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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할 수 없는 대지미술은 ‘비즈니스 미술’에 대한 항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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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호 09면

1 로버트 스미슨(1938~73) 작 ‘나선형 방파제’(1970)를 2005년 4월 촬영한 사진. 소런 하워드 촬영. 출처:위키미디어 wikimedia commons 2 ‘그리닝 그린’전에 전시된 리타 윌슨의 설치미술(2010). 아르코미술관 제공 3 2010년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린 ‘그리닝 그린’전에 전시된 비반 순다람의 사진 ‘메탈박스’(2008). 아르코미술관 제공

미국 유타주 그레이트 솔트 레이크(말 그대로 거대한 소금호수)의 수면이 낮아질 때면 기이한 것이 모습을 드러낸다. 호수의 북동쪽 강변에서 호수로 몇 백m쯤 쭉 뻗어나가 끝이 대형 소용돌이를 만들며 끝나는, 돌과 진흙으로 된 길이다(사진 1). 돌에 엉겨 붙은 소금알갱이가 이 길에 침수와 드러남이 반복됐음을 알려준다. 이 불가사의한 길은 혹시 스톤 헨지처럼 고대인들이 만든 것이 아니었을까? 저 소용돌이 한가운데에서 호수의 신을 위한 제사를 지냈던 건 아니었을까?
사실 이것은 현대미술가 로버트 스미슨(1938~73)이 70년 만든 ‘나선형 방파제’다. 이 말을 들으면 신비로운 기분이 깨지면서 돈푼깨나 있는 미술가의 스케일 큰 미친 짓이라고 생각하게 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작품은 고대 신전 못지않게 진지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문소영 기자의 명화로 보는 경제사 한 장면 <21> 환경주의와 미술

지난 글에서 말한 것처럼 60년대는 팝아트의 제왕 앤디 워홀(1928~87)이 “미술작품은 상품이고 작가는 비즈니스맨”이라고 선언한 때였다. 아무리 전위적인 작품도 결국 컬렉터의 값비싼 재산목록이 되는 상황에서, ‘나선형 방파제’는 미술이 상품이자 소유물이 되지 못하도록 한 강력한 저항이었다. 이것은 구입해서 소장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순수한 미술에 봉헌된 성전이라고 할 만하다. 미술평론가 로버트 휴즈는 “매우 외진 곳에 있는 이 작품을 보러 가는 것이 순례여행 비슷하다”고 했다.

그런데 ‘나선형 방파제’는 여타 성전들처럼 항구적인 존재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은 호수에 잠겼다 나왔다 하면서 자연의 손길 속에서 침식되고 종국에는 사라지게 돼있다. 작품이 침수됐다가 나올 때마다 방파제 돌에 맺히는 소금결정도 작품의 일부다. 이처럼 작품이 대자연 속에 설치돼 자연의 힘을 받아들이고 자연의 변화 속에서 일시적일 수밖에 없는 속성을 수용하는 것을 ‘대지미술(Land Art 또는 Earthwork)’이라고 한다. 60년대 말에 탄생해 70년대에 본격적으로 전개된 대지미술은 당시 활발해진 반물질주의운동 및 환경주의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당시 서구 선진국에서는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가 절정에 이르면서 이에 대한 회의와 반발도 거세게 일어났다. 자연친화적인 삶을 추구하며 풀어헤친 긴 머리에 맨발을 한(때로는 다 벗은) 히피들이 대거 등장했고, 서구의 자연정복 사상에 반발해 애니미즘과 동양의 도가 사상이 각광을 받았다. 그린피스(Greenpeace) 같은 범세계적 환경단체도 설립됐다. 유럽 학자들의 단체 ‘로마 클럽’이 에너지 고갈로 인한 파국을 예언했고, 곧이어 일어난 석유 파동이 두려움을 확산시켰다. 70년대 말에는 지구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로 인식하는 가이아 이론(Gaia Theory)이 등장해 인간과 다른 생물이 흙과 물과 대기권과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다는 인식을 전파했다.

오늘날에는 환경주의가 서구 국가들은 물론 우리나라 사람들의 일상에도 자연스럽게 스며 있다. 비닐봉지 대신 드는 에코 백이 유행이 됐다. 신재생에너지 주식이 관심을 모으고, 영화 ‘아바타’나 다큐멘터리 ‘…의 눈물’ 시리즈가 인기를 끈다. 개발 등의 경제활동과 환경보호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조화시킬지 연구하는 환경경제학 연구도 활발하다. 환경보호가 하찮은 문제라고 생각할 사람은 이제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경제발전과 환경보호 사이에서 어디쯤 서 있는지, 환경파괴의 위험을 어느 정도로 보는지는 여전히 개인에 따라 굉장히 다르다.

이 스펙트럼에서 환경 쪽에 많이 가까이 있는 급진적 환경주의자들은 미래에 대한 무시무시한 경고를 주는 것이 특징이다. 그런 면에서 ‘인구론’으로 유명한 영국의 경제학자 토머스 R 맬서스(1766~1834)를 연상시킨다. 교과서에도 나오지만, 맬서스는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식량 생산은 산술급수적으로 늘어나므로 결국 기아와 전쟁 등의 ‘양성 제어’에 의해 인구가 조절되는 참혹한 사태가 도래하리라 경고했다.

환경운동가들은 맬서스와 비교되는 것을 달가워하지는 않는다. 맬서스의 예측은 결과적으로 틀렸으니까. 또 맬서스는 예방성 제어를 위해 식구 수에 따라 수당이 지급되는 빈민구제법의 폐지를 주장했는데, 이런 비정함은 물질주의와 대기업의 난개발과 싸우는 환경운동가들의 마음과 전혀 다르다는 견해에서다. 사실 환경운동에 딴죽을 거는 이들 중에는 ‘탐욕스러운 대기업’만 있는 것이 아니라, 환경주의가 이미 굴뚝산업을 탈피하고 친환경제품 시장을 선점하고 있는 서구 선진국의 음모라고 생각하는 개도국 사람들과, 지구온난화가 과연 온실가스 오염 때문인지 의심하는 일부 과학자도 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맬서스의 인구론과 급진 환경주의는 묵시록의 분위기를 풍긴다는 공통점이 있다. 종말이 다가오고 있으며, 그것은 인간의 잘못 때문이고, 그러니 회개하고 잘못된 생활을 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종말론적 환경주의는 폐허가 된 미래 지구의 충격적인 스펙터클을 시각적으로 구체화하고 싶은 예술적 욕망 때문에 현대 영화와 미술의 단골 주제가 된다. 지난해 환경을 주제로 열린 아르코미술관의 전시 ‘그리닝 그린’에서 인도 미술가 비반 순다람이 보여준 장대한 고철 쓰레기(사진 3)는 관람자를 압도하며 종말론적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요즘은 환경을 주제로 한 전시가 아니더라도 현대의 이슈를 다룬 그룹 전시에 환경 문제를 다룬 작품이 빠지지 않는다. 그런데 환경 꽤나 오염시킬 것 같은 합성물질과 페인트로 된 작품이 종말론적 환경주의를 주장하는 것도 종종 보게 된다. 이럴 때는 얄궂은 느낌이 들면서 심하게 모순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점을 의식하고 있는 미술가도 이미 많다.
환경주의에 영향 받은 70년대 대지미술도 사실 환경친화적은 아니었다는 지적이 있다. ‘나선형 방파제’만 해도 대규모 공사로 자연에 변형을 가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요즘의 대지미술가들은 자연에 대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고심한다. 이달 중순부터 서울 청담동 MC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 영국의 대지미술 작가 리처드 롱은 세계 곳곳을 걸어다니며 발견한 돌, 나뭇가지, 흙 등을 그 자리에서 소규모로 재배열해 사진을 찍고 그것을 갤러리에서 재현해 관람자가 자연을 호흡하도록 한다.

또 ‘그리닝 그린’전에서 미국 미술가 리타 윌슨은 전시에 사용되는 가벽을 잘라 만든 샹들리에와 그 샹들리에 조각을 잘라낸 가벽을 함께 전시했다. 이렇게 그녀는 미술 창작과 전시도 폐기물을 발생시키는 행위임을 주지시켰다. 이처럼 자기 모순에 스스로 답하며 궁극적 해답을 찾아가는 환경주의 미술가들은 환경주의의 진지한 성장을 도울 것이다.


문소영씨는 영자신문 코리아 중앙데일리 문화팀장이다. 경제학 석사로 일상에서 명화와 관련된 이야기를 찾는 것이 즐거움이다. 글도 쓰고 강의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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