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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진의 시시각각

새로 드러난 10·26 비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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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해마다 가을이 되어 10·26이 찾아오면 나는 오래된 의문에 빠지곤 했다. 쿠데타 같은 치밀한 대책도 없이 김재규는 왜 그렇게 무모하고 우발적인 일을 저질렀을까. 그는 왜 자신의 죽음을 향해 코뿔소처럼 돌진했을까. 얼마 전 나는 김재규가 숨겨 놓았던 비밀을 찾을 수 있었다. 은퇴한 언론인으로부터 “김재규는 극심한 발기부전(發起不全)에 시달렸으며 주치의가 살아 있다”는 정보를 들었다.

주치의 Q씨는 “환자의 비밀은 의사의 생명”이라며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역사의 중요한 열쇠”라고 설득했다. Q는 마음을 바꾸었다. “1976~77년 사이 서너 번 정도 그를 진찰했습니다. 김 부장이 박 대통령을 시해(弑害)한 바로 그 궁정동 안가였어요. 그의 음경을 손으로 만졌는데 단순한 기능부전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고장 나 있었어요. 당시엔 비아그라가 없었는데 있었어도 듣지 않았을 겁니다. 그때는 조형물 삽입술도 없어 국내에선 치료할 수 없었지요.”

 50세의 김재규는 간경화를 앓고 있었다. Q는 “간경화도 발기부전 원인 중 하나일 것”이라고 진단했다. “유일하게 기대볼 수 있는 미국산 약물이 있었는데 간에 아주 위험해 쓸 수 없었습니다. 마지막 방법으로 나를 가르쳐준 미국인 은사에게 김 부장을 데리고 가려 했습니다. 미국에 가려면 대통령에게 얘기를 하고 사표를 써야 하는데 끝내 결단을 내리지 못하더군요.”

 Q는 치료를 포기했다. 그후 2년여 동안 김 부장은 ‘잃어버린 남성’으로 깊은 좌절을 겪었을 것이다. 김재규는 그렇지 않아도 권력의 스트레스와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있었다. 자신은 장군 출신인데 육군 대위 출신 차지철 경호실장이 마구 무시했던 것이다. 건강에서도 김은 차지철에게 크게 밀렸다. 차지철은 공수특전단 시절 장병에게 태권도를 가르쳤던 무술 유단자였다. 건강한 차지철을 보면서 김재규는 ‘남성의 싸움’에서도 지고 있다고 느끼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런 차지철을 싸고도는 박 대통령이 미웠을 것이다. Q는 “김 부장은 발기불능으로 스트레스와 우울증을 겪었을 것이다. 이런 심리상태가 10·26 같은 과격한 행동을 우발적으로 저지른 원인 중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권력자의 건강이 역사에 영향을 끼친 사례는 많다. 역사학자 헨리크 에베를레(Eberle)가 히틀러 주치의 모렐(Morrell) 박사의 처방전 자료를 분석해 보았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55세의 히틀러는 고혈압·복통·두통에 자주 시달렸으며 어떤 때는 82종류의 약을 먹은 것으로 나타났다. 유대인 학살 같은 괴기스러운 행동이 비(非)정상적인 건강과 관련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권력자는 건강한 모습만으로도 그 나라의 생기를 상징할 수 있다. 오바마·클린턴의 듀엣과 후진타오·원자바오·시진핑의 트리오는 활력의 대결에서도 G2의 용호상박(龍虎相搏)을 보여준다.

 영국의 철학자 베이컨(1561~1626)은 “건강한 육체는 영혼의 거실이고 병든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라고 했다. 김재규의 영혼은 감옥 속에서 얼마나 고통을 받았을까. 그의 영혼이 거실에 있었다면 한국의 현대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31년이 지난 지금 한반도의 역사는 ‘권력자의 건강’이란 암초와 다시 한번 충돌하고 있다. 권력자는 뇌졸중 후유증으로 왼쪽 어깨가 처지고 왼쪽 다리를 끌고 다닌다. 오른쪽 뺨에는 검은 반점이 점점 커지고 있다. 남한 의사들은 당뇨병으로 인한 신장기능 이상 때문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건강이 이상한 권력자의 나라에서 이상한 일들이 이어지고 있다. 야음(夜陰)의 바다에서 천안함을 폭침해 46명을 죽이고, 26세의 청년이 3대 세습자가 되어 인민군을 열병했다. 놀랍고 우려스러운 일이지만 더욱 불투명한 것은 이러한 일들이 이상한 시대의 진입부에 불과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뉴욕의 화물선이 킹콩이 있는 안개의 바다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처럼….

김진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