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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강제로 행복하게 만들겠다는 이상주의자는 싫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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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호 19면

젊었을 때 크리스티는 날씬한 금발의 미인이었다. 나이가 들어선 비만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그녀는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나았다. [게티이미지]

‘애거사 크리스티 특전(特典)’이라는 게 있다. 교황 바오로 6세가 1971년 잉글랜드와 웨일스 지역의 가톨릭 교구에서 라틴어 ‘트리엔트 미사’가 예외적으로 실시될 수 있도록 특별히 허가한 것이다. 바오로 6세는 69~70년 미사 양식의 개혁을 단행해 1570년 도입된 트리엔트 미사를 폐지했다. 그런데 영국 가톨릭 교회에서 문제가 생겼다. 트리엔트 미사는 국가의 탄압에 굴하지 않고 순교를 마다하지 않은 영국 가톨릭 교회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영국의 저명 인사들이 교황에게 트리엔트 미사의 유지를 요구하는 청원서를 냈다. 청원서를 읽어 내려가던 교황은 서명자 중에서 영국 탐정소설가·극작가인 애거사 크리스티를 발견하곤 “아, 애거사 크리스티!”라고 갑자기 외치더니 특전을 허가하는 서류에 서명했다고 한다.

세상이 주목한 책과 저자 <15> 애거사 크리스티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의 영문판 표지

영국 비평가에겐 존경 못 받아
바오로 6세는 헤아릴 수 없는 애거사 크리스티의 독자들 중 한 명이다. 크리스티는 범죄소설 78편, 연애소설 6편, 단편소설 157편, 극본 19편, 시집 2권, 동화집 1권, 자서전 2권을 냈다. 그의 작품은 105개 언어로 번역돼 전 세계에서 40억 권이 팔렸다. 세계 기록이다. 크리스티는 희곡 분야에서도 세계기록을 갖고 있다. 1952년 막을 올린 쥐덫이 8개월을 예상한 크리스티의 생각을 깨고 아직까지 상연되고 있다.

크리스티는 독실한 성공회 신자였다. 말년에는 집에서 영성체를 했다. 그러나 그의 별명은 ‘범죄의 여왕(Queen of Crime)’이었다. 이 별명은 크리스티를 둘러싼 여러 괴리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을 끄집어낸다. 그의 삶은 비평가들이나 기자들이 ‘싫어할’ 정도로 따분하고 평범했다. 그는 폭력을 싫어했다. 그러나 그의 작품 세계에 흐르는 전제는 ‘누구나 살인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크리스티 소설의 작품성에 대한 평가에서도 괴리가 있다. 영국 내 비평가들은 그를 존경하지 않았다. 그들은 크리스티의 소설이 “낱말 퍼즐이지 문학이 아니다”라고 혹평했다. 반면 유럽 대륙의 지성계는 달랐다. 롤랑 바르트, 움베르토 에코, 미셸 우엘벡 등은 그녀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크리스티가 ‘범죄의 여왕’에 등극한 성공비결은 무엇일까. 쉽고 명료하고 직설적인 문체에 답이 있다. 그의 소설은 원어민의 경우 9~11세 수준의 어휘력이면 이해 가능하다. 홍콩 패션계의 거물인 데이비드 탕(鄧永<93D8>)은 13세까지 영어를 한마디도 못했으나 크리스티 소설로 영어를 공부해 영어로 칼럼을 쓸 수 있는 실력에 도달했다.

전성기에 크리스티는 매년 3~4권의 소설을 출간했다. 그가 60년대 이후 발표한 소설들은 작품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도 있으나 역시 지금도 세계적인 스테디셀러다. 특별한 비법이 있을 법하지만 크리스티 글쓰기의 비밀을 발견한 연구자는 없다. 크리스티도 인터뷰에서 “실망스러운 진실은 내겐 방법이라고 내세울 만한 게 없다는 것”이라고 술회했다.

크리스티는 정리정돈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그가 남긴 73개의 공책에는 소설 줄거리를 구상한 메모가 남아 있는데 공책의 내용은 뒤죽박죽이다. 소문난 악필인 크리스티는 메모 사이 사이에 전화번호나 쇼핑 목록, 딸 로절린드의 생일을 축하하는 시, 미장원 약속을 뒤섞어 놨다.

작품의 탄생 과정은 무질서했지만 줄거리만큼은 항상 치밀했다. 크리스티에 대한 혹평이 지적하는 것처럼 그의 소설은 퍼즐 형식을 띠고 있다. 낯익은 패턴도 자주 발견된다. 그래서 독자들은 범인을 알아낼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든다. 그러나 크리스티는 줄거리에 각별한 공을 들였다. 작품 쓰기가 거의 끝날 때까지 크리스티 자신이 범인을 모르는 경우도 많았다. 친지들에게 작품을 읽어 주고 범인이 발각되는 경우가 생기면 범인을 바꿔버리기도 했다.

크리스티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많은, 1억 부가 판매된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And Then There Were None)(1939년)에서 범인이 누군지 알아채는 것은 쉽지 않다. 주요 인물이 10명이나 되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는 다른 작품에 단골로 등장하는 벨기에 탐정 에르퀼 푸와로나 나이가 지긋한 미혼의 제인 마플은 나오지 않는다.

약사 생활하며 독극물 전문가 돼
이 소설은 데일리 익스프레스라는 신문에 23회 연재됐다. 크리스티의 소설 중 스릴과 서스펜스가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도 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이 8명의 사람을 외딴 섬에 초대한다. 뭔가 감추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다. 섬에서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하인 부부와 악몽 같은 상황이다. 육지와 단절된 가운데 동요에 나오는 가사에 맞춰 한 명 한 명 죽어나간다. 살해가 일어날 때마다 식탁 위에 있는 열 개의 인디언 인형이 한 개씩 없어진다. 결국 10명 모두 죽는다. 43년에 나온 연극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에선 2명이 살아남는다. 섬에는 10명 외엔 아무도 없었다. 범인은 10명 중 1명이다.

원제가 ‘열 개의 검둥이 인형(Ten Little Niggers)’였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는 이름 논란으로 유명하다. ‘검둥이’라는 인종차별적 표현이 문제돼 제목이 ‘열 개의 인디언 인형(The Ten Little Indians)’으로 바뀌기도 했다. 영국에선 85년에야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로 제목이 바뀌었다.

제목 논란은 크리스티 소설의 시대상을 드러낸다. 크리스티 작품의 배경은 20~30년대 영국 상류중산층(upper-middle class)의 세계였다. 보수적이었던 상류중산층은 영국의 제국주의를 옹호하며 유색인종이나 유대인에 대해 편견이 있었다. 크리스티 또한 보수적이었고 인종 편견이 있었다. 크리스티 자신의 표현대로 그는 “우리를 강제로 행복하게 만들려는 이상주의자들”을 싫어했다.

‘모든 소설은 그 작가의 자서전’이라는 문학론이 말하는 것처럼 크리스티의 체험도 알게 모르게 그의 작품과 연결된다. 미국인이었던 크리스티의 아버지 프레드릭 밀러는 크리스티가 11세일 때 사망했다. 크리스티는 정규교육을 받지 않고 집에서 어머니와 가정교사에게 교육받았다.
당시는 결혼이 여성 인생의 최대 목표였고 날씬한 미인으로 자라난 크리스티는 구애도 많이 받았다. 그는 1914년 첫 남편인 전투기 조종사 아치볼드 크리스티 대령과 결혼했다. 첫 남편은 크리스티에게 크리스티라는 작가명과 외동딸을 남겼다. 크리스티는 어머니와 밀착된 관계였다. 크리스티는 1928년 태어난 외동딸 로절린드와 그런 관계를 희망했으나 딸은 첫 남편과 성격이 비슷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크리스티는 적십자 병원에서 약사로 일하면서 탐정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때 알게 된 독극물에 대한 지식은 작품 구상에 큰 도움을 줬다. 그의 작품 54편에 독극물이 살인 수단으로 등장한다. 첫 작품인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1920)은 출간해줄 출판사를 찾는 데 5년이나 걸렸다. 최소 6번은 거절당했다.

행복했던 두 번째 결혼, 말년엔 알츠하이머
1926년 크리스티의 생애에서 유일하게 미스터리한 사건이 발생한다. 크리스티가 11일 동안 잠적한 것이다. 어머니의 사망으로 충격에 빠져 있는 크리스티에게 설상가상으로 바람난 남편이 이혼을 요구한 게 잠적 사건의 배경이다. 전 영국이 떠들썩했다. 크리스티가 살해됐을 경우, 남편이 유력한 용의자였다. 크리스티의 자작극이라는 주장과 함께 크리스티가 남편을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일을 꾸몄다는 설도 나왔다. 크리스티의 대선배인 아서 코난 도일은 영매를 찾아가 크리스티의 장갑을 주며 생사 여부를 알아보기까지 했다. 영매는 “크리스티는 아직 살아있다”고 했으며 크리스티는 실제로 어느 호텔에서 발견됐다. 바네사 레드그레이브와 더스틴 호프먼이 주연한 영화 애거사로도 만들어진 이 실종사건은 크리스티가 일시적 기억상실증에 걸렸던 것이라는 해명으로 마무리됐다.

이 사건으로 크리스티의 내성적인 성격은 더욱 굳어졌다. 단적인 일이 1962년 일어났다. 고급호텔에서 개최된 쥐덫 상연 10주년 행사에 온 크리스티를 현관 안내인이 알아보지 못하고 입장을 못하게 한 것이다. “내가 행사의 주인공인 크리스티요” 하면 될 것을 크리스티는 아무 말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 울었다.

1928년 첫 남편과 이혼한 크리스티는 1930년 이라크 우르에서 맥스 맬로원(1904~78) 이라는 14년 연하인 옥스퍼드대 출신의 고고학자와 눈이 맞아 결혼을 한다. 크리스티는 해마다 남편과 함께 이라크·시리아로 몇 개월씩 현지 탐사를 떠났다. 크리스티는 소설로 번 돈을 고고학에 투자했다. 탐사 여행은 그가 68세였던 1958년까지 계속됐으며 남편인 맬로원은 우르·니네베·님루드 발굴에 큰 공적을 남겼다. 맬로원은 크리스티와 마찬가지로 영국 왕실이 주는 작위를 받았다. 부부는 금슬이 좋았다. 탐사 여행의 추억은 크리스티 소설의 배경으로도 활용됐다.

크리스티의 말년은 평탄했지만 그가 알츠하이머병에 걸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크리스티가 말년에 발표한 소설에 사용된 어휘를 분석해보니 전성기 때보다 어휘 개수가 15~30% 줄었다는 게 밝혀진 것이다. 크리스티는 죽기 1년 전인 1975년 작품 커튼에서 그가 사랑하던 주인공 에르퀼 푸아로를 죽였다. 뉴욕 타임스는 1면에 부고 기사를 실었다. 가상 인물에 대한 부고는 전무한 일이었다.

크리스티는 임종 당시 묘비에 두 번째 남편의 성을 따라 ‘애거사 맬로원’이라고 새기라고 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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