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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 자르르 초겨울 고등어, 가을 무와 조리면 ‘환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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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호 10면

고등어는 그야말로 ‘국민생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 어릴 적인 1960년대만 해도 꽁치와 도루묵이 아주 저렴한 생선이어서 늘 서민의 밥상을 채웠고, 결혼 직후인 80년대 중반에는 꽁치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정어리가 가장 값싼 생선이어서 1 년 내내 정어리 구이에 정어리 조림만 해먹었던 기억이 있다(그 후유증으로 정어리는 물론 꽁치조차 쳐다보기도 싫다). 그런데 바다가 어찌 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이제 도루묵은 비싼 값에도 어렵사리 찾아 먹는 향수식품이 됐고, 정어리는 시장에서 구경조차 할 수 없다. 대신 그 자리를 꿋꿋하게 지키고 있는 생선은 역시 고등어다.

이영미의 제철 밥상 차리기 <39> 국민 생선 고등어

김창완이 부른 노래 ‘어머니와 고등어’는, 하필이면 그 생선이 고등어이기 때문에 더 충격적이고 감동스럽다. 그것이 도미나 민어 같은 고급 생선이었다면 얼마나 안 어울리겠는가. 그저 누구나 먹을 수 있는 가장 값싼 생선 고등어, 그것이나마 사서 깨끗이 다듬고 소금 뿌려 냉장고에 넣어둔 어머니, 한밤중에 목이 말라(아마 술 마시고 늦게 들어와 잤을 게다) 냉장고를 열어본 아들, 옆방에서 잠든 어머니의 가늘게 코 고는 소리 등은, 서민 가정의 전형적인 풍경을 생생하게 형상화해 내면서, 김창완의 스테디셀러 노래로 자리 잡았다.

어떻게 고등어 같은 것을 대중가요의 소재로 삼을 생각을 했을까. 전에는 고등어와 삼치가 봄에 제철이라고들 했는데,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다. 사실 고등어와 삼치는 가을이 깊어가면서 기름이 많아지고 맛도 고소해진다. 아마 몇십 년 전만 해도 사람들의 입맛이 너무 기름진 고등어와 삼치보다는, 다소 담백한 고등어 맛을 더 즐겼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기름지고 고소한 음식이 지천으로 깔린 지금은, 고등어 역시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늦가을과 초겨울에 가장 맛있다는 생각이 든다.

고등어회도 여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기름지다. 주머니 사정은 넉넉지 않으나 입맛만 ‘미친 존재감’을 자랑하는 회 매니어들은, 저렴한 전어회 시즌이 끝나고 나면 고등어를 찾게 된다. 비교적 저렴한 값에 진한 생선 맛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전어와는 달리 비교적 부드럽게 살만 떠내어 회를 치니, 전어 뼈 씹느라 지친 입도 오랜만에 호사를 한다. 도톰하고 고소한 고등어 살을 고추냉이 발라 간장에 찍어 입에 넣으면, 그저 살살 녹는다는 표현 말고는 더 할 말이 없다. 어디 이 맛을 양식 광어 맛에 비하랴.

요즘은 개별 포장된 간고등어가 워낙 여러 종류가 나와 있어서 사시사철 생선 한번 안 주무르고도 편안히 구워먹게 되는데, 그래도 초겨울에만은 비린 생선 도막을 물에 씻고 냄비에 안치는 수고로움에도 불구하고 고등어조림이 더 입에 당긴다. 제철을 맞은 생물 고등어의 신선도를 그대로 즐기고 싶은 생각도 있으려니와, 무엇보다도 1 년 중 가장 맛있는 가을 무 때문일 것이다. 생선조림의 부재료인 무나 묵은 김치를 주인공 생선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나는 생선조림 속의 무가 많이 물러 간이 폭 밴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무를 먼저 조리기 시작한다. 조림의 양념은 집집마다 취향이 다르다. 고등어에 소금으로 밑간을 하고, 조림은 조선간장과 고춧가루로만 깔끔하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예 고추 양념은 제쳐놓고 간장과 물엿·청주 등으로 일본식 조림을 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그 중간쯤이다. 고등어는 절이지 않고, 간장과 고추장을 기본으로 하여 조리는 방식이어서 약간 얕은 맛이 있고 매콤한 맛도 감도는 것을 좋아한다.

작은 냄비에 물 붓고 간장·고추장·설탕을 푼 후 도막 낸 무를 먼저 안친다. 국물이 팔팔 끓어 무가 어느 정도 무른다 싶을 때에 고등어를 넣는다. 생선은 너무 가열하면 단백질이 굳어 빡빡해지고 맛도 많이 빠진다. 무는 점점 맛있어지지만, 정작 생선조림의 생선이 맛없다면 그 역시 매력이 없다. 무를 먼저 조려 간을 배게 한 후, 나중에 생선을 넣으면 부드럽게 생선이 익는 시간과, 무에 생선 맛과 간이 배어 무르는 시간이 얼추 맞아떨어진다. 이 방법은 다른 생선조림에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생선이 얇고 부드러운 갈치 같은 경우는 처음부터 무와 함께 갈치를 넣고 조리는 것보다, 무를 먼저 넣는 것이 훨씬 맛있다.

생선이 끓기 시작하면 파와 마늘, 그리고 풋고추를 조금 썰어 넣는다. 풋고추의 상큼한 냄새가 생선조림의 비린내와 잘 어우러진다. 이렇게 한소끔 끓여 고등어 살이 속까지 익었다 싶을 때 그대로 상에 올린다.

무가 맛있을 때에는 이렇게 무 조림을 하는 것이 좋지만, 봄이 되어 김장 김치의 맛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김치를 넣는다. 김치를 넣으면 모든 비린내·누린내가 확 잡혀지니, 비린 고등어조림과는 잘 어울린다. 김치로는 꼭 배추김치가 아니어도 된다. 시어 꼬부라진 갓 김치, 김장할 때에 너절너절 몇 이파리씩 남아 김장포기 위에 얹어놓았던 우거지 진 김치, 알타리무 김치 먹고 무청만 남아 냉장고 안에서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던 것, 온갖 것들이 다 괜찮다. 방법은 무를 넣을 때와 동일하지만, 김치에 간이 꽤 배어 있는 상태이므로 간장의 양은 좀 줄여야 한다.

생선조림의 양은 약간 모자란 듯하게 하는 것이 좋다. 아무래도 남은 조림을 한 번 더 데우면 맛이 현격하게 떨어지기 때문이다. 고등어 두어 도막에다 빨갛게 양념이 밴 말랑한 무, 자작하게 얹힌 양념 국물까지 한 끼에 다 해치우는 게 좋다. 젓가락으로 고등어 살을 헤집어 무 한 도막과 함께 입에 넣는다. 갓 익어 부드러운 살에서 고소한 육즙이 나와 입에 감돌고, 짭짤하게 간이 밴 무가 함께 어우러진다. 아, 밥 먹고 싶다.


이영미씨는 대중예술평론가다.『팔방미인 이영미의 참하고 소박한 우리 밥상 이야기』와 『광화문 연가』『 한국인의 자화상, 드라마』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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