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국군주 망국군주 태조⑤ 불우한 말년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이성계가 요동 정벌을 반대한 ‘사불가론(四不可論)’ 중에 첫 번째가 “작은 것이 큰 것을 거역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태조 1년(1392) 10월 정도전은 신왕조 창업을 알리는 계품사(啓稟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3월 귀국했다. 그런데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흠차내사(欽差內史) 황영기(黃永奇)를 보내 “그 마음은 우리 변방의 장수[邊將]를 꾀는 데 있었다”면서 정도전이 요동을 오갈 때 여진족 장수들을 회유했다고 비난하고 나섰다. 심지어 주원장은 “짐은 장수에게 명해서 동방을 정벌할 것”이라고까지 협박했다. 드디어 주원장은 태조 5년(1396) 초 조선에서 보낸 표전문(表箋文: 국서)에 “경박하게 희롱하고 모멸하는 문구가 있어 또 한번 죄를 범했다”면서 사신들을 억류하면서 정도전의 송환을 요구했다. 조선이 표전문 작성자는 대사성 정탁(鄭琢)이라고 거부하자 주원장은 “정도전이란 자는 왕에게 어떤 도움을 주는가?…이 사람이 반드시 화(禍)의 근원일 것”이라는 국서를 보내 극도의 경계심을 드러냈다.

태조 6년(1397) 11월 명나라에 억류되었던 정총(鄭摠)·김약항(金若恒)·노인도(盧仁度)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이성계는 명나라 정벌 결심을 더욱 굳혔다. “정도전과 남은(南誾)이 임금을 날마다 뵙고 요동 공격을 권고했기에
왕자들은 자신들의 사병을 관군으로 편재시키든지 쿠데타를 일으키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태조 7년(1398) 8월 14일 태조가 병석에 누운 것이 전기였다. 이방원(태종)은 8월 26일 전격적으로 군사를 일으켜 정도전·남은 등의 요동 정벌파는 물론 세자 방석과 방번, 경순공주(敬順公主)의 남편 이제(李濟)마저 제거하는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이성계는 자신이 병석에 누워 있을 때 혈육과 공신들을 죽인 방원에게 경악하고 분노했다.
그러나 실권은 이미 방원이 장악한 상태였다. 방원은 부친의 분노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생존 형제 중 맏이인 방과(芳果: 정종)에게 세자 자리를 양보했다.
태조는 백운사(白雲寺)의 노승 신강(信剛)에게 “방번, 방석이 다 죽었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을 수가 없다(
정종 2년(1400) 1월 28일에는 동복(同腹) 형제들끼리의 칼부림인 제2차 왕자의 난이 발생했는데, 이성계는 승자인 세자 방원에게 “삼한에 귀가(貴家)·대족(大族)이 많은데, 반드시 모두 비웃을 것이다. 나도 부끄럽게 여긴다(
하지만 연회 때 이성계는 “밝은 달이 발[簾]에 가득한데 나는 홀로 서 있도다[明月滿簾吾獨]”라는 시구를 짓고는 방원에게 “네가 비록 급제했지만 이런 시구는 쉽게 짓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 “산하는 의구한데 인걸은 어디 있느뇨[山河依舊人何在]”란 시구를 짓고 좌우를 돌아보며 “이 구절에는 깊은 뜻이 있다”고 말했다. 정도전·남은 등의 개국 동지들을 회고하는 시구였다. 정종 2년(1400) 10월 11일 이성계의 만 예순다섯 탄일에 방원은 정도전과 남은의 당여(黨與)를 용서하는 큰 선물을 주었다. 나흘 후 이성계가 신암사(神巖寺)에서 방석과 이제 등의 명복을 비는 큰 불사를 지낼 때 정종 부인 덕비(德妃)와 방원 부인 정빈(貞嬪)이 참석할 정도로 해빙 무드가 조성되었다.
그러나 그해 11월 11일 정종이 왕위를 방원에게 물려주자 다시 냉전 기류로 바뀌었다. 정종이 좌승지 이원(李原)을 보내 양위하겠다고 보고하자 이성계는 “하라고도 할 수 없고, 하지 말라고도 할 수 없다. 이제 이미 선위했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라고 싸늘하게 대답했다. 그럼에도 이성계는 태종 1년(1401) 2월 덕수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맞이해 잔치를 베풀고 또 직접 태평관으로 가서 잔치를 베풀어주었다. 방원을 증오하지만 자신이 세운 왕조 자체는 부인할 수 없는 딜레마가 이성계에게 있었다. 태종은 황해도 평주 온천까지 직접 가서 이성계를 문안하고 이성계의 탄일에는 죄수를 석방하는 등 부왕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노력했으나 이성계는 태종 2년(1402) 12월 계비 강씨의 친척인 안변(安邊)부사 조사의(趙思義)의 난에 직접 가담할 정도로 태종에 대한 증오가 뼛속 깊이 박혀 있었다.
아무리 이성계가 발버둥쳐도 태종의 왕권은 확고했고, 이성계도 이런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태종이 재위 6년(1406) 8월 전위(傳位) 소동을 벌였을 때 이성계는 “나라를 전하는 것은 국가 대사인데 내게 고하지 않는 것이 옳겠는가?…내가 죽기 전에는 다시 이런 말을 듣고 싶지 않다(
<태조 끝. 다음부터 망국 군주 고종편이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