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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대구에서 품은 강군의 꿈 (210) 제주도 신병 훈련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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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6·25전쟁이 발발한 뒤 대한민국 신병 훈련소로 쓰였던 제주도 모슬포 제1 훈련소 정문 앞에 장병들이 서 있다. 10만 명 수용 규모의 모슬포 훈련소는 북한군과 중공군에 맞서 싸울 수많은 병사를 조련했다. 당시 명칭은 정문 왼쪽 기둥에 써있듯이 ‘강병대(强兵臺)’였다. 김웅철씨가 편저한 『강병대-그리고 모슬포』(남제주문화원)에 수록된 사진이다.

한반도 중간을 가르는 긴 전선이 형성되고, 그곳에서 우리는 북쪽으로부터 내려온 대규모 병력의 중공군, 전쟁 뒤 다시 건제(建制)를 이룬 북한군을 동시에 맞아 싸워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여러 가지 문제가 함께 닥쳤다. 군대의 급식 문제를 해결하는 한편으로 내가 주목한 것은 신병(新兵) 양성 문제였다.

 내가 이끄는 육군본부가 해야 할 일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것이 전선으로 끊임없이 새 병력을 보내는 일이었다. 작전 지휘권은 미 8군이 행사한다고 하지만, 그 뒤를 받쳐주는 병력과 식량 보급 등은 육군본부가 수행해야 했다.

 당시 신병 훈련소는 세 군데가 있었다. 중공군 참전으로 전선이 다시 남쪽으로 밀리면서 만든 제주도 모슬포 훈련소와 지금도 운영하고 있는 논산 제2 훈련소, 그리고 거제도의 제3 훈련소였다. 이 세 군데에서 훈련을 받은 신병들을 제때 전선으로 보내는 일은 적과 교전 중인 대한민국으로서는 아주 중대한 사안이었다.

 일본군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군에 패한 원인이야 여럿 있겠지만, 그 가운데서도 중요한 요인으로 꼽히는 것 하나가 신규 병력 보충 시스템이었다. 일본은 당시 사단별로 신규 병력을 양성하는 시스템을 운용하고 있었다. 중앙에서 일괄적으로 양성하는 집중형이 아니라 각 사단급 지휘관들의 판단과 능력에 맡기는 분산형이었던 것이다.

 그에 비해 미군은 중앙에서 신규 병력을 체계적으로 양성한 뒤 시의적절하게 전선으로 병력을 공급하는 시스템을 형성하고 발전시켜 나갔다. 중앙에서 대규모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훈련받은 병력은 각 전선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는 최고지휘부의 결정에 따라 신속하고도 정확하게 전선으로 배치됐다. 그 점이 미군의 승리를 이끌었던 원동력의 하나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미군은 중공군 참전이 현실로 나타나고 전선이 남으로 밀리는 상황에 부닥치면서 이 신병 훈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주도 모슬포에 제1 훈련소를 만들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모슬포는 원래 일제 강점기 때 일본군이 중국 난징(南京)을 폭격하기 위해 사용하던 중간 기지였다. 일본에서 출격한 폭격기가 급유(給油) 문제로 한 번에 난징까지 날아갈 수 없자 중간에 잠시 내려 기름을 공급받도록 하기 위해 모슬포 기지를 세웠던 것이다.

 그전까지만 해도 우리 군의 신병 보충 시스템은 일본의 분산형을 답습하고 있었다. 각급 부대의 지휘관이 자체적으로 판단해 현지에서 병력을 모아 훈련하는 방식이었다. 대개 사단별로 병력을 모은 뒤 훈련시켜 예하의 각 부대에서 결원이 생길 경우 이를 보충하는, 주먹구구 방식이었다.

 51년 출범한 제주도 모슬포의 훈련소 신병 양성기간은 16주였다. 미군의 커리큘럼에 따라 소총병 기초훈련을 모두 마칠 수 있었다. 보병 외의 병과는 육지로 나온 뒤 각 병과학교에서 추가 교육을 받고 전선으로 향했다. 전황(戰況)이 다급해지면 속성으로 신규 병력을 훈련시켜 전선으로 보내기도 했으나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모든 과정을 충실히 이수하도록 했다.

 모슬포 훈련소는 병력 10만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설은 참으로 형편없었다. 당시로서는 급조할 수밖에 없던 상황이어서 모두 천막을 치고 그 대규모 병력을 수용해야 했다. 게다가 물도 충분하지 않았다. 제주도는 화산지대여서 비가 내려도 물이 땅 밑으로 바로 스며들고 만다. 따라서 번듯한 하천이 없어 물을 구하기가 참 어려웠다. 신병과 훈련소 요원들이 물 부족에 시달렸던 것은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다.

 그래도 제주도를 선택한 것은 그때의 급한 상황 때문이었다. 당시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선이 다시 밀리기 시작해 정부가 대구와 부산으로 밀려났다. 따라서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뭍에서 멀리 떨어진 제주도에 신병 훈련소를 세웠던 것이다.

 그런데 비가 자주 내리고 바람이 거세게 부는 제주도 훈련소의 여건은 결코 좋을 리가 없었다. 천막은 비에 젖어 늘 축축했고, 그런 비를 몰고 온 거센 바람은 천막을 가끔 날려 보내 그 안에 있던 신병들을 추위에 떨게 했다.

 더 큰 문제는 그런 비와 바람 때문에 병력을 제때 함정에 실어 옮길 수가 없었다는 점이다. 제주도는 1년 중 비바람 때문에 배가 다닐 수 없는 날이 90일 정도였다. 당시에는 해군의 LST가 목포와 제주도를 오가면서 장정들을 뭍에서 섬으로 옮기고, 이미 훈련을 마친 병력을 섬에서 뭍으로 실어 날라야 했다. 그러나 비바람으로 인해 LST가 제대로 운항할 수 없는 날이 많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제주도에 태풍이라도 닥치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제주도 훈련소에 공급할 식량이 끊기고, 하루 평균 500명 정도씩 배출하는 신규 병력을 전선으로 보낼 수 없어 전투에 나선 일선 지휘관들이 아우성을 치는 일이 빈번했다.

 육군참모총장에 오른 뒤 그런 제주도 훈련소를 시찰하면서 나는 문제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점을 다시 깨달았다. 당장에는 모슬포 제1 훈련소를 폐기할 수 없었다. 그나마 전선으로 내보낼 수 있는 신병들을 그만큼 대규모로 키울 수 있는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일단 그 훈련소 책임자를 경험이 풍부한 사람에게 맡겨야 한다고 판단했다. 더구나 전시에 소집한 젊은이들이 지휘관들의 비리로 대거 굶어 죽었던 ‘국민방위군 사건’이 터진 게 불과 얼마 전이었다. 우선 그런 사건이 아예 벌어질 수 없도록 청렴하면서도 노련한 지휘관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이응준 장군을 떠올렸다. 그는 당시 60을 바라보는 국군의 원로로, 육군대학 총장을 맡고 있었다. 인격적으로 훌륭한 이 장군이 훈련소를 맡아 운영하면 문제의 소지가 많은 제1 훈련소가 그나마 제대로 유지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나는 제주도 훈련소를 시찰하고 돌아온 뒤 육군대학으로 이 장군을 찾아갔다.

정리=유광종 기자

백선엽 예비역 대장의 방미 일정으로 본 회고록 11월 10~12일자를 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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