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클립] Special Knowledge <215> 국회 미술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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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8면

‘국회’ 하면 뭐가 생각나십니까. 정치인들의 싸움판요? 하지만 국회엔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비밀이 적잖게 숨겨져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김기창·천경자 등 당대 화가들의 그림 471점이 보관돼 있다는 점입니다. 1200여 점이나 되는 호암미술관만은 못해도 전문 미술관이 아니란 점에서 상당한 규모입니다. 국회는 어떻게 이 그림들을 모았고, 어디에 보관하고 있을까요. 국회 속 그림과 사연들을 소개해 드립니다.

선승혜 기자

도서관 수장고엔 희귀서적 1만5000권도

빈프리트 후베 ‘손기정 선수 동상’ 부분.

국회가 한국 미술품의 숨은 보고(寶庫)가 된 사연은 이렇다. 사회 유력 인사들이 그림을 사서 기부도 하고, 화가들이 국회 내에서 전시회나 초대전을 열면서 기증하기도 했다. 물론 국회가 미술계 지원을 위해 매해 예산을 책정, 구매한 그림도 제법 된다. 덕분에 국회 곳곳에 걸고도 남을 그림들이 모이게 됐고, 소장 가치가 크거나 오래된 그림은 국회사무처가 국회도서관에 이관하기도 했다. 국회도서관이 고문서 등을 수집하며 미술품 보관 능력을 갖췄기 때문이다. 지금은 국회사무처가 121점을, 국회도서관이 350점을 각각 관리한다. 1980년대 이전의 오래된 그림은 주로 국회도서관 소속이다.

제대로 관리되지 않던 국회 내 미술품들은 97년 조달청이 ‘정부 미술품 보관관리규정’을 만들면서 체계적으로 정리된다. 2002년 국회도서관은 개원 50주년을 기념해 ‘소장미술품 도록’을 발간했다. 2005년에는 의정관 지하에 수장고(收藏庫)도 지었다. 실내온도 18~20도, 습도 50%가 일정하게 유지되는 177평 규모의 수장고엔 미술품뿐 아니라 1만5000권에 달하는 희귀서적, 고서 등도 함께 보관돼 있다. 국회 사무처 관계자는 “사실 어떻게 들어왔는지 모르는 그림들도 많다”며 “군사정권 시절 ‘울며 겨자 먹기’로 기증받은 그림들도 많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독일 조각가 후베가 기증한 ‘손기정 동상’

수집에 사연이 있는 만큼 한국 작품이 대부분이다. 외국 작가의 작품은 채 다섯 점이 되지 않는다. 그중 독일 조각가 빈프리트 후베(Winfried Huwe)의 ‘손기정 선수 동상’에 얽힌 사연이 이채롭다. 베를린 올림픽 때 초등학생이었던 후베는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 금메달을 따는 모습이 오래 뇌리에 남았다고 한다. 그 뒤 한국에서 올림픽(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손기정 선수의 브론즈 동상을 만들어 국회에 기증했다. 그는 아들 알브레히트 후베(Albrecht Huwe)는 독일 본 대학에서 한국학 교수로도 일했다. 국회에 소장된 대표 미술품들은 다음과 같다.

국회가 소장한 주요 작품

① 장우성 ‘백두산 천지’ 이 그림은 여의도 국회의사당과 함께 태어났다. 75년 지금의 여의도 부지에 국회의사당을 지을 때 주문 제작했기 때문이다. 백두산 천지 사진을 구하기 어려웠던 시절이라, 북한을 방문한 모 언론사 회장이 구해온 사진을 선우종원 당시 사무총장이 입수해 화가에게 전달해 그렸다고 한다. 1000호(가로 650㎝, 세로 190㎝)에 달하는 대작을 설치하기 위해 의원식당 옆 벽면을 새로 설계했다. 설계 단계부터 이 그림을 위한 자리를 마련했기 때문에 가까이서 보면 그림이 벽 속에 살짝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도 그 자리에 그대로 걸려있다. ‘백두산 천지’는 ‘이순신 영정’과 함께 월전 장우성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② 장운상 ‘첼로와 여인’ 목불 장운상은 월전 장우성, 이당 김은호와 함께 근현대 인물채색화의 3대가로 꼽힌다. 생전 별명은 ‘미인화가’. 한국 여성상을 섬세한 필치와 맑은 채색으로 그려냈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55년 제4회 국선특선작으로, 그의 초기 대표작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국회 운영위원장실에 걸려 있어 여야 정쟁이 있을 때마다 TV 카메라에 배경으로 등장했다.

③ 김인승 ‘화실’ “역사적으로 중요한 명작이 국립현대미술관 같은 데에 들어가지 않고 어떻게 국회도서관이 소장하게 됐는지 그 경위를 정확히 확인할 순 없으나, 국회도서관으로서는 그 소장을 대외적으로 크게 자랑 삼기에 충분하다.”(이구열 한국근대미술연구소장)

 한국 현대 미술사에서 1930년대를 대표하는 이 작품은 지연 김인승이 28세에 그렸다. 외국 인사들을 접대할 일이 많은 국회의장 공관에 걸려 있다가 현재 보존 등을 이유로 국회도서관 수장고에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기획한 ‘한국근대회화 100선전’에 나들이를 하기도 했던 그림이다. 조달청은 이 그림을 국회가 보유한 그림 가운데 가장 고가(高價)인 1억5000만원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그 가치는 값으로 따질 수 없다(국회도서관 관계자)”는 설명이다.

④ 천경자 ‘개구리’ 천경자의 이색적이고 특이한 소재 취향을 그대로 보여주는 그림이다. 69년 국회가 직접 구입한 그림이다. 의장 공관 접견실에 한동안 걸려있었으나 역시 국회도서관 수장고에 보관 중이다.

⑤ 이만익 ‘뿌리 깊은 나무’ 이만익은 88년 서울올림픽 미술감독을 지내기도 했는데, 올림픽 유치위원장을 지냈던 고(故)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이 국회의원 재직 시절 기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83년작인 이 그림은 올림픽이라는 테마에 맞춰 ‘화합’이라는 제목으로 89년 목판화로 다시 제작되기도 했다.

⑥ 장리석 ‘소한’ 소한(消閑)은 ‘한가한 틈을 메우다’란 뜻으로 노인들이 장기를 두는 한낮의 풍경을 그렸다. 오른쪽 안경을 쓴 노인은 장리석의 친구인 만화가 박효식의 아버지라고 한다. 화가는 2년 뒤 박효식의 아버지를 그린 작품 ‘그늘의 노인’으로 국전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⑦ 김기창 ‘만추’ 현대 전통화단의 거장 운보 김기창의 그림이다. 운보가 즐겨 다뤘던 소재인 부엉이가 댕강나무 가지 위에 앉아있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짙은 먹으로 그려진 수리부엉이의 날개와 유머러스한 얼굴 표정, 주변 나뭇가지에 달린 붉은 열매가 대비된다.

⑧ 김종학 ‘숲’ 국회 본청 정론관(기자실) 옆에 걸려 있다. 김종학 화백은 설악산에 살며 그곳의 4계절을 그리는 ‘설악산 화가’로 유명하다. 지난해 ‘설악산의 여름’은 국내 경매에서 2억7500만원에 거래되기도 했다. 국회는 김 화백의 작품을 두 점 가지고 있는데 모두 기증받았다. 조달청은 ‘숲’을 3000만원, 다른 작품 ‘설악’을 1500만원으로 감정했다. ‘설악’은 보관실에 보관 중이다.



국회의장 집무실에 걸리는 그림 … 의장 취향 따라 바뀌었죠

국회사무처는 최근 의장 집무실에 운보 김기창의 ‘청록산수’를 새로 걸었다. 푸른 산 아래 소나무가 그려진 이 그림을 건 것은 한국적 정취가 풍기는 그림을 좋아하는 박희태 의장의 취향이 반영됐다고 한다. 외국 귀빈을 맞을 일이 많은 의장 접견실에는 구한말 화가 허형의 ‘노송도십곡병’이 걸렸다. 외국 손님들이 흑백의 소나무 그림을 보며 한국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갖기를 바라는 의도에서다. 이처럼 국회의 미술품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국회의장의 ‘그림 정치’와 만난다.

공식 행사가 많은 의장집무실과 접견실에 걸린 그림들은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만큼 국회의장의 취향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 국회의장이 국회 내 각종 문화예술 행사를 총괄하는 만큼 그림 매입이나, 전시회 등에도 영향을 미친다.

김형오 전 의장(2008~2010년)은 재임 당시 현직 의장으론 최초로 독도를 방문하는 등 독도에 관심이 많았다. 국회 본청 민원실에 걸린 박석환씨의 ‘독도의 아침’은 김 의장 시절 기증받은 것이다. 김 의장의 집무실에는 같은 화가의 그림 ‘상생의 정치’가 걸렸다. 태극기와 국회의사당이 어우러진 이 그림은 여야가 정쟁에 매몰되지 않고 화합의 정치를 펴기를 바라는 김 의장의 뜻이 담겼다.

2004~2006년 국회 사무처는 유난히 그림을 많이 구입했다. 김원기 의장이 미술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당시 국회는 제주 4·3 항쟁 연작화로 유명한 강요배씨와 민중미술가 신학철씨의 그림을 구매해 화제가 됐다. 강씨의 그림은 노무현 대통령 시절 청와대에도 들어가, 참여정부와 여당의 정치 성향을 상징적으로 드러냈다는 얘기가 나왔다.

김수한 전 의장은 국회 내 전시회를 자주 열었다. 그는 “의원들이 문화예술에 대해 관심을 갖도록 미술대전 등에서 입상한 작품들을 본청 로텐더 홀에 자주 전시했다”고 말했다. 고서화 전시회도 수차례 열었다고 한다.

국회 사무처 관계자는 “과거에 비해 국회의 미술품 구입 예산이 대폭 삭감되면서 좋은 그림을 사기가 어려워졌다”고 전했다. 현재 박희태 의장과 정의화 부의장, 홍재형 부의장실에 걸린 그림들은 대부분 금호아시아나 문화재단과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등에서 대여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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