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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Story] 닌텐도 게임 ‘마리오’의 창조자 미야모토 시게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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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모자를 쓴 키 작은 마리오가 파란 하늘 아래 들판을 신나게 달린다. 산 넘고 강 건너 악당에게 붙잡힌 피치 공주를 구하기 위해 끝없이 전진하는 모양새가 우스꽝스럽고 사랑스럽다. 빠른 걸음걸이도 아니요, 변변한 무기 하나 없지만 경쾌한 음악에 맞춰 쉼 없이 달리는 마리오는 세계인을 동심의 세상으로 끌어들였다. 그런 마리오가 올해로 25세가 됐다. 닌텐도의 세계적 게임 캐릭터 ‘마리오’를 탄생시킨 주인공 미야모토 시게루(宮本茂) 정보개발본부장(대표이사 전무)을 8일 교토의 닌텐도 본사에서 만났다. 기자 앞에 나타나 명함을 내미는 그의 손에 쥐어진 명함집. 디즈니 캐릭터 ‘미키마우스’ 명함집이다. “아니, 마리오의 아버지가 미키마우스 명함집을?” 그러자 그는 어릴 적 꿈은 만화가였다고, 자신은 열렬한 미키마우스 팬이라고 밝혔다. 수퍼마리오 브러더스 외에도 ‘동키콩’ ‘젤다의 전설’ ‘닌텐도 DS’ ‘위(Wii)’ 등으로 세계인을 열광시킨 ‘비디오게임의 아버지’ 인터뷰는 이렇게 시작했다.

도쿄=박소영 특파원

●당신이 어릴 적 미키마우스의 팬이었다면 지금의 많은 아이는 마리오의 팬이다.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어릴 때 인형극을 재미있게 보고는 인형극 연출가가 되려고 한 적이 있다. 나중에 만화에 흥미가 생겨서 중학교 때는 만화클럽을 만들어 만화에 빠져 지냈다 . 그때 그리던 실력으로 초창기 마리오 그림은 내가 혼자 그렸다. 마리오가 세 살 무렵(1988년), 미국 아이들의 캐릭터 인지도 조사에서 미키마우스보다 마리오가 더 인기라는 결과가 나왔다. 물론 기뻤지만 당시 벌써 50살이 넘은 미키마우스와 세 살배기 마리오를 비교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마리오가 25세가 됐다.”

●당신이 만든 게임의 매력은 무엇인가.

 “과거엔 아이들이 야구시합을 하면 주먹구구식으로 규칙을 정하고 심판 대신 아웃이나 세이프는 힘센 아이의 말로 정해지곤 했다. 그런데 컴퓨터가 놀이에 보급되면서 기계가 심판을 보고 컴퓨터가 게이머의 행동에 적절히 반응을 하게 된 거다. 그러니 지금의 게임이 재미가 있을 수밖에 없다. 닌텐도 게임이 특별히 더 재미가 있다면 그건 우리 회사가 장난감을 만드는 회사였기 때문이다. 장난감의 시스템, 놀이의 성질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회사가 비디오게임이라는 새로운 기술을 이용해 제품을 만드니까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재미에 가장 가까이 갈 수 있었다. 우리의 목표는 모든 사람이 행복한 미소를 짓게 하는 거다.”

미야모토 시게루 전무가 8일 교토 닌텐도 본사 사무실에서 25세의 ‘마리오’ 와 포즈를 취했다.

●게임을 젊은 남성의 전유물에서 성별과 세대를 초월한 대상으로 한다는 ‘만인(萬人)대상’의 정신인가.

 “과거 스페이스 인베이더와 수퍼마리오처럼 붐을 일으킨 게임, 더 거슬러 올라가면 미국에서 개발된 요요 등 놀이는 어린 세대에 국한하지 않고 전 세대에 영향을 미쳤다. 닌텐도가 지향하는 정신이다. 하지만 우연히 어떤 게임이 인기를 끌고 속편이 계속 만들어지면 열광적인 팬이 늘어난다. 게임 개발자는 그 팬들에게 보답하기 위해 더 어려운 속편을 만들게 된다. 게임의 성능을 높이고 캐릭터도 더 화려하게 만들다 보니 사람들이 점차 게임에서 멀어져 갔다.”(수퍼마리오로 세계 비디오게임 시장을 주름잡았던 닌텐도는 1996년 출시한 닌텐도 64가 흥행에 실패한 데 이어 소니·마이크로소프트 등이 게임 사업에 진출하면서 타격을 입었다.)

●닌텐도의 혁신은 실패에서 나왔다는 말인가.

 “그렇다. 게임을 만들기 시작한 원점에서 다시 한번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소니·마이크로소프트·세가는 물론 가전회사까지 경쟁적으로 게임을 만들다 보니 모든 게임이 비슷비슷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리만의 것을 찾아야 한다는 판단이 선 게 2000년이었다. 그렇게 해서 세상에 등장한 것이 닌텐도DS다. 일부 매니어 게이머가 아닌 다섯 살 손자와 95세 할아버지 모두가 즐길 수 있는 게임이었다. DS는 특히 손가락으로 십자버튼을 눌러 조작해야 했던 기존 게임기에 익숙지 않은 사람을 위해 펜 하나로 작동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아이디어가 적중했다.”

●닌텐도DS와 잇따라 나온 Wii는 놀이를 통해 머리운동을 하고 요가나 스키·에어로빅을 할 수 있게 했다. 기발한 아이디어는 어디에서 나왔나.

 “중년이 되면서 체중이 늘어나는 게 신경이 쓰였다. 운동 삼아 수영을 했는데, 주위에서 ‘체중을 재기만 해도 다이어트가 된다’는 말을 하더라. 집에서 체중을 재고 100g 단위로 그래픽을 만들어 봤다. 그러자 나의 체중 변화가 식구들의 화제가 됐다. 체중을 화제로 딸과의 대화도 늘어나게 됐다. ‘이걸 게임으로 만들 수 없을까’ 하는 고민이 ‘Wii Fit’ 개발로 이어졌다. 체중계를 만들고 나니까 요가 트레이닝·에어로빅·스키점프 등 접목시킬 수 있는 종목이 줄줄이 나왔다. 지금까지 닌텐도 체중계는 전 세계에서 3000만 대가 팔렸다.”

●모든 게임은 당신의 경험을 통해 나왔나.

 “내 취미가 곧 상품으로 나온다는 말을 종종 한다. 집에서 애완견을 기르다가 ‘닌텐독스’를 만들고, 체중을 재다가 ‘Wii Fit’, 한동안 정원 가꾸기를 하다가 ‘피크민’이라는 게임을 개발하게 됐다. 내가 갖고 있는 정보가 어떤 계기를 통해 상품으로 만들어졌다. 옛날부터 미술관에 가는 것을 좋아했는데, 요즘은 미술관 음성 가이드에 관심이 많다. 사람들은 내가 미술관에 자주 가니까 곧 다음 상품으로 이어지나 관심을 갖기도 하는데…(웃음). 상품으로 이어지는 아이디어가 한순간에 떠오르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물론 떠오르는 것은 한순간이다. 하지만 그 아이디어가 떠오르기까지는 평소 많은 주제의 문제를 머릿속에 담고 있어야 한다.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누구나 생각할 수 있지만, 생각해 내지 못하는 기발한 아이디어는 어떤 조건만 맞으면 금방 해결되는 문제들이다. 게임 개발을 하는 후배에게도 이런 말을 자주 한다. 아이디어는 좋지만 개발비가 많이 든다거나, 재료 혹은 기술이 없어서 만들지 못하는 게임도 있다. 그런 아이디어를 계속 쌓아두면 어느 시점에서 기술이 개발되거나 비싸도 사겠다는 소비자가 나타날 수 있다.”

●게임을 만드는 과정을 소개해 달라.

 “기본적으로 아이디어는 혼자 생각한다. 내가 생각한 것, 혹은 다른 개발자가 생각한 아이디어에 충실하게 하기 위한 회의를 한다. 그 사람의 편향된 아이디어를 보완하거나 구체적으로 살을 붙이는 과정이다. 게임 플래닝 작업은 2~3명 선, 많아도 5명을 넘지 않는다. 나중에 프로그래머나 음악 등 전문가가 가세해 10명 정도가 한 제품 생산에 참여한다. Wii 스포츠 같은 경우는 종목별로 관리자를 둔다. 그리고 전체를 총괄하는 관리자가 종목별 감수를 한다. 그 과정에서 게임에 등장하는 인물과 동·식물 등을 추가해 간다.”(닌텐도에는 미야모토 정보개발본부장에게 주어지는 권한이 한 가지 있다. 게임을 만드는 과정에서 재미가 없다 싶으면 즉시 작업을 중단해 백지 상태에서 다시 생각한다. 일명 ‘밥상 뒤집기’다.)

●창의적인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별도의 후배 교육이 있나.

 “선배의 어깨 너머로 보고 배우는 게 많다. 내 제자가 나를 보고 배우고, 그 제자가 스승이 되어 다시 제자를 키우는 식이다. 그런데 바로 위 선배만 보고 배우다 보면 자기 연배의 사람들하고만 직접 교류를 하게 되는 일이 생기더라. 최근엔 차를 마시면서 젊은 사원과 교류하는 공부 모임을 종종 갖는다. 나와 베테랑 부장 한 명이 옛날 게임을 개발하던 이야기를 해준다 .”

●미래의 게임은 어떻게 변화할까.

 “아무도 모른다. 15년 전에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 게임 시장에서 벌어지고 있다. 앞으로는 자동차 회사나 금융업계에서 게임을 만들 수도 있고….”

●몇 해 전 마이크로소프트에서 거액의 연봉(지금 연봉의 10배)을 제시하며 스카우트하려 한 일이 화제가 됐다.

 “그 회사는 내게 평생 원하는 일을 하게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자기 회사에서 마리오를 만들어 달라는 뜻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곳에서 마리오를 만든다는 게 재미가 없을 것 같았다. 앞서 말한 것과 상반될 수 있겠지만 게임을 만든다는 건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한 게임을 만들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 마음을 나눈 친구가 있어야 한다. 지금 나와 함께 일하는 팀원은 30년간 동고동락한 사람들이다. 이런 동료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난 갈 수 없었다.”

“미야모토의 취미를 적에게 알리지 말라”

젤다의 전설 캐릭터.

미야모토 시게루는‘수퍼마리오브러더스’ ‘동키콩’ ‘젤다의 전설’ ‘Wii’ 등 수많은 히트작을 탄생시킨 게임 개발자다. ‘비디오게임의 아버지’로 불리는 게임업계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1952년 교토 출생.

 가나자와(金澤)미술공예대학에서 공업디자인을 전공하고 1977년 닌텐도에 입사했다. 지금은 닌텐도의 대표이사 전무 겸 정보개발본부장으로 프로그램 개발 일선에서 활약 중이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들판을 달렸던 추억을 떠올리며 만든 수퍼마리오브러더스는 2008년 4000만 장 이상 판매돼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게임으로 기네스북에 올랐으며 현재 누적 판매량은 2억 4000만장이다. ‘젤다의 전설’ 역시 어린 시절 산과 동굴을 돌아다니며 보물찾기를 하던 기억을 되살려 만든 작품이다. 이후에도 자신의 취미생활을 ‘DS’ ‘Wii’ 시리즈로 만들어 히트시켰다. 사내에서 “미야모토의 취미생활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하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다. 상복도 많다. 1998년 미국 게임업계 공로자로 평가돼 ‘인터랙티브 아츠 앤 사이언스 학회 명예의 전당(AIAS Hall of Fame)’에 이름을 올렸고, 2006년엔 프랑스의 예술문화훈장 슈발리에장을 받았다. 같은 해 미국에서 열린 세계 게임쇼 ‘E3’에서 영화계 거장 스티븐 스필버그와 ‘Wii’로 테니스 대결을 벌여 화제가 됐다. 2007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이름을 올렸다.

닌텐도 121년의 역사

화투 → 완구 → DS → Wii …
삼성도 그 혁신을 배운다

<그래픽을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세계인 열광시킨 비디오 게임의 아버지 #25년 전 ‘마리오’ 만든 미야모토 시게루 #“95세 할아버지와 5세 손자가 함께 즐긴다 … 모든 사람이 행복한 게임, 그게 목표다”

이건희 삼성 회장의 아들인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당시 전무)은 지난해 4월 일본 교토에 있는 닌텐도 본사를 방문했다. 그가 닌텐도를 찾은 이유는 협력관계를 강화한다는 의미도 있었지만 닌텐도가 삼성이 추구하는 창조 경영의 본보기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닌텐도의 비디오 게임인 ‘위(Wii)’는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이 볼링 게임을 즐기고, 유명 배우 앤절리나 졸리가 피트니스 게임으로 출산 후 몸매를 다듬을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닌텐도는 게임을 단순히 청소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모두 즐길 수 있는 가족놀이의 반열에 올려놨다. 화투를 만드는 회사에서 세계 최대 게임업체로 성장한 닌텐도의 창조 경영은 세계적 기업인 삼성도 벤치마킹할 만한 대상이었다.

 삼성만이 아니다. 국내 주요 기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도 닌텐도는 도요타를 제치고 ‘국내 기업이 가장 벤치마킹하고 싶어 하는 일본 기업’ 1위에 오르곤 한다. 한낱 화투 회사에 불과했던 닌텐도가 세계 게임업계을 좌지우지하게 된 힘은 무엇일까. 발상을 통한 창조적 변신에 있다. 120여 년간 ‘놀이문화’라는 한 우물을 팠지만 고비 때마다 과감하게 변신했다. 시작은 화투 회사로, 그 다음엔 완구 회사로, 요즘엔 비디오 게임 회사로 창조적 탈바꿈을 했다.

 1889년 야마우치 후사지로(현 야마우치 히로시 닌텐도 최고상담역의 증조부)는 교토에서 화투를 만드는 공장 문을 연다. 당시 닌텐도가 만든 ‘대통령’이라는 화투는 다른 제품과 달랐다. 화투를 바닥에 내려칠 때 소리가 나도록 화투의 앞·뒷면 사이에 석회가루를 넣었다. 이 제품은 닌텐도 최초의 히트 상품이 됐다.

 화투 성공 후 닌텐도는 ‘서양 놀이’에 눈을 돌린다. 1902년부터 서양 카드(트럼프) 생산에 나섰다. 53년엔 일본에서 획기적인 제품인 플라스틱으로 만든 트럼프를 선보였다. 여기에 미국의 월트 디즈니와 제휴해 미키마우스 등 유명 캐릭터를 그려넣으며 즐거움(Fun)도 불어넣었다.

 하지만 화투와 트럼프만으로는 높아지는 고객의 눈높이를 맞출 수가 없었다. 성장은 침체됐고 위기감은 커졌다. 이때 닌텐도가 빼든 칼은 완구시장 진출이었다. 63년 닌텐도는 완구와 장난감 분야에 진출하며 다시 한번 전성기를 맞는다.

 85년에 나온 게임업계 최대의 히트상품인 수퍼마리오는 ‘운’이 많이 작용했다. 80년 닌텐도의 미국법인이 아케이드게임 사업에 실패하자 재고를 처분하기 위해 여기에 쓸 게임을 만들어 달라고 본사에 요청한다. 당시 본사에선 “장사가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곳에 쓸 인력이 없다”며 입사한 지 몇 년 되지 않았던 ‘신참’ 미야모토 시게루에게 이 일을 맡긴다. 그는 프로그래밍을 제외한 대부분을 혼자 담당해 ‘동키콩’이라는 게임을 81년 내놓는다. 이 게임은 큰 인기를 끌었고, 주인공 캐릭터의 이름으로 닌텐도 미국법인이 입주해 있던 건물주 이름인 ‘마리오’가 붙여진다. 수퍼마리오는 테트리스보다 더 많이 팔렸다. 그 후 미야모토는 닌텐도의 ‘얼굴’이 된다.

 2000년대 초 닌텐도는 화려한 그래픽의 게임기에 밀려 게임기 시장 1위를 소니에 내주고 2위 자리도 후발주자인 마이크로소프트(MS)에 빼앗길 처지에 놓인다. 당시 MS가 닌텐도를 인수하겠다는 의사를 노골적으로 표시할 정도로 닌텐도는 ‘모욕’을 당한다. 2002년 부임한 이와타 사토루 사장은 위기 타파를 위해 새로운 전략이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직원과의 대화를 반복했다. 이를 통해 기존 고객이 아니라 게임을 전혀 하지 않는 잠재 고객을 대상으로 하는 게임기를 개발하자는 발상의 전환에 도달한다. 닌텐도는 결국 펜으로 누구나 쉽게 게임기의 화면을 문지르거나 톡톡 치는 방식을 도입한 닌텐도 DS와 직접 몸을 움직여야 게임을 할 수 있는 ‘Wii’를 잇따라 선보이며 부활에 성공한다.  

김창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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