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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장애인 체전 청주서 사흘 열전] "마음 열게 해준 선생님께 금메달 따서 보답할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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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장애를 넘어
제25회 장애인 체전이 청주종합경기장에서 막을 올렸다. 경기 첫날인 11일 남자 400m 휠체어 경기에 출전한 충남의 김광준 선수가 힘차게 트랙을 질주하고 있다. 청주=강정현 기자

▶ 육상 남자 400m T11(시각장애) 경기에 출전한 선수가 가이드 러너의 끈을 잡고 뛰고 있다(上). 원반을 던지는 선수(中)와 바를 뛰어넘는 여자 높이뛰기 선수의 얼굴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청주=강정현 기자 .연합

▶ 전국장애인체육대회 보치아 종목에 참가하는 박요한(左) 선수가 11일 충북대체육관에서 보조자인 강욱희 교사와 연습에 열중하고 있다. 실제 보치아 경기에서 지도자는 공을 볼 수 없다. 청주=강정현 기자

휠체어에 앉은 채 멀리 떨어져 있는 하얀 공을 노려보던 박요한(20.지체장애 1급.숭덕학교 고등부 3년)군이 강욱희(43)교사에게 뭔가 중얼거렸다. 보조자는 공 쪽을 볼 수 없다는 경기규칙에 따라 강 교사는 박군의 지시만 들으며 홈통의 각도를 조절했다. 드디어 박군이 어렵게 공을 쥐어 홈통에 떨어뜨렸다. 데구르르 구른 빨간 공은 정확히 하얀 공 옆에 멈추었다. 사제 간의 호흡은 완벽했다.

11일 오전 충북대 체육관. 전국장애인체전 보치아 종목에 충북 대표로 참가한 박군이 실전과 다름없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박군은 홈통 부문(BC3) 개인전(12일)과 페어전(13일)에 출전한다. 연습 후 "진짜 경기에서도 잘해야 할 텐데…. 졸업하기 전에 꼭 금메달을 따서 선생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박군의 표정은 진지했다. 부모가 없는 그에겐 강 교사가 아버지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저는 세 살 때쯤 한 여관에서 발견됐대요. 청주 희망재활원에서 자라다가 아홉 살 때 충주에 있는 숭덕원으로 오면서 학교에도 들어갔어요."

사실 박군이 그런 과거를 담담하게 얘기할 수 있게 된 건 최근의 일이다. 뇌성마비 장애인이 대부분인 숭덕학교 학생들 중에도 박군처럼 부모가 아예 없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는 자신을 버린 부모를 원망하며, 혼자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런 박군을 변하게 한 건 숭덕학교 선생님들의 보살핌이다. 선생님들의 지속적인 관심에 박군은 마음을 열었다. 박군은 전교 학생회장직도 맡게 될 만큼 활달해졌다. 부모가 없는 다른 친구나 동생들의 마음을 열어주고 싶다고 한다.

특히 강 교사는 박군에게 새로운 삶의 목표를 제시해 줬다. 체육담당인 강 교사의 지도로 육상을 시작한 박군은 2003년과 2004년 전국장애인체전에도 충북 대표로 참가, 장애가 심한 선수들을 위한 멀리던지기 부문에서 연속 금메달을 땄다. 이번 대회에서도 육상 부문 금메달 가능성이 컸던 박군이 보치아로 종목을 바꾸도록 한 사람 역시 강 교사였다. 국제대회에 참가할 기회가 더 많아질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요한이 같은 중증장애인이 생계를 유지할 만한 직업을 갖기는 너무 어려워요. 그나마 국제대회에서 입상하면 연금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강 교사는 "요한이는 성실하고 머리가 좋아 두뇌싸움이 필요한 보치아도 잘 해낼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또 공을 직접 던지기조차 힘든 선수가 대상인 BC3 부문의 경우 선수와 보조자의 호흡이 메달 색깔을 결정할 정도로 중요한데, 이 부분 역시 자신있다고 했다. 박군이 강 교사를 아버지처럼 따르듯, 강 교사도 박군을 죽은 막내동생처럼 여기기 때문이다. 강 교사가 특수교육을 전공한 것은 바로 뇌성마비 장애인이었던 막내동생의 영향 때문이었다. 그 동생은 집 안에서만 지내다가 스무 살도 못 돼 사망했다. 강 교사는 20여 년 전 학교 근처에도 못 가본 동생이 유아 프로그램을 통해 익힌 한글로 군대에 가 있던 형에게 위문편지를 써보낸 것을 보고 '장애인도 기회만 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선생님과 제자, 비장애인과 장애인, 그 '환상의 호흡'은 이미 금메달감이었다.

청주=김정수 기자 <newslady@joongang.co.kr>
사진=강정현 기자 <cogit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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