폭력, 유괴, 어린이 학대, 인종차별, 일부다처제를 지지한다고 해석됐다. 그래서 기독교 보수주의의 보루인 남침례교 신학대학원의 앨버트 몰로 총장은 성서를 읽을 때는 권위 있는 해설자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모두가 성서를 읽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모두가 성서를 읽기에 동등한 자격을 갖췄다는 뜻이 아니며, 성서가 반드시 자신이 이해하는 그대로라는 의미도 아니다. 모든 이단은 성서를 혼자 읽으며 올바로 이해했다고 무모하게 믿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 몰로는 ‘하느님의 말씀’인 성서를 고대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의 ‘오디세이(The Odyssey)’나 ‘일리아드(The Iliad)’와 같은 차원에서 독자적으로 해석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민주주의 세계에선 ‘이단’을 믿는 사람들도 의견 개진이 허용돼야 한다. 저자들은 성도덕 문제를 둘러싸고 논쟁하는 사람들이 실제 성서가 그와 관련해 어떻게 말하는지 알아보지도 않고 그냥 포기해선 안 된다고 말한다. 독자가 저자들의 성서 해석을 받아들이든 거부하든 간에 그들의 그런 주장만은 정당하다. 저명한 성서 역사학자 일레인 페이절스도 이렇게 말했다. “성서를 읽고 곰곰이 반추해 보면 우리가 원하는 해답이 아니라 오히려 수많은 의문을 얻게 된다.”

번역·이원기

LISA MILLER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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