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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현금 할인’ 의 유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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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차진용
산업 선임기자

며칠 전 디지털 녹음기를 장만하려고 서울 구의동에 있는 전자상가를 찾았다. 맘에 드는 걸 골라 가격을 묻자 “카드로 결제하면 19만원, 현금으로 내면 17만원”이란다. 지갑을 열어 보니 마침 현금이 충분했다. 2만원 깎았다는 뿌듯함을 느끼며 제품을 사들고 전동차에 올랐다. 하지만 이내 기분이 찜찜해졌다. ‘현금 할인’의 유혹에 넘어간 게 살짝 못마땅해서다.

 나중에 업계 관계자를 만나 얘기했더니 과민반응이란다. 그도 강원도 동해시에 출장 갔다 겪었던 일을 털어놨다. 모텔 주인이 ‘현금 3만원, 카드 3만3000원’을 제시해 점잖게 불법이라고 지적했단다. 그랬더니 돌아온 답변은 “그럼 다른 데 가서 주무세요”였다고. 카드 소지자를 차별하는 건 법으로 금지돼 있다. 어기면 1년 이하의 징역이나 1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을 받도록 돼 있다. 하지만 처벌 사례는 전무하다. ‘모기 잡으려 칼 뽑는 꼴’이어서다.

 신용카드가 선보인 지 30여 년이 흐른 지금 카드는 필수품이 됐다. 동네가게뿐만 아니라 버스·지하철·택시에서도 이용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도 카드와 현금 결제에 이중가격을 적용하는 업소가 아직 꽤 많은 것 같다. 경험해 본 독자는 알겠지만 현금 할인은 영수증을 발행하지 않는 조건으로 이뤄진다. 업소 제시 할인액은 일반적으로 판매가의 10%가량. 세무소에 낼 부가세를 소비자에게 주는 것이다. 대신 업주는 소득세 신고 때 매출을 누락함으로써 세금 절감 효과를 본다. 카드 회사에 내는 수수료(최대 4.5%)도 덤으로 챙길 수 있다. 소비자는 싸게 사고, 업소는 세금 줄여 내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셈이어서 근절이 어려운 구조다.

 문제는 영세사업자뿐만 아니라 일부 고소득 전문직 종사자와 대형 사업자도 이런 거래를 즐긴다는 점이다. 아예 카드를 안 받는 곳조차 있다. 세무 당국은 지난해 4월 변호사·변리사 등과 병·의원, 학원,예식장 등에 대해 30만원 이상 거래 시 현금영수증을 발급하도록 의무화했다. 아울러 이를 위반한 업소를 신고한 사람에겐 영수증 미발급액의 20%(건당 300만원,연간 1500만원 한도)를 포상금으로 주기로 했다. 할인 혜택을 본 뒤 신고해도 포상금을 준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포상 규모가 크다 보니 책정 예산 15억원이 일찍 소진되지 않겠느냐는 반응이 나왔었다. 하지만 15일자 한 신문 보도에 따르면 결과는 기대에 크게 어긋났다. 포상금 지급실적이 책정 예산의 10%도 안 됐다. 소비자들이 업주가 제시한 즉석 현금 할인의 달콤함에 만족한 탓이리라.

 조세연구원은 우리나라의 지하경제 규모를 175조원(2008년 기준)으로 추산한다. 국내총생산(GDP)의 17.1%에 해당된다. 연구원은 GDP 대비 카드·현금 영수증 발급 실적이 1%포인트 높아지면 지하경제 규모가 0.12∼0.13%포인트 줄어들 것으로 예측했다. 연구원의 안종석 본부장은 “지하경제를 줄이려면 세무조사 강화밖에 길이 없다”고 했다. 카드·현금 영수증 인센티브를 아무리 늘려줘도 업소가 제공하는 현금 할인 혜택을 못 따라간다는 이유에서다. 그런 점에서 올 연말 끝내려던 신용카드 연말정산 소득공제를 연장키로 한 것은 백 번 잘한 일이다. 오히려 줄였던 소득공제 혜택을 늘리는 방안을 검토해봐야 한다.

 최근 중앙일보는 ‘세금 감시 잘해야 일류시민 된다’ 시리즈를 게재했다. 지자체의 세금 낭비를 고발한 이 기사에 많은 격려가 몰렸다. 세금 낭비에 대한 감시의 눈초리가 매서워질 것이다. 이와 함께 공공연히 탈세하는 업소에 대해서도 ‘소비자 의식’을 발휘해야 하지 않을까. 탈세에 동조하는 것도 크게 보면 납세의무의 방기다. 현금 할인의 유혹을 나부터 떨쳐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차진용 산업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