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유일의 '여성군자' 정부인 안동장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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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로서 세상을 지키고
어머니로서 더 나은 세상을 준비했다.”
조선조 유일의 ‘여성君子’ 貞夫人 안동 張씨

여성君子’. 후대인들은 貞夫人 안동 張氏를 가리켜 이렇게 부른다. 이름 석자로도 제대로 불리지 못하고, 그저 한 남자의 아내이자 아이들의 어머니로 살아야 했던 조선 중기의 한 여인에게 ‘군자’라는 호칭을 부여했다는 것은 여간 파격이 아닐 수 없다. 조선시대 君子란 그 시대 남성들, 그것도 사회 지도층인 사대부들의 지향점이었으며 이상형이었다. 누구나 듣고 싶고 불리고 싶었던 최고의 호칭이었던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그를 군자의 자리에까지 이르게 한 것일까.

지독한 남성 중심 사회였던 조선에서 한 여인을 군자의 자리에 올려 놓았다. 조선사 5백년을 통틀어 정부인(貞夫人)
안동 장씨(張氏)
가 유일하다. 뭔가 독보적인 자질을 갖췄음이 분명해 보인다. 남편을 잘 모시고 아이들을 잘 키웠다면 ‘현모양처’(賢母良妻)
라는 호칭으로도 족하다. 조선 5백년사에서 이같은 현모양처는 부지기수. 이중 남편이나 자녀, 그 중에서도 아들이 높은 관직을 얻거나 대학자로서 가문을 빛나게 했다면 그 기록이 남아 있을 것이다. ‘입신양명(立身揚名. 몸을 일으켜 이름을 날림)
이 효의 끝’이라는 조선시대였으니 말이다. 여기에 학문과 예술적인 재능이 뛰어난 여인이라면 더욱 돋보일 것이요, 그래서 더욱 이름을 날렸을 것이다.
조선시대 주자학의 한 축을 이룬 율곡의 어머니 사임당 신씨가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도 군자의 호칭은 없다. 그래서 이 여인의 삶은 사임당 신씨를 넘어서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사임당 신씨의 유명세와 비교하면 안동 장씨의 무명(無名)
은 의외다. 사임당을 능가하는 한 여인의 삶이 현대인에게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이다. 율곡에 버금가는 대학자를 아들로 둔 것도 아니요, 뛰어난 예술 작품을 남기지도 않은 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이 여인에게 군자라는 최고의 호칭을 붙여줬다.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의 이름을 남겨 놓지 않았다. 여전히 ‘안동 장씨’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인간에 대한 존경심은 남녀를 불문하면서도 제도만큼은 남녀를 차별하는 가부장제의 모순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조선시대 여성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오늘날은 자본주의와 함께 도입된 개인주의와 황금만능주의, 분석적 사고 그리고 남녀평등 사회이기 때문이다. 가족·가문주의, 정신 우선 사상, 형이상학적 사고, 남녀유별이 지배했던 조선시대와 그 시대를 살아간 선조들과 함께 호흡하고 함께 생각한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더욱이 남녀평등, 여권신장, 가부장제 해체를 주장하고 그 주장이 힘을 얻는 현대는 페미니즘의 시대이기도 하다. 자칫 조선시대 칭찬받던 대부분의 여성들이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철저하게 수행했던 담지자(?)
로 비판받을 수도 있는 시대다.
더욱이 장씨에게는 군자라는 호칭이 붙어 있다. 현모양처 이상으로 조선시대 유교 이념을 실천한 사람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살 만하다. 군자라는 단어도 어딘가 고리타분한 느낌을 준다. 덕(德)
보다 재주가, 심사숙고보다 기민함이, 의리보다 계산이 앞서는 현대사회다. 아무래도 관심보다 무관심의 대상이 될 조건을 많이 갖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거꾸로 그에 대한 재조명은 충분한 가치를 갖는다. 페미니즘과 섹시즘(=반

反)페미니즘)이라는 양분법에 근본적인 의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 성인군자에 가까이 다가선 안동 張씨
장씨는 1598년(선조 31)
에서 1680년(숙종 6)
까지의 시대를 살았다. 조선시대 5백년 동안 태평성대를 누린 적이 별반 없으니 누구인들 혼란기를 살지 않았겠는가만 그가 살았던 시간은 특히 더했다. 왜란이 끝나기 전에 태어나 두차례의 호란을 겪었고 인조반정 이후 당파싸움이 조선 정계를 휩쓸었다. 그러나 그같은 혼란기에도 성인(聖人)
에 대한 흠모를 잊지 않고 평생 그 가르침을 수행함으로써 결국 ‘여성군자’라는 말을 듣게 됐다. 한국 사학계의 원로 이병도 선생이 장씨에 대해 쓴 다음과 같은 글에서 그가 살아온 삶의 시대적 배경과 그의 성품을 읽을 수 있다.
‘장부인은 선조 31년 무술년, 즉 노량해전에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왜놈의 해군을 크게 무찌른 대승전이 있었고 또 일본군이 몽땅 우리나라에서 쫓겨 달아난 11월25일의 하루 전인 11월24일 을사일에 출생해 숙종 6년 경신년, 즉 남인이 정치일선에서 물러나고 서인이 다시 집권하던 해의 7월7일 갑오일에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장씨는…무남독녀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민첩하여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으며…문필가라고 하기보다 효성스럽고 이웃과 화친했으며 현모이며 착한 아내였다는데 그 이름이 높았다.’
그의 가계(家系)
에 대한 것도 같은 책의 한 구절이면 대략적인 파악이 가능하다.
‘장씨는 이퇴계의 손자뻘 되는 경당 장흥효(敬堂 張興孝)
의 딸이요, 석계 이시명(石溪 李時明)
의 아내이며, 존재 이휘일(存齋 李徽逸)
과 갈암 이현일(葛庵 李玄逸)
형제의 어머니가 되는 분이다. …경당 장흥효는 퇴계 선생의 학문을 이어 영남학파를 있게 한 학봉 김성일(鶴峰 金誠一)
, 서애 류성룡(西涯 柳成龍)
, 한강 정구(寒岡 鄭逑)
등 세 분의 스승에게 한국 성리학의 가장 요긴한 사상을 마음과 몸으로 익히어 그 외손자인 이휘일과 이현일에게 전한 조선조 중기의 학자이다.’
그러나 이 정도 글로 장씨를 이해할 수는 없다. 훨씬 많은 정보와 지식이 요구된다. 그의 행적은 대부분 자식들이 엮은 “정부인 장씨 실기(實紀)
”에 기재되어 있다. 겨우 70쪽에 불과한 분량이지만 내용을 꼼꼼히 읽고 많이 생각하지 않으면 놓치기 쉬운 부분이 많다. 페미니스트-섹시스트적 패러다임이 세력을 확장시키고 있는 현대사회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를 이해하기 위해 가장 먼저 알아둬야 할 것은 유교에서 말하는 ‘군자’의 개념이다. 말 그대로 ‘공자왈 맹자왈’하는 옛날 얘기처럼 들리겠지만 다음과 같은 공자의 규정을 음미하며 군자론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논어”(論語)
에서 공자는 군자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 군자는 덕을 생각한다(君子懷德)

▷ 군자는 의리를 존중한다(君子喩於義)

▷ 군자는 많은 학문을 깨닫고 그것을 예(禮)
로써 행해야 한다(君子博學於文約之以禮)

▷ 군자는 근본에 힘을 쓰니 근본이 확립되면 도가 발생하며 효도와 공경은 그 인을 행하는 근본이다(君子務本本立而道生孝弟也者其爲仁之本與)

▷ 군자에게는 세 가지 도(道)
가 있으며 이를 행하기란 쉽지 않다. 첫째, 어질어 근심하지 말아야 하며 둘째, 지혜로워 유혹받지 말아야 하며 셋째, 용감해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君子道者三哉無能焉仁者不憂知者不惑勇者不懼)
.
▷ 군자는 말이 행동보다 앞서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君子恥基言以過其行)

▷ 군자는 의로써 자질을 형성하고 예로써 행동하고 겸손한 태도를 나타내며 믿음으로 모든 일을 성취한다(君子義以爲質禮以行之孫以出之信以成之)

▷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아니 하면 또한 군자가 아닌가(???)

▷ 군자는 무엇인가 한가지만 담는 그릇이 아니다(君子不器)

공자가 말하는 군자론을 훑어 보면 몇가지 특이한 사실을 알게 된다. 우선 업적을 중시하지 않는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뛰어난 학문적 업적이나 예술적 성취는 군자의 조건에 포함되지 않는다. 돈이나 권력이 있어야 군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군자의 의미는 어디서 찾을 수 있는 것일까? 동양사회에서의 군자는 단지 행위의 규범을 말해줄 뿐이다. 덕을 쌓아야 하고 의리를 중시하며 겸손해야 하고 어질고 지혜롭고 용감해야 한다. 부모님께 효도하고 학문을 중시해 늘 공부하는 자세로 살아야 하며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 한다. 그리고 남이 나를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그 길을 묵묵히 걸어야 한다….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성인(聖人)
의 길을 걸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니 성인과 군자라는 용어는 아주 좋은 모습으로 화합한다. 성인군자(聖人君子)
라 하지 않는가. 군자는 곧 성인이요, 성인은 하나의 완벽한 인격체로 어느 곳 하나 흠잡을 수 없는 인간이었다. 거의 신의 경지에 도달한 인물, 그것이 곧 성인이었고 유교가 지배했던 조선시대 선비들이 지향해야 할 최종 지향점이기도 했다. 성인을 키우자, 성인이 되자-. 그러니 조선시대 인간교육의 핵심은 바로 이곳에 놓여 있었다. 조선시대 5백년 동안 군자의 호칭을 받은 이가 그토록 적은 이유도 여기서 찾아 볼 수 있다. 성인이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경지인 것으로 보였다.
안동 장씨는 이같은 성인과 군자의 모습에 무척이나 흡사하다. 그가 훌륭한 시 몇 수와 그림 한 폭을 유산으로 남긴 것은 확실하다. 또 동아시아 최초의 요리서로 평가되는 “규곤시의방”(閨?是議方)
을 후손들에게 남겨 줬다. 하지만 이 정도의 업적은 후손이 그를 기리고 추앙하기에 어딘가 모자람이 있다. 후대 문학자나 고미술 관련자들은 그의 작품을 사임당 신씨나 난설헌 허씨 작품만큼 쳐주지 않는다. 또 오랜 동안 기억에 남아 있을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도 않았다. 그것이 황진이니 논개와 다른 점이다.
그는 우선 범인이 하기 어려운 효행과 자녀교육으로 추앙받는다. ‘하기 어려운 효’란 친정과 시가 모두를 챙겨야 했던 것에서 비롯된다. 남녀평등을 부르짖는 요즘에도 여성이 친정을 돌본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여성에게 출가외인이라는 가치가 굴레로 작용하던 시절이었으니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물론 친정을 모셔야 할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을 테고 친정까지 챙길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사정은 있었어도 환경만큼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두 집안 모두를 책임졌고 또 일으켰다. 그에게서 군자의 모습을 찾을 수 있는 근거다.

◆ 계모가 돼야 했고 계모를 모셔야 했던 기막힌 팔자
앞서 말한 대로 그는 경북 안동에서 경당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19세 때 부친의 제자인 석계와 결혼했다. 예나 지금이나 여자에게 결혼은 커다란 부담이다. 그러나 그에게 결혼이 주는 심적 부담은 예사롭지 않았다. 무남독녀이니 자신이 떠나면 부모님을 돌봐줄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요즘이라면 자주 친정을 드나들며 부모님을 모실 수도 있을 테고 아예 처가와 가까운 곳으로 이사해 돌봐드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달랐다. 더욱이 시댁은 고향에서 2백리나 떨어진 영해(寧海)
. 아무리 가고 싶은 마음이 커도 그저 마음 뿐이었다.
혼인이 더욱 마음에 꺼려졌던 이유는 남편의 상황이었다. 남편 될 사람은 이미 1남2녀 등 두 아이를 둔 기혼남. 부친은 학문의 대를 이을 제자로 보았기에 아낌없이 딸을 주었다. 비록 사별한 상태여서 첫 부인과의 갈등이나 알력은 없겠지만 남의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자기 자식과는 달리 편하게 야단 한번 칠 수 없는 것이 남의 아이를 키워야 하는 계모(繼母)
의 입장이다. 계모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좋은 이미지를 주지 않는다. 자칫 잘못하면 자식들은 물론 주변 사람들에게조차 “역시 계모”라는 소리를 듣기 십상이고 아무리 잘해도 자식으로부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어머니’ 소리를 듣기 어렵다.
가족관계에서 또 하나의 특기할 만한 일이 있다. 친정이었다. 가뜩이나 혼자여서 부모님을 떠나는 것이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아버지의 회갑이 돌아오던 해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새로 결혼을 하고 어린 이복 동생을 낳고는 10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 사이 아이가 4명이나 생겼으니 안동 장씨에게는 큰 짐이었다. 비록 계모고 이복 동생이기는 했지만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해 보면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 친정에 돈이 많은 것도 아니어서 생계까지책임을 져야 할 상황. 지금도 이 정도면 ‘기막힌 팔자’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계모가 돼야 했고 계모를 모셔야 했으니 한마디로 ‘천생 계모’ 소리를 들었을지도 모른다.
안동 장씨는 모든 짐을 떠맡았다. 그저 ‘팔자’ 소관이라는 체념어린 생각 때문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도리라는 생각이 컸다. 그래서 더 적극적이었다. 전처 소생의 아이들을 헌신적으로 키워 성품과 학식에서 남에게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인물로 키웠다. 전처 소생에 대한 그의 태도에 대해 기록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김씨 소생의 1남2녀를 맡아 가르치고 키우는데 어린 새색시답지 않게 어머니로서 예의를 다 갖췄고 자신이 낳은 자식처럼 타이르고 가르치며 꾸짖었다. 이런 모습을 본 시부모나 이웃의 일가친척 노인들은 새색시가 어린 것들을 타이르는 것이 마치 어린 자식 몇을 키웠던 아낙같다. 그 말이 절실하고 극진하니 저 아이들은 어미를 잃은 것이 아니고 죽은 어미가 살아 온 것이 아니냐며 기뻐했다고 한다.’
‘개구쟁이 어린 아이 상일(尙逸)
이 새 어머니를 맞게 된 나이는 여섯살이었다. 19살의 어머니는 여섯살짜리 아들을 업고 시집마을인 나랏골(仁良里)
에서 남쪽 5리가 되는 곳에 호를 난고(蘭皐)
라 하고 이름을 남경훈이라 부르는 선비를 찾았다. 그리고는 이 어린 아들의 훈도를 부탁하고는 근 5년을 하루같이 데리고 다니면서 면학하도록 돌봤다. 이 얘기는 지금도 그 나랏골 마을에 전한다.’
친정에 대해서는 그 이상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남편과 상의해 친정으로 돌아와 아버지를 모셨고 상처한 후 1년만에 새 아내를 맞도록 했다. 그리고 아버지와 계모를 한꺼번에 모셨다. 다시 시댁에 돌아온 것은 3년이 지난 후. 아버지와 계모가 잘 살 수 있다는 확신이 든 다음에서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계모와 이복동생들을 책임졌다. 집 근처로 이사오게 한 후 친정과 시댁 양가를 모두 모셨다. 제사와 혼사 등 모든 가례(家禮)
를 장씨 혼자 주관했으니 안동 장씨, 재령 이씨 두 집안의 기둥이었다는 말이 전혀 헛된 것이 아니었다. 이후 두 집안 모두 학문적으로 경상도를 대표하는 집안이 됐고 집안 사람들은 그 덕을 모두 안동 장씨에게 돌리고 있다.
이같은 장씨의 덕망에 이의를 제기하는 현대 여성들이 있을 것이다. 집안, 문중, 제사, 가례 등 가부장제로 운영되던 유교적 사회문화 체제에 익숙해진 규범이라고 항의할 수 있다. 무조건 따라 하기에는, 하나의 이상형으로 보기에는 문제가 있다는 얘기다. 어머니와 아내, 며느리만 있을 뿐 정작 삶의 주인으로서의 ‘자기’나 ‘자신’이 없다는 주장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계발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성취할 대상이 없으니 의미가 없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집안을 잘 돌보는 여인네로서의 조선시대 훌륭한 여성상은 더이상 먹혀들어갈 여지가 없을 듯 보인다.

◆ 아시아 최초의 요리서 규곤시의방 남겨
물론 그럴 수 있다. 남녀평등의 사회이고 여권신장의 사회이니 반드시 자기 자신은 존재해야 하고 무엇인가 자신의 계발을 위해 일해야 한다. 다른 말로 자아의 성취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장씨는 이 대목에서도 결코 현대 여성에 뒤지지 않는다. 남아 있는 것은 몇 수에 불과하지만 빼어난 시인으로서의 자질을 입증했고 남아 있는 그림 한 점은 그가 훌륭한 화가라는 사실도 깨우쳐 준다. 끊임없이 노력했고 자신을 발전시켰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그의 한시 한 수를 음미해 보자. 청담(靑潭)
법사가 “읽으면 읽을수록 무아의 경지로 이끌어가는 자연관을 엿볼 수 있다”며 극찬을 마다 않던 시다.

창밖에 쓸쓸히 비가 내리니(窓外雨蕭蕭)

그 소리가 그대로 자연이라(蕭蕭自然聲)
.
내 자연의 소리를 들으니(我聞自然聲)

내 마음 또한 자연이로다(我心亦自然)
.

나아가 그는 현대식으로 얘기하면 연구서에 가까운 저작도 갖고 있다. 아시아 최초의 요리서 “규곤시의방”이 그것이다. 단순한 요리서라기보다는 그가 꾸준한 연구와 관찰력, 경험 등 현대 학자들이 갖춰야 할 자질을 고루 갖췄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연구서다. 그러나 “겨우 요리책이냐”고 할 수도 있다. 그 역시 주어진 제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일 테고 따라서 여성의 자아를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시대적 상황을 안다면 얘기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대외활동을 엄격히 제한한 시대이니만큼 자신의 성취를 높이기 위한 주제는 집 내부밖에 없었을 테니까.
그러나 장씨는 이 틀과 제도도 깨고 말았다. 사회적 한계에 주저앉지 않았다. 그는 한의학에도 조예가 깊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 것이다. 당시 의학 분야는 여성의 참여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또 아무도 그에게 의술을 가르쳐 주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니 모두 ‘독학’으로 익힌 의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씨의 의술은 평범한 한의사를 넘어섰다. 그러니 이 대목에서라면 현대판 페미니스트들도 어느 정도 인정할 여지가 있을 것이다. 또한 이 대목에서 동양적인 군자의 한 측면을 읽을 수 있다. 늘 배우고 익히며 그 자체를 즐거워했던 것이다.
그는 특히 예술적 자질이 빼어났다. 글씨 중에서는 초서를 특히 잘 썼고 나무를 인두로 지져 그림을 그리는 낙화(烙畵)
와 수(繡)
는 당대 최고의 평가를 받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같은 예술적 재능 역시 아무런 가르침 없이 혼자 터득해 발현됐다는 점이다. 장씨의 부친인 경당을 찾았다가 그의 초서를 보고 경탄을 금치 못했던 조선 중기 서예의 대가 정윤목(鄭允穆)
의 일화는 아주 유명하다. 경당이 장씨의 글을 보여주며 평을 부탁하자 정윤목은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며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정말 놀랍다. 이 글씨에 나타난 기풍과 굳센 필세가 호기롭고 굵직한 것이 우리 동국(東國)
사람의 글씨와는 그 유(類)
를 달리하고 있다. 이 글씨를 보자마자 나는 중국의 어느 대가의 글씨를 자랑하는 것으로 알았다. 정말 대단한 솜씨다. 경탄이라는 말은 정말 이런 때 쓰는 것이었다.’
그의 책읽기와 글쓰기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시작됐다. 여기에는 부친 경당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경당은 퇴계의 제자이자 조선 중기 석학이었던 학봉 김성일의 문하. 학봉은 경당을 가리켜 “이 사람은 장차 크게 성취할 것이다. 이런 제자를 뒀으니 참으로 다행스럽다”고 말할 만큼 기대를 받았던 인물이다.
그는 장씨를 낳은 1598년 서애 유성룡이 관직을 삭탈당하고 고향인 안동으로 내려오자 곧 그의 문하로 들어갔다. 경당은 일찌감치 대학자들의 학통을 이어받을 재목으로 꼽히고 있었다. 시골 한 구석에 집을 짓고 학문에만 열중한 것으로 기록은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때 수백명이 문하생으로 들어왔다. ‘아침에서 늦은 저녁까지 강론을 하면서도 조금도 싫증을 몰랐으며 반드시 글자마다 사물마다 새기고 깊이 관찰하고 글자 하나 작은 사안 하나도 허술히 넘기는 일이 없었다’는 기록에서 그의 학문하는 자세를 읽을 수 있다.
이같은 학식을 자녀에게 이어주고 싶다는 욕심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는 일찌감치 장씨를 가르쳤다. 소학(小學)
과 십구사략(十九史略)
을 가르치면서 경당은 “배우고 가르치는 데 수고할 것이 없었다. 몇번 읽어주면 글의 내용을 상세히 알았기 때문이다”라며 어린 딸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가 선비들의 이해부족으로 가르치려다 못한 ‘원회운세’(元會運世)
를 열살 남짓한 장씨가 깨달았다 하여 매우 놀랐다는 일화도 남아 있다. 장씨는 매우 영특한 소녀였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배우고 싶은 욕망은 끝이 없어 장성한 후에도 혼자 학문을 배우고 익혔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정말 놀라웠던 것은 자신을 철저히 낮췄고 자신의 학식과 능력을 감췄다는 점이다. 작은 것이라도 알고 있다는 것을 내세우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임을 감안한다면 정말 ‘군자’의 호칭이 아깝지 않다. 어쩌면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않는다’는 군자의 수준을 넘어서는지도 모른다. 그는 남이 자신의 재주를 모르고 넘어가기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홍보하라”고 떠들어대는 요즘 세상에서는 ‘바보’ 소리를 듣기 꼭 알맞은 사람 취급을 받을 것이다. 우연한 기회에 그의 학식과 능력이 드러나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도 현모양처에 머물러야 했을 것이다. 실기에는 이같은 해석의 근거를 여럿 제시하고 있다.
우선 남편 이시명 역시 장씨의 시재(詩材)
를 전혀 몰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덕이 많고 적은 것이나 착하고 악한 것인가 하는 정도야 함께 살면 모를 리 없겠지만 사실 아내가 애써 보여주려 하지 않는 재능과 능력을 알아내기란 쉽지 않다. 이것이 답답했던지, 아니면 단순히 옛날 추억을 말하려 했던것인지 모르겠지만 장씨의 부친은 사위에게 오래 전 썼던 장씨의 시 한 수를 보여줬던 것이다. 석계는 그의 시재에 매우 놀라고 그같은 능력을 몰랐다는 사실에 크게 부끄러워 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아마도 아내가 써 놓은 옛날 시들을 수집하러 다녔을 것이다. 그는 몇 편의 시를 얻고 난 후 둘째 며느리에게 수(繡)
를 놓아 보관하도록 했다고 한다. 이 수는 “팔룡보첩”(八龍寶帖)
, 후일의 “전가보첩”(傳家寶帖)
으로 불리는 책자로 묶여졌다.

◆ “함부로 붓과 입을 놀리지 마라”
더 놀라운 일화가 있다. 그가 꽤 높은 한의학 지식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70 노인이 다돼서의 일이니 그가 한의학 공부를 했다는 것은 돌아가신 부친도 몰랐을 것이다. 어느날 손자가 토사곽란(위로는 토하고 아래로는 설사를 하며 장이 뒤틀리는 증세)
으로 심하게 앓고 있을 때 장씨는 황급히 한의 처방을 내려 병을 났게 했다는 일화다. 앓아 누은 손자, 어쩔 줄 모르고 허둥대는 가족들 그리고 한의학에는 아무 관심이 없을 것 같은 할머니가 처방을 써주는 장면은 하나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 이 상황을 지켜 본 그 자식들과 장씨의 태도는 정말 후세 사람에게 길이 전해 줘야 할 자세. 드라마라면 절정 부분에 해당한다. 자녀들은 모두 뜰로 나가 업드려 어머니께 사죄했다고 기록은 써 있다.
“소자들은 불민하여 매일 어머니의 훈육을 받으며 이처럼 자랐는데 어머님의 학식이 그토록 높고 의술까지 통하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저희에게 벌을 내려 주시옵소서.”
그러나 장씨는 자녀들을 타일렀다. 그리고 그들이 아무 잘못이 없다고 말한다. 그때 장씨가 했던 말은 성인과 군자의 기풍 그대로였다.
“너희에게 벌을 내릴 필요가 없다. 이 어미가 글을 자랑할 필요가 없어 그랬을 뿐이다. 그러니 너희가 모르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이 집에는 운악 할아버지와 석계 아버지같은 대학자가 계시지 않느냐? 그런데 내가 어찌 학문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을 하겠느냐. 너희는 모두 세상이 필요로 하는 장부들이니 함부로 칼을 빼거나 붓과 입을 놀리지 말라. 교만과 만용을 없애고 언제나 부지런하여 게으름이 없도록 하라. 꾸준히 몸과 마음을 닦아 가문을 더럽히지 않도록 하라. 그것으로 족하다.”

◆ “누구라도 배우고 노력하면 성인 될 수 있다”
그의 인애(人愛)
정신도 군자에 버금간다. 가족이나 일가친척은 물론 노비·중인·아전에 이르기까지 그의 덕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집안에서 거느리던 어린 종이나 심부름시키던 하인에게도 아들딸과 별로 다름이 없었다고 한다. 앓아 누운 종을 직접 찾아가 아픈 곳을 묻고 약을 지어주고 먹고 싶은 음식을 만들어 주어 병이 완전히 나을 때까지 돌봐줘 그 가족들이 어머니처럼 따랐다고 한다. 또 어린 종이 베를 짜다 잘못해 짜던 베가 반이나 타버렸지만 장씨는 조금도 책망하거나 노하는 빛이 없이 베틀을 고쳤다는 일화도 있다.
어려운 사람을 도왔다는 기록은 짧은 ‘실기’를 가득 메우고 있다. 심지어 집안의 물건을 서슴지 않고 내줬다는 기록도 있다. 장씨의 이런 태도를 보고 친지들은 혹시 살림을 축낼지도 모른다고 우려할 정도였다. 이때 장씨가 했다는 말은 다음과 같다.
“내 어찌 살림이 줄어들 것을 걱정하지 않겠느냐. 그러나 저처럼 어렵게 된 분이 저렇게 참고 견디어 가는 것은 마음이 어진 탓이니 내 뜻을 알아 곧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일어나는 날 나 또한 다시 넉넉해 질것이다.”
인(仁)
을 베풀면 그 덕이 다시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하늘의 이치를 꿰뚫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는 언제부터 성인과 군자가 되려고 했던 것일까. 아주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처음 공부를 시작할 때부터 성인을 그리워하고 존경하고 따라하기를 원했다는 사실을 입증할 기록이 남아 있다. 10세 전후의 소녀 시절 그가 쓴 ‘성인을 노래함’(聖人吟)
이라는 시 한 수다.

성인이 계시던 때 나지 못하고(不生聖人時)

성인의 얼굴 뵙지 못하지만(不見聖人面)

성인의 말씀 들을 수 있으니(聖人言可聞)

성인의 마음 볼 수 있네(聖人心可見)

이같은 성인에 대한 지향은 결혼하고 아이를 키워 장성하게 만든 후에도 여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록’에는 그가 성인에 대한 말을 많이 했고 그중 한 기록에서는 성인에 대한 그의 철학과 자세를 읽을 수 있다. 누구라도 배우려고 노력만 하면 성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성인이라는 분도 보통 사람과 다를 것이 조금도 없다. 아주 뛰어난 곳이 있으면 우리는 그분을 배울 수도 없겠으며 그 모양 그 언어도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보통사람과 다른 것이 있다면 그 행신하는 바가 다른 것이다. 또 사람은 언제나 일상적으로 모두 도리를 지키는 것이니 배우지 않으려는 것을 걱정할 뿐이고 애써 배운다면 어려운 것이 없다.”

◆ 안동 장씨를 바라보는 현대의 두가지 시각
페미니즘이 요동치는 요즘의 시각으로 조선시대 여성인 장씨를 제대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조선시대를 살았던 모든 여성들은 말 그대로 여성에 대한 ‘압제와 핍박’밑에서 살았으며 그 또한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같은 극단적인 가부장제 아래서 ‘최고’의 덕목을 가진 여성으로 숭상받고 있다. 자칫 당시 남성들의 구미에 맞는 여성에 불과했다는 편견에서 벗어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반대의 해석도 가능하다. 부권사회에서도 장씨처럼만 산다면 여성도 얼마든지 존경받을 수 있다는 일갈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남성도 듣지 못했던 ‘군자’의 대우를 받았던 장씨니까.
여성군자와 페미니스트. 뭔가 전혀 어울릴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김치와 피자, 된장찌개와 드레싱처럼 어떤 연결점도 찾을 수 없다. 동양과 서양의 사물 인식과 세계관의 근본적인 차이와 충돌을 보여주는 듯 보이기도 한다. 추상적이고 모호하고 행위지향적인 동양의 사상과 구체적이고 분명하며 업적지향적인 서양의 사상이다. 우리가 이제 군자론을 고리타분한 것으로 여기며 군자와 멀어진 것은 서양의 사상과 생각을 받아들인 이상 필연이다. 이미 옛날처럼 생각하고 사고하고 느끼는 기법을 잊은 지 오래다. 군자론·공자·맹자 등은 그저 먼 옛날 이야기로만 들린다.
그런데 이 여성군자가 페미니스트와 반(反)
페미니스트 논쟁에 휘말려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논쟁의 시발을 제공했던 사람은 국내 최고 작가 이문열씨. 96년 안동 장씨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장편소설 ‘선택’을 “세계의 문학”에 연재하며 격렬한 페미니즘 논쟁을 일으켰다. 이씨는 죽은 안동 장씨의 혼백이 되돌아와 페미니즘에 빠져 있는 여성들을 심하게 꾸짖는 것으로 소설을 꾸미고 있다. 초두부터 강렬한 페미니즘 비판이 시작된다. 이문열씨는 장씨로 하여금 ‘나를 수백년 세월의 어둠과 무위 속에서 불러낸 것은 너희 이 시대를 살아가는 웅녀의 슬픈 딸들’이라고 말하도록 하고 있다.
소설 속의 장씨는 인생에서 크게 두가지 선택을 하게 되는데 첫째가 문자와 학문을 하겠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그 욕심을 버리고 평범한 여인으로 가자는 선택이었다. 첫째의 선택은 소장학자로서의 아버지가 준 영향, 글을 배우러 온 선비들이 만들어 놓은 남성문화 등 환경적인 요인으로 이뤄졌지만 “아내로서 이 세상을 유지하고 어머니로서 보다 나은 다음 세상을 준비하는 것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라는 생각에 학문에 대한 욕심과 그동안의 학문적 성취를 버리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결정을 후회하지 않고 아녀자로서의 도리를 다하니 많은 공덕을 쌓게 됐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4부로 되어 있는 이 책은 각 부(部)
마다 이땅의 페미니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고 있다. 게다가 페미니즘 사상을 담은 문학작품의 실명이 쓰여져 누가 봐도 구체적으로 누구를 비판하는지 알게 해준다. 이를테면 “이혼은 ‘절반의 성공’쯤으로 정의되고 간음은 ‘황홀한 반란’으로 미화된다. 그리고 자못 비장하게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외친다”는 식이다. 또 “진실로 걱정스러운 것은 요즘 들어 부쩍 높아진 목소리로 너희를 충동하고 유혹하는 수상스런 외침들이다. 그들은 이혼의 경력을 무슨 훈장처럼 가슴에 걸고 남성들의 위선과 이기와 폭력성과 권위주의를 폭로하고 그들과 싸운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는다”는 극단적인 발언이 곳곳에 쓰여 있다.

◆ 페미니스트와 反페미니스트가 함께 저지른 잘못
페미니스트들의 격렬한 반론이 나온 것은 당연했다. “아주 잘쓴 잡품”(雜品)
이라는 비아냥이 나왔는가 하면 “글도 잘 못쓰는 이문열”이라는 인신공격도 있었다. 이문열의 몰락을 예견한 사람도 있고 그 몰락을 기대한 사람도 있었다. “서점에서 책을 치우라”는 외침과 “문화의 권력자 이문열”이라는 비판이 난무했다. 어떤 이들은 “논쟁의 정도가 너무 원색적이고 격렬해서 사회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점잖게 꾸짖었다.
물론 이씨의 견해를 적극 옹호한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왜곡된 페미니즘에 일침을 가했다”는 소리도, “역시 대단한 작가”라는 말도 나왔다.
그러나 이같은 논쟁은 한가지 가능성을 배제했다. 논쟁 자체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사회·문화의 패러다임이 지배하던 조선시대 한 여성의 삶을 현대의 페미니즘과 반(反)
패미니즘의 패러다임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여성론과 군자론은 그 자체로 유효하다. 또 주자학적이고 유교적인 맥락 안에서만 온전히 존재한다. 그곳에서 조선시대 여성을 꺼낸 후 ‘현대적’이라는 이름으로 재해석을 시도한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더욱이 장씨는 조선시대 5백년사에서 유일한 ‘여성군자’다. 이 성인을 페미니스트인가 반페미니스트인가라는 잣대로 구분한다는 것은 엄청난 모험이 아닐 수 없다.
결과적으로 이씨의 이 모험은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동양사회의 이상형 ‘군자’를 페미니즘-반페미니즘의 양분법적 사고로 해체시켜 버렸다. “선택”에서 보여진 장씨에게서 어질고 후덕(厚德)
한 ‘군자다움’은 찾아보기 어렵다. 설사 그의 혼백이 되살아났다고 해도 구체적인 실명을 거론하며 신랄하게 페미니스트들을 비난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신랄한 비판은 성인군자 장씨에게는 전혀 어룰리지 않는 덕목이다. 실수로 불을 놓쳐 짜던 베를 반이나 태워먹어도 단 한번도 야단치지 않았던 장씨다. 남이 아파하는 것, 고생하는 것을 참지 못했던 유별난 이타심과 동정심을 갖고 있던 여인이기도 했다. 하인으로 하여금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게 해 저녁을 짓지 못하는 집을 찾아 돌봐주는 자애심도 컸다.

◆ 성인을 매춘부로 전락시킨 페미니스트들
이씨의 “선택”에는 이같은 장씨의 행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러나 그의 ‘성인군자다움’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그저 논리적으로 말 잘하는 독설가로서 한 옛날 여인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하늘이 내려주신 성인을 일개 반페미니스트로 그린 탓이다. 동양식 사고를 서양식 사고로 풀었다는 것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성인을 남자냐 여자냐로 구분한다는 것초자 오류일 수 있다. 남자로 태어났든 여자로 태어났든 성인은 모든 이에게 추앙의 대상일 뿐이다. ‘인류애’는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씨의 소설은 이미 28쇄를 찍었고 30만부나 팔려 나갔다. ‘성인’과 ‘군자다움’이 빠져나간 장씨의 모습이 그만큼 유포됐다는 말과 다름 아니다.
이씨의 오류는 곧 페미니스트들의 오류를 불렀다. 이들은 이씨만큼이나 강한 어조로 이씨를 비난했고 그 과정에서 장씨는 심각하게 그 실상을 훼손당했다. 한 페미니스트는 장씨를 가리켜 “4백년 전 철저하게 남성이 원하는 모든 것을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해줌으로써 ‘정부인’이라는 허술한 소득을 챙긴 매춘 여성”이라고 썼다. 성인이자 군자가 매춘부로 전락하는 상황이 연출됐던 것이다.
또 한 페미니스트는 소설의 화자가 혼령인 것에 빗대 “가부장제의 망령이 배회하고 있다”며 비슷한 논지를 폈다. 이에 맞서 장씨 종친회는 고소를 불사하겠다고 으름짱을 놓았다. 오류와 잘못된 감정 분출의 연속이었다. 동양의 이상형 군자의 모습은 논쟁과 싸움 어디서고 찾을 수가 없다.

◆ 현대라는 감옥에서 과거를 평가하지 말자
한 페미니스트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우리는 장씨의 실상이 당시 얼마나 왜곡됐었는지를 알 수 있다.
“만일 장씨 부인이 실제로 소설에서처럼 살았다면 어땠을까. 장씨 부인은 피를 토하고 말았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억울하게 처절하게 당하면서 살았다고. 그래서 내 한평생은 눈물과 분노와 회한으로 점철된 삶이었다고. 그러니 제발 오늘을 사는 여성들이여, 절대로 나같이 살지 말라고 울부짖었을 것이 분명하다.”
이 해석은 전적으로 잘못됐다. “실기”의 내용 자체를 의심한다면 모를까 이씨의 소설 “선택”은 “실기”의 모든 것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의 내용은 역사적 사실에 가까운 것이다. 단지 “실기”에 드러나지 않은 페미니즘에 대한 생각을 이씨가 만들어 넣었고 이 대목에서 장씨의 삶 전체가 오해받고 말았다. 장씨에 대한 이미지 훼손은, 따라서 1차적으로는 이씨가 책임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장씨의 혼백이 있다면 그는 이같은 논쟁을 어떻게 볼까. 자신의 삶과 이미지를 깼다고 화를 낼까.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며 한 사람의 손을 들어줄까. 아무래도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다. 자신이 어떻게 훼손됐든 개의치 않고 아무 말 없이 누구의 잘못이든 용서해 줄 것이다. 그리고 따뜻이 어루만져 줄 테고 본인이 할 수 있는 한 스스로 잘못된 곳을 고치려 할 것이다. 아무도 몰래, 아무에게도 알리지도 않고…. 그것이 조선시대 그리고 있는 성인이요, 군자의 모습이 아닐까. 그리고 이 모습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추앙받아 마땅하다. 자꾸만 서구식 사고에 물든 우리가 ‘현대의 감옥’안에 앉아서 우주를 논하던 과거의 시대, 과거의 사람을 재서는 곤란하다. 자신의 편협한 사고의 대변자로 활용한다는 것은 더더욱 문제다. ‘신성모독’(神性冒瀆)
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가난한 이들에게 깊은 연민 보인 민중적 정서 돋보여
안동 장씨와 학발시 삼장(鶴髮詩 三章)

장씨 부인의 시는 아주 이채롭다. 다른 여성들의 글과는 달리 철학적 사색과 학문에 대한 감회를 표현하는 시가 많아서다. 또 그는 자신과는 별 상관이 없는 다른 계층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그들의 슬픔과 고단한 삶을 노래했다. 학자들은 이른바 ‘민중시’로 분류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어서 당시 다른 남성의 시들과도 차별점을 찾을 수 있다고 평가한다. 그 당시 양반집 출신의 많은 여류 시인들의 시적 주제는 자연, 효심, 님에 대한 그리움, 옛날의 회한 등. 주로 자신의 감정을 시로 표현했다. 이에 비춰 볼 때 인류애를 희구하는 그의 높은 인간 정신을 엿볼 수 있다.

‘학발시 ‘3장’(鶴髮詩 三章)
’이 이같은 장씨의 인류애를 느끼게 해 준다. 제목 ‘학발시 3장’은 학의 털과 같이 뽀얗게 센 머리의 할머니를 읊은 3장의 시라는 의미다. 열다섯살에 아들과 남편을 변방에 보낸, 이웃 동네의 어느 가난한 집을 다녀온 후 지은 이 시는 사언(四言)
의 고시(古詩)
로 “장부인 실기”(實紀)
마지막 부분에 초서로 쓰여 있다. 글체는 호쾌하다는 평. 내용만 보면 그 나이에 지은 시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민초들의 처절함이 알알이 배어 있다. 시를 지은 동기부터 갸륵하기 그지없다.
“며느리가 수심에 잠겨 시어머니를 모시지만 만리 먼 변방에 군역 간 아들과 남편은 소식이 없다. 숨이 끊어졌다 이어졌다, 깜박깜박하며 언제 죽을지 모르는, 80이 넘은 애절한 시어머니를 보고 나도 슬퍼 이 시를 짓는다.”
그 내용은 지금도 보는 이의 애를 끊는다.

새하얀 머리 되어 병에 지쳐 누웠는데(鶴髮臥病)

자식은 만리 밖에 있구나(行子萬里)

자식이 만리 밖에 있으니(行子萬里)

어느 달에 돌아올꼬(曷月歸矣)

새하얀 머리 되어 병을 껴안고 누웠으나(鶴髮抱病)

서산에 지는 해는 붉게 타며 저물어 간다(西山日迫)

하늘에 손을 모아 빌고 또 빌어 봐도(祝手于天)

어찌해 하늘은 막막하기만 할까(天何漠漠)

머리 하얀 어미는 병을 부추겨(鶴髮扶病)

일어서고 또 넘어진다(或起或陪)

지금이 이와 같은데(今尙如斯)

찢어진 속옷 자락이 어찌하랴(絶据何若)

기다림에 지친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삶. 불쌍한 시어머니는 아들의 환영을 찾아 병든 몸을 이끌고 찢어진 속옷을 펄럭이며 아들의 환영을 찾아 거리로 뛰쳐나가고, 며느리는 그런 시어머니를 쫓아 뛰어나가 붙잡고 함께 운다. 남편과 아들을 기다리며 눈물과 한숨 속에서 몸부림치는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히 보이는 듯하다.
이 시는 흔히 중국 당송팔대가의 첫째로 꼽히는 백낙천의 시 ‘사부미’(思婦眉)
와 비견된다. 하나도 손색이 없다는 평가다. 백낙천은 민중적 시풍으로 억울한 사람들의 슬픔과 기쁨을 표현한 시인으로 유명하다. 사부미는 출정한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의 마음을 노래한 ‘슬픔에 젖은 아내의 눈썹’이란 의미. 두 시를 함께 읽으며 비교해 보면 색다른 한시의 맛을 느낄 수 있다.

동쪽에서 봄바람 어지러이 불어오니(春風搖蕩自東來)

살구꽃, 복숭아꽃 모두 꺾이고 매화는 터져 없어졌다(折盡櫻桃綻盡梅)

그래도 그리움에 지친 아내의 속눈썹은 그냥 남았으니(惟餘思婦愁眉結)

끊임없이 불어오는 봄바람도 시름을 덜어 주지는 못하는구나(無限春風吹不開)

[이재광<이코노미스트 기자·사회학 박사>
] 월간중앙 제 288호 1999.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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