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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하우의 역설 … 다른 업체와 공유한 기업이 잘 나간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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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호 27면

Q:셋톱박스를 만드는 벤처 1세대 휴맥스가 창업 21년 만에 연매출 1조원 시대를 열었습니다. 신생 대기업 웅진·이랜드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이죠. 대부분의 중소기업과 벤처들로선 꿈같은 일입니다. 대기업과 거래하는 대다수 중소기업·벤처들은 오늘도 이래저래 시름이 깊습니다.지난해 중반 이후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상생이 화두입니다. 상생, 과연 어떻게 해야 하나요? 대기업의 역할은 무엇이고 중소기업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정부의 몫은 무엇이죠? 벤처 강국이 되려면 생태계를 어떻게 가꿔야 하나요?

경영구루와의 대화<5> 조현정 비트컴퓨터 회장②

A:상생하려면 기업 생태계를 잘 가꿔야 합니다. “삼대 가는 부자 없다”는 속담이 있지만 경주 최부자 가문은 소작인들의 마음을 얻어 오래도록 부를 누렸습니다. 상생하는 생태계를 만들어 놓았더니 도적들이 날뛸 때 소작인들이 일어나 도적질을 막았지 않았습니까. 여기서 대기업은 협력업체와 상생해야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하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죠. 실제로 주변을 돌아보고 상생에 공헌한 기업은 오래갑니다. 공자님 말씀 같지만 주변에 베풀어야 큰 부자가 됩니다.

반면 대기업과 B2B 거래를 하는 중소기업과 벤처는 독보적인 제품을 만들어야 합니다. 대기업이 안 사려야 안 살 수 없는 제품을 만드는 거예요. 그러면 경쟁자가 덤핑도 할 수 없어요. 기술에서 앞서든지, 가공 능력이 뛰어나서 불량률이 제로이거나 하다 못해 납품기간이라도 단축해야 물건을 사 주지 않겠습니까. 대기업과 상생하려면 중소기업은 중소기업대로 체질을 개선해야 합니다.

요즘 정부가 나서 상생이니 동반성장이니 하지만 상대가 대기업이니까 정부가 대신 목소리를 높이는 거지 중견기업 간에 분쟁이 생기면 정부도 심판 노릇을 할 수 없습니다. 결국 기술력으로 시장을 지배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들어내는 것 말고 다른 왕도란 없습니다. 수출은 또 하나의 활로입니다.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디바이스를 만드는 어느 중소기업 사장이 노키아와 거래하니 마진이 훨씬 크다고 하더군요. 과거엔 노키아 같은 회사가 한국 중소기업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결국 우리 중기 제품의 품질이 대기업과 거래할 만한 수준이 되니까 주문을 하는 거예요. 한때 중소기업이 주축인 대만 모델이 각광을 받았지만 저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협력하는 우리 모델이 좋다고 봅니다.

비트컴퓨터는 교육사업도 합니다. 교육 부문만 떼어놓고 보면 분명 적자입니다. 하지만 교육사업을 하다 보니 엔지니어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고 교육할 공간이 필요해 부동산에 눈뜨게 됐죠. 그런데 외환위기가 닥치자 교육사업은 오히려 더 잘 되는 거예요. 그 후 경제가 호전되면서 부동산이 뛰더군요. 그 바람에 부동산 가치 상승으로 교육사업의 적자를 만회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비트교육센터를 만든 것은 실은 벤처 생태계를 개선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제가 몸담고 있는 소프트웨어 업계가 잘 되려면 뛰어난 소프트웨어 개발자가 많아야 합니다. 소프트웨어 개발은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1990년에 비트교육센터를 만들어 고급 인력을 양성했습니다.

당시 개발자들은 90% 이상이 코볼이란 프로그래밍 언어를 쓰고 있었습니다. 코볼은 기업의 인사·경영 관리 등 사무용 응용 프로그램을 짤 때 주로 쓰는 언어로 용도가 극히 제한적이죠. 한편 그 무렵 C랭귀지를 알게 됐는데, 이것으로는 OS, 네트워크, 보안 등 모든 프로그램을 짤 수 있었습니다. 당시 C랭귀지를 쓰는 개발자는 전국적으로 100명이 채 안 됐습니다. 저는 C랭귀지를 대중화하기로 마음먹고 비트의 교육생들에게 이 언어를 6개월 이상 전문가 수준으로 가르쳤습니다. C랭귀지를 쓰는 회사가 거의 없어 마지막 한 주는 코볼을 가르쳤죠. 이들에게 “취업을 하면 C랭귀지의 장점에 대해 잘 설명하고 사내에 이것을 보급하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한국엔 코볼 사용자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반면 일본은 개발자의 30% 이상이 여전히 코볼을 씁니다. 생태계가 바뀐 거죠. C랭귀지의 대중화는 우리나라가 소프트웨어 경쟁력을 확보하는 토대가 됐습니다.

소프트웨어 업계 전체의 상황이 좋아야 개별 기업의 실적도 좋아집니다. 그러면 다시 업계가 성장하는 선순환이 일어나죠. 그러자면 업계가 노하우를 공유해야 합니다. 그런데 IT 엔지니어들을 보면 나름의 노하우를 남들과 공유하려 들지 않습니다. 저는 이런 노하우를 공개해 그것이 더 이상 누구만의 노하우가 아니라야 업계가 지속적으로 성장한다고 봅니다. 역설적이지만 노하우가 많은 사회는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할 수 없습니다. 경제적으로 급성장했지만 대한민국은 여전히 작은 나라입니다. 이 적은 인구로 더 많은 고부가가치 제품을 생산해 내려면 업계마다 노하우를 서로 공유해야 합니다.

노하우를 공유하려면 네트워크가 강력해야 합니다. 이 네트워크를 타고 노하우가 흐르기 때문이죠. 그런 취지로 비트교육센터를 제가 비트 스쿨(學派)로 개명했습니다. 여기 출신은 수료 전 반드시 국내 최초의 소프트웨어 작품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저마다 창의적인 프로젝트를 해야 합니다. 그 성과로 코스닥에 상장된 회사도 있어요. 이 비트 프로젝트의 성과를 우리는 다 공개합니다. 내부적으로만 공유하고 비트 출신에게만 전수하는 게 아니라 17년째 전 사회적으로 공유하고 있어요. 우리가 공들여 개발한 기술은 누구나 무상으로 쓸 수 있습니다. 특히 비트 출신이라는 네트워크는 이런 기술이 전파, 확산되는 통로죠.

기업 생태계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창의적인 양질의 인력입니다. 외환위기 당시 패러다임 혁신을 통해 한국이 IT 강국으로 거듭났듯이 스마트 시대엔 우리가 소프트웨어 강국으로 자리매김해야 합니다. 그래서 한국이 스마트 시대의 리더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만한 저력이 있어요. 1년 전 세계적으로 아이폰 열풍이 불었습니다. 그 중심에 소프트웨어가 있었죠. 그런데 지금 갤럭시S가 일본 시장에서 아이폰 4G만큼 팔립니다. 세계인이 열광하고 있고 미국 타임지는 올해 최고의 상품으로 선정했습니다. 국내 소프트웨어 업계의 저력이 확인된 셈이죠.

취업도 보장 안 되는 청년 인턴제에 재정을 투입할 게 아니라 소프트웨어 개발자 30만 대군을 양성해야 합니다. 개발자가 많아야 일감을 들고 인도로 향하는 외국 바이어들이 한국으로 발길을 돌리죠. 소프트웨어는 인도 사람이 강하다고 하는데 한국인이 더 잘합니다. 인도는 0의 개념을 만들었고 인도에 가면 구멍가게 주인도 19단을 외운다고 하는데 0은 특허가 없어 아무나 쓸 수 있고 19단을 외워야 프로그램을 잘 짜는 것도 아닙니다. 또 인도에 가면 영어를 쓴다고 하지만 모든 프로그램 개발자가 영어를 잘해야 하는 건 아니에요. 일부 코디네이터만 잘하면 되고 영어권 유학파도 많아 우리도 그 정도 인력은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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