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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 속 그 이야기 <6> 전북 고창 질마재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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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하순에 꽃이 피기 시작하는 꽃무릇. [중앙포토]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된 고인돌 떼무덤과 람사르 습지, 천년고찰 선운사, 그리고 미당 서정주가 태어나고 묻힌 진마마을과 그가 넘나들던 질마재. 전북 고창의 ‘고인돌·질마재 따라 100리길’에서 그것들을 만날 수 있다. 지난해 조성된 이 길 중 3코스인 질마재길을 걸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울어대는 곳. 그 길을 걸으며 새삼 깨달았다. 이 땅이 얼마나 푸근하고 아름다운지. 가을이면 국화와 꽃무릇의 향연이 벌어지는, 시와 자연과 사람이 하나 되는 질마재길로 안내한다.

글=윤서현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고창의 젖줄 따라 미당의 숨결 속으로

인천강 연기교에서 강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인천강은 선운산 서쪽, 고수면 명매기골의 맹매기샘에서 발원해 동쪽으로 흘러 줄포만에 이른다. 민물과 바닷물이 자연스럽게 교류하는 강으로 장어와 재첩·참게·붕어 등이 풍부하고 특히 풍천장어로 유명하다. 강 하구 오베이골에서 인천강 수계에 이르는 지역은 275여 종의 다양한 동·식물의 보고로 2001년 람사르 습지에 등록되었다. 고창군의 유일한 물줄기, 고창의 젖줄인 인천강변은 10월 중순께면 억새와 갈대로 뒤덮인다. 아직 은빛 물결의 장관을 감상하기엔 이르지만, 가벼운 바람에도 서로 몸을 부대끼며 속삭여대는 소리는 지친 마음을 편안하고 상쾌하게 어루만져 준다. 그 한가롭고 평화로운 강변길은 소요산으로 오르는 오솔길로 이어진다. 연기마을에서 진마마을로 넘어가는 길이다. 고창에는 높고 가파른 산이 없다. 소요산이 444m, 고창에서 가장 높다는 방장산도 600m를 조금 넘는다. 그래서 소요산 둘레길 트레킹은 둘레둘레 주변을 둘러보고 사색하며 걷는 길이다.

비교적 평탄한 소요산 길을 30여 분 걸으면 미당 서정주의 고향, 진마마을이 나온다. ‘아직도 호랑이 냄새 나는 산-그 소요산 밑에 낮 뻐꾹새와 밤 두견이 소리가 넉넉하게 잘 들리는 마을, 대숲도 많은 마을, 과히 좁지 않은 바다, 호숫가의 바위 (중략)’(‘고향의 죽마고우 황동이에게’). 미당은 이곳에서 1915년 태어나 아홉 살 때까지 살았다. 진마마을 입구에는 2001년 복원된 미당의 생가가, 80m 아래에는 그의 외가가 있다. ‘…고향에 가 살고 싶지만/ 고향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한 나/ 고향마을 건너 뵈는 나룻가에 와/ 해 어스름 서성이다 되돌아가네’(‘망향가’)라고 외로워하던 그는 고향을 떠난 지 74년 만에 돌아와 생가가 내려다보이는 소요산 자락에 잠들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고 노래했던 그의 유택 주변은 가을이면 온통 노란 국화로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마을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그를 위해 마련한 선물이다.

생가 복원과 함께 문을 연 미당시문학관에선 꼭 6층 전망대에 올라가 봐야 한다. 이곳에선 하늘·바다·산·들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드넓은 간척평야는 곰소만 갯벌과 맞닿아 있다. 잔잔한 바다 너머엔 변산반도의 산봉우리들이 겹겹이 둘러 있다. 뒤를 돌아보니 그리 높지 않은 소요산이 넉넉한 가슴으로 마을을 감싸 안고 있다. 미당이 이 땅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시인이 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감히 해 본다.

#희로애락은 질마재를 타고

질마재는 선운리 진마마을과 바깥세상을 잇는 통로다. 마을 사람들의 모든 역사가 이 고개에 아로새겨져 있다. 진마마을은 해변 모래땅이었다. 농사를 지을 수 없었던 마을 사람들은 바닷가로 나가 고기를 잡고 소금을 구웠다. 이것을 정읍이나 장성의 장터에서 곡식과 바꿔 양식을 구했다. 읍내 장터에 가자면 어김없이 이 고개를 넘어야 했다. 질마재는 좁지만 그리 높고 험한 길은 아니다. 그 고갯길을 그 옛날 아버지들은 해산물이나 소금등짐을 지고 넘었다. 그리고 곡식으로 바꿔 돌아왔다. 장에서 돌아오는 아버지의 등짐에는 어린 자식들을 위한 선물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가족들은 아버지가 어디만큼 오셨을까 기다리고 기다렸을 것이다. 미당도 이 고개를 넘어 고향을 떠나고, 이 고개를 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질마재 산마루에 서면 람사르 습지로 지정된 고창·부안갯벌 131.9㎢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그 기막힌 절경에 쉽게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옮겨 오른쪽 오솔길로 접어든다. 소요사 입구를 지나 밤나무 길을 내려오면 맑은 저수지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둘레길은 호숫가를 반 바퀴 돌도록 이어져 있다. 저수지라기보다 깊은 산속의 호수라 하고 싶을 정도로 주변 풍광이 아름답고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하지만 시멘트 길이라 발에 느껴지는 감촉은 딱딱하다. 꽃무릇 쉼터에 도착해 호수가 잘 바라보이는 그늘집 벤치에 앉자, 발 밑에 하얀 점들이 깔려 있다. 자세히 보니 아직 싹이 트지 않은 파 뿌리 같다. 꽃무릇 뿌리다. 꽃무릇은 9월 중순이 지나면 20㎝ 정도의 꽃무릇 대가 올라온다. 그 대에 진홍색 꽃이 피었다 지면 잎이 돋는다. 꽃은 보름 정도 피어 있는데 올해는 9월 20일께 필 것 같다고 한다. 꽃이 지고 난 다음에 돋는 잎은 겨우내 달려 있다가 5월에 진다. 꽃무릇의 꽃과 잎은 결코 서로를 볼 수 없는 운명인 것이다. 그늘집에서 이어지는 나무데크 길을 따라가면 연기마을의 연기교에 이르게 된다. 진홍색 꽃무릇이 만발할 때는 마치 레드카펫 위를 걷는 기분일 것 같다.

꽃무릇의 진미를 만끽하고 싶다면 4코스의 시작인 선운사에 잠시 들러보자. 선운사 가는 길에는 국내 최대의 광활한 꽃무릇 군락지가 있어 9월 말까지 황홀한 풍경을 연출한다.

<그래픽을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길 정보 ‘고인돌·질마재 따라 100리길’은 총 40㎞로, 4개의 코스가 있다. 이 중 3코스가 질마재길이다. 시작점과 도착점이 같은 순환형 코스로, 걷는데 3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고인돌박물관에서 시작하는 1코스는 오베이골 생태연못과 운곡저수지, 동양 최대 크기의 운곡고인돌을 지나 원평마을로 이어진다. 인천강을 따라 걷는 2코스에서는 할매바위, 병바위 등 장엄한 기암괴석과 다양한 철새를 감상할 수 있다. 1, 2코스 각각 2시간10분, 2시간30분 소요. 4코스는 ‘보은염 소금길’이라 불린다. 검단 선사는 선운사를 창건할 당시, 마을의 도적 떼에게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얻는 법을 가르쳤다. 도적질이 없어지고, 소금을 만들어 팔면서 살림살이가 넉넉해지자 동네 사람들은 검단 선사의 은혜를 잊지 못해 매년 이 길로 걸어서 부처님께 보은염을 공양했다고 한다. 선운사를 출발해 검단소금전시관을 거쳐 좌치나루터까지 간다. 가장 긴 코스로 4시간30분은 잡아야 한다. 4개의 코스 모두 경사가 완만해 트레킹 초보자도 힘들지 않게 즐길 수 있다. 문의 고창문화원 063-564-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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