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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엽 타계] ‘북한 민주화’ 못 보고 떠난 비운의 망명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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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김정일의 평양 만경대지구 건설 현장 현지지도를 수행하고 있는 황장엽씨(오른쪽). [중앙포토]

13년 전 그의 한국행은 ‘주체사상의 망명’으로 불렸다.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 3년 동안 비틀거린 김정일 정권의 붕괴를 예고하는 신호탄으로도 해석됐다. 그런 그가 김일성 가계의 3대 세습 축포가 쏘아 올려진 10일 홀연히 눈을 감았다. 97년 2월 12일 망명 당일 작성한 성명서에서 “내가 바라는 것은 북조선 인민을 하루빨리 기아에서 벗어나게 하고 우리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밝힌 꿈을 끝내 실현하지 못한 채…. 87세.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 황장엽씨는 ‘주체사상의 대부’로 불렸다. 김일성 체제의 이념적 토대가 된 사상적 틀을 잡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그는 망명 하루 전 일본에서 끝난 주체사상 국제세미나에서도 김정일 체제를 찬양했다. 하지만 이튿날 베이징(北京) 주재 한국대사관 영사부의 문을 들어섰다. 김정일 독재체제에 대한 염증과 그에 동조해 온 데 따른 양심의 가책 때문이었다고 한다.

1980년대 말 옛 소련을 방문하는 김일성(왼쪽)을 환송하기 위해 나온 황장엽 당시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원 안)와 김정일(오른쪽). [연합뉴스]

황씨는 평남 강동에서 한학자 황병덕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44년 2월 일본 주오(中央)대 법학과 2년을 중퇴한 그는 모교인 평양상업학교의 수학·주산교사로 재직했다. 평범한 그의 삶에 변화의 전기가 된 건 46년 11월 노동당 입당이다. 청년 사회주의자 황씨는 49년 10월 모스크바 국립대학으로 유학의 길을 떠나 53년 11월 귀환한다. 6·25의 포연이 채 가시지 않은 이듬해 1월 그는 31세의 나이에 김일성종합대학 철학강좌장으로 부임한다. 이후부터 그는 출세가도를 달렸다. 58년 1월 노동당 총비서 서기실(비서실) 서기를 지낸 그는 42세에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을 맡았다. 72년 12월부터 11년간 국회의장 격인 최고인민회의 의장을 지냈다. 79년부터 망명 때까지 서열 20위권을 유지하며 과학·교육 분야와 국제담당 비서로 재직했다. 이런 그의 망명은 북한 최고위층의 탈북으로 기록됐다.

황장엽 전 비서가 망명 전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 왼쪽부터 아들 경모씨, 황 비서, 부인 박승옥씨, 며느리. 황씨 가족은 모두 숙청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황씨는 비운의 망명객이었다. 김영삼 정부는 그에게 남한 내 자유로운 집필과 강연 등 활동을 보장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97년 말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면서 황씨에게는 시련이 닥쳤다. 대북 햇볕정책을 추진하던 김대중 정부에 고인은 눈엣가시였다. 미국과 일본 등에서의 증언이나 강연 요청이 쇄도했지만 발이 묶였다. 정부가 ‘한반도 정세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여권 발급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황씨는 김정일 체제를 비판한 집필이나 언론 인터뷰 내용을 놓고 정부와 국정원 측과 심각한 갈등을 빚기도 했다. 남북 정상회담 5개월 뒤인 2000년 11월 국가정보원은 황씨의 북한 민주화 구상을 “편협한 북한 붕괴론적 시각에서 냉전적 사고를 확산해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급기야 노무현 정부 출범 5개월 만인 2003년 7월 황씨는 자신의 심복이자 동반 망명자인 김덕홍 여광무역연합총회사 사장과 국가정보원의 안가에서 쫓겨나게 된다.

노망명객을 더욱 외롭고 괴롭게 한 건 두고 온 가족 문제였다. 모스크바 유학 시절 만난 부인 박승옥(82)씨와 그는 1남3녀를 뒀다. 장남 황경모(50)씨의 처는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의 조카로 알려져 있다. 김형직 사대 교수인 맏딸과 의사인 둘째·셋째 딸, 교수와 당 간부·외교관인 사위들은 황씨의 망명 이후 모두 숙청됐다. 황씨는 북한 당국에 의해 처형된 것으로 알려진 부인에 대해 자서전에서 안타까움과 함께 사죄의 마음을 밝힌 바 있다.

이명박 정부 출범 후 대북 정책의 기류가 바뀌면서 황씨는 운신의 폭을 넓혔다. 지난 3월 말~4월 초 초청 강연을 위해 미국·일본을 방문했고 매주 대학생 안보강연을 하는 등 김정일 체제 비판활동을 벌여 왔다. 황씨는 최근까지 건강한 편이었던 것으로 측근 인사들은 전했다. 탈북자 출신 1호 박사로 『주체사상의 종언』 저자인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은 “선생님은 김정은 얘기만 나오면 불쾌감을 크게 나타내면서 ‘그런 철부지 같은 놈 얘기는 내 앞에서 꺼내지도 말라’고 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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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엽의 마지막 편지 공개=탈북자단체인 북한민주화위원회가 10일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가 생전에 남긴 친필 서한”이라며 황씨의 글을 공개했다. 황씨가 남긴 친필 편지는 “나는 늙고 무능한 생명이지만 동지들을 위하여 바치겠습니다”는 비장한 문장으로 끝난다. 이 편지는 황씨가 지난달 9일 북한인민해방전선(북민전)이라는 단체의 창립을 축하하며 썼다. 북한민주화위원회는 이날 인터넷 홈페이지에 ‘고 황장엽 선생님의 마지막 부탁’이란 제목으로 편지를 올렸다. 황씨는 편지에서 “김정일 세습 독재 집단은 최악의 민족 반역 집단이며 우리 민족을 모독하는 흉악한 국제범죄 집단”이라고 비판했다.  

이영종·김효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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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미주탈북난민인권보호협회 상임고문   *사망
[前] 북한민주화위원회 위원장   *사망
[前] 북한최고인민회의 의장   *사망

192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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