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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는 해 이성계 “밝은 달 가득한데 나는 홀로 서 있도다”

중앙선데이

입력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최고 지도자 자리는 일체의 사심이 허용되지 않는 자리다. 최고 지도자가 자신에게 집중된 권력을 사적인 용도로 사용하는 순간 공적인 가치가 추락하면서 조직은 수렁으로 빠져든다. 이성계는 선양의 형식으로 새 왕조를 개창하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지만 사적인 사연으로 후계자를 결정함으로써 자신이 만든 왕조에 의해 거부당하는 비극을 겪게 된다.

이성계가 요동 정벌을 반대한 ‘사불가론(四不可論)’ 중에 첫 번째가 “작은 것이 큰 것을 거역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인시화(東人詩話)에 실려 있는 “눈에 보이는 곳을 모두 우리 땅으로 한다면/초(楚)·월(越)·강남인들 어찌 용납 않으랴[若將眼界爲吾土/楚越江南豈不容]”라는 이성계의 시구는 그 야망의 크기를 보여준다. 스물한 살 때까지 원나라 소속이었던 이성계는 본질적으로 대륙의 사람이었고, 정도전도 중원을 차지하려는 웅지를 품고 있던 전략가였다.

태조 어진 고종 9년(1872년) 전주 경기전의 어진이 낡았기 때문에 박기준 등에게 영희전의 어진을 모사하게 한 그림이다. 사진가 권태균


태조 1년(1392) 10월 정도전은 신왕조 창업을 알리는 계품사(啓稟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3월 귀국했다. 그런데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흠차내사(欽差內史) 황영기(黃永奇)를 보내 “그 마음은 우리 변방의 장수[邊將]를 꾀는 데 있었다”면서 정도전이 요동을 오갈 때 여진족 장수들을 회유했다고 비난하고 나섰다. 심지어 주원장은 “짐은 장수에게 명해서 동방을 정벌할 것”이라고까지 협박했다. 드디어 주원장은 태조 5년(1396) 초 조선에서 보낸 표전문(表箋文: 국서)에 “경박하게 희롱하고 모멸하는 문구가 있어 또 한번 죄를 범했다”면서 사신들을 억류하면서 정도전의 송환을 요구했다. 조선이 표전문 작성자는 대사성 정탁(鄭琢)이라고 거부하자 주원장은 “정도전이란 자는 왕에게 어떤 도움을 주는가?…이 사람이 반드시 화(禍)의 근원일 것”이라는 국서를 보내 극도의 경계심을 드러냈다.

태종실록이 “정도전이 (태조에게) 옛일에 외이(外夷: 이민족)가 중원에서 임금이 된 것을 역사로 논(論)하고…또 도참설(圖讖說)을 인용해 그 말에 맞추었다(5년 6월 27일)”라고 전하는 것처럼 이성계와 정도전은 실제 중원 정벌을 준비하고 있었다. 북벌을 단행하면 명과 조선 중 하나는 멸망하는 전면전이 될 것이었다. 태종실록이 「(정도전이) 남은과 깊게 교결하고 “사졸이 이미 훈련되었고, 군량도 이미 갖추어졌으니 동명왕(東明王: 고구려 시조)의 옛 땅을 회복할 수 있는 때(5년 6월 27일)”」라고 말했다는 기록처럼 위화도 회군 때와는 달리 철저한 준비가 갖추어졌다.

태조 6년(1397) 11월 명나라에 억류되었던 정총(鄭摠)·김약항(金若恒)·노인도(盧仁度)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이성계는 명나라 정벌 결심을 더욱 굳혔다. “정도전과 남은(南誾)이 임금을 날마다 뵙고 요동 공격을 권고했기에 진도(陣圖)를 급하게 익혔다(태조실록 7년 8월 9일)”는 기록대로 거국적인 정벌 준비 체제에 들어갔다. 진도를 익힌다는 것은 개국과정에서 발생한 사병들을 공적 군사체제로 편입시키는 것을 의미했다. 과거 이성계가 요동 정벌을 자신을 제거하려는 최영 등의 음모로 생각한 것처럼 사병을 가진 왕자들도 자신들을 제거하려는 정도전의 계략으로 보았다.

왕자들은 자신들의 사병을 관군으로 편재시키든지 쿠데타를 일으키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태조 7년(1398) 8월 14일 태조가 병석에 누운 것이 전기였다. 이방원(태종)은 8월 26일 전격적으로 군사를 일으켜 정도전·남은 등의 요동 정벌파는 물론 세자 방석과 방번, 경순공주(敬順公主)의 남편 이제(李濟)마저 제거하는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이성계는 자신이 병석에 누워 있을 때 혈육과 공신들을 죽인 방원에게 경악하고 분노했다.

그러나 실권은 이미 방원이 장악한 상태였다. 방원은 부친의 분노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생존 형제 중 맏이인 방과(芳果: 정종)에게 세자 자리를 양보했다. 동각잡기에서 쿠데타 당일 방과는 “기도할 일이 있어 소격전(昭格殿)에서 재계하고 잤는데, 변이 났다는 말을 듣고 걸어서 성을 넘어 독음(禿音)마을 집에 숨었다”라고 전하는 대로 태조의 완쾌를 비는 기도를 올리다가 쿠데타가 발생하자 방원 편에 서지 않고 도주했던 인물이었다. 태조는 그해 9월 5일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마음을 편안히 먹고 병을 치료하고자 한다”면서 왕위에서 물러났다. 식물 임금이었으나 쿠데타에 가담하지 않은 방과가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을 위안 삼았다.

태조는 백운사(白雲寺)의 노승 신강(信剛)에게 “방번, 방석이 다 죽었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을 수가 없다(정종실록 1년 3월 13일)”고 탄식했으나 자신의 무원칙한 후계자 결정이 비극의 뿌리라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았다. 이성계는 개경으로 돌아가 시중(侍中) 윤환(尹桓)에게 “내가 한양에 천도(遷都)했다가 아내와 아들을 잃고 오늘 환도(還都)했으니 실로 도성 사람에게 부끄럽다. 날이 밝지 않았을 때만 출입해서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해야겠다”고 말할 정도로 자신의 성취 자체를 회의했다. 이성계는 정종 1년(1399) 9월 남편을 잃은 경순공주에게 여승이 되라고 권할 수밖에 없었는데, 정종실록은 “머리 깎을 때 이슬 같은 눈물을 흘렸다”라고 전하고 있다.

건원릉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조선 태조의 무덤으로 동구릉 내에 있다. 개국 시조인 태조 이성계에게만 두 글자(건원)의 묘호가 붙었다. 사진가 권태균

정종 2년(1400) 1월 28일에는 동복(同腹) 형제들끼리의 칼부림인 제2차 왕자의 난이 발생했는데, 이성계는 승자인 세자 방원에게 “삼한에 귀가(貴家)·대족(大族)이 많은데, 반드시 모두 비웃을 것이다. 나도 부끄럽게 여긴다(정종실록 2년 2월 4일)”고 꾸짖었다. 정종 2년(1400) 7월 세자 방원이 태상왕(太上王)이란 존호를 올려 달래려고 하자 이성계는 왕자의 난 때 방원에게 내응한 조온(趙溫)·조영무(趙英茂)·이무(李茂) 등의 처벌을 요구했다. 이성계가 “너희들은 너희를 따르고 아첨하는 것만 덕으로 여기고 대의(大義)는 생각하지 않느냐?”라고 꾸짖었다. 이에 세자 방원은 조온을 완산부, 이무를 강릉, 조영무를 곡산으로 귀양 보냈다. 성공한 쿠데타를 처벌하려는 이성계에 대해 사헌부와 형조에서 ‘이무 등은 아무 죄가 없다’고 반대했으나 이성계가 “군신의 대의(大義)를 돌보지 않고 오직 이익만 구하는 사람을 믿고 맡기면, 대위(大位: 왕위)를 누가 엿보지 않겠는가? 조선의 사직이 오래 갈 수 있겠는가?(정종실록 2년 7월 2일)”라고 일갈했다. 방원이 조온 등을 귀양 보내자 마음이 조금 누그러진 이성계는 8월 21일 정종과 세자 방원이 헌수하는 연회에 참석했다.

하지만 연회 때 이성계는 “밝은 달이 발[簾]에 가득한데 나는 홀로 서 있도다[明月滿簾吾獨]”라는 시구를 짓고는 방원에게 “네가 비록 급제했지만 이런 시구는 쉽게 짓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 “산하는 의구한데 인걸은 어디 있느뇨[山河依舊人何在]”란 시구를 짓고 좌우를 돌아보며 “이 구절에는 깊은 뜻이 있다”고 말했다. 정도전·남은 등의 개국 동지들을 회고하는 시구였다. 정종 2년(1400) 10월 11일 이성계의 만 예순다섯 탄일에 방원은 정도전과 남은의 당여(黨與)를 용서하는 큰 선물을 주었다. 나흘 후 이성계가 신암사(神巖寺)에서 방석과 이제 등의 명복을 비는 큰 불사를 지낼 때 정종 부인 덕비(德妃)와 방원 부인 정빈(貞嬪)이 참석할 정도로 해빙 무드가 조성되었다.

그러나 그해 11월 11일 정종이 왕위를 방원에게 물려주자 다시 냉전 기류로 바뀌었다. 정종이 좌승지 이원(李原)을 보내 양위하겠다고 보고하자 이성계는 “하라고도 할 수 없고, 하지 말라고도 할 수 없다. 이제 이미 선위했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라고 싸늘하게 대답했다. 그럼에도 이성계는 태종 1년(1401) 2월 덕수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맞이해 잔치를 베풀고 또 직접 태평관으로 가서 잔치를 베풀어주었다. 방원을 증오하지만 자신이 세운 왕조 자체는 부인할 수 없는 딜레마가 이성계에게 있었다. 태종은 황해도 평주 온천까지 직접 가서 이성계를 문안하고 이성계의 탄일에는 죄수를 석방하는 등 부왕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노력했으나 이성계는 태종 2년(1402) 12월 계비 강씨의 친척인 안변(安邊)부사 조사의(趙思義)의 난에 직접 가담할 정도로 태종에 대한 증오가 뼛속 깊이 박혀 있었다.

아무리 이성계가 발버둥쳐도 태종의 왕권은 확고했고, 이성계도 이런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태종이 재위 6년(1406) 8월 전위(傳位) 소동을 벌였을 때 이성계는 “나라를 전하는 것은 국가 대사인데 내게 고하지 않는 것이 옳겠는가?…내가 죽기 전에는 다시 이런 말을 듣고 싶지 않다(태종실록 6년 8월 30일)”고 말할 정도로 태종의 왕권을 인정했다. 양자 사이에 해빙 무드가 조성되던 태종 8년(1408) 1월 20일 태조는 갑자기 풍질(風疾)에 걸렸다. 태종은 죄수를 방면하고 산천에 사람을 보내 제사를 지내 쾌차를 빌었으나 태조는 5월 24일 세상을 떠났다. 원나라에서 태어나 선양의 형식으로 새 왕조를 개창했다가 자신이 세운 왕조에서 쫓겨난 일흔셋의 파란만장한 생애가 끝을 맺은 것이다. 원칙을 무시한 후사 책봉이 낳은 불우한 말년이었다.

<태조 끝. 다음부터 망국 군주 고종편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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